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9) 5·17과 나
그 다음날에도 나는 육본에 출두를 했다. 거사를 한 군인들의 행동을 지지해 달라는 박정희 소장의 끈덕진 요청과 없었던 일 운운하며 원대복귀하라고 대꾸한 장도영 총장의 설득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계속이 되고 있었다.
한데 그날은 5·16 주체세력 중의 한 사람인 장경순(張坰淳) 준장과 원충연(元忠淵) 대령이 "해병대가 혁명에 가담을 했으니 사령관께서도 지지를 해주셔야지요." 하며 애걸복걸하듯 종용을 하는 바람에 입장이 매우 난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태가 극히 불투명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얘기가 되겠는데 장 총장이 계속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듯이 다른 총장들과 나도 매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전날에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박정희 장군도 나에게 속히 혁명을 지지해 달라며 종용을 하기에 나는 "육군에서 다 한 일인데 해병대사령관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육군총장이 지지를 하지 않는데 해병대사령관이 어떻게 지지를 할 수가 있겠는가" 하며 내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모면했는데, 그날 오후 나는 내가 했던 그러한 대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급해진 상황의식 때문이었는진 모르나 나 자신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가운데 하마터면 나 자신 뿐 아니라 해·공군총장까지 함께 사살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훗날 원충연(元忠淵) 씨가 쓴 옥중회고록(獄中回顧錄, 1981.12.31 雪友社刊)을 통해 읽어볼 수 있었다.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공보비서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원충연 대령은 1965년 5월 반혁명 음모사건으로 검거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감형이 되어 출옥을 했는데, 그가 쓴 그 옥중회고록(表題 : <이 줄을 잡아라> )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즉 해·공군 총장과 내가 육군총장실을 나왔을 때 여러 명의 무장군인들(장교들)이 복도를 가로막으며 "왜 혁명을 지지하지 않느냐!“ ”혁명을 지지하고 가라!" 는 등의 말을 하며 결박을 하자 화가 치민 그 세 사람 중의 어느 한 사람이 "너희들만 무기와 실탄을 가지고 있는 줄 아나? 나도 가지고 있어"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분위기가 살벌해져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몰라 원충연 대령이 그들 중의 선임장교(영관급)에게 "이런 무례를 범해서야‥‥ 이 분들이 각 군 본부로 돌아가서 상의를 해서 결정을 하게 될 일이 아닌가" 하며 설득을 한 끝에 간신히 그들을 물리치게 되었으나 불과 수초 후 누군가가 급히 원 대령에게로 다가와선 귀엣말로 해·공군 총장과 나를 사살하기 위해 정문밖에 기관총을 배치해 두었으니 배웅을 하되 현관 밖으로는 절대 따라 나가지 말라고 귀띔해주고 가 버리는 바람에 얼마나 놀라고 다급했던지 우리 세 사람을 끌어안으며 "누가 없소?" 하고 소리를 질러 바로 그 옆 부속실에서 뛰쳐 나온 그의 아우(육군대령)와 합세하여 현관이 있는 1층 복도로 내려가고 있는 우리 세 사람을 할 말이 있다며 한사코 제지하여 가까운 부속실로 안내하여 그곳에서 커피를 대접하며 얘기를 나누다가 장경순 준장과 의논을 해서 우리를 사살하려고 한 그 누군가를 설득한 연후에 우리를 돌려 보내게 된 것이라고 했고, 그 누군가를 설득할 때 장 준장과 원 대령은 우리를 사살하게 되면 사태를 더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5·16 혁명주체가 아닌 원충연 대령이 그날 육본에 나와 있게 된데 대해서는 5·16 이른 새벽 그와 친분이 두터운 장경순 준장이 전화를 걸어 급히 육본으로 나와 달라고 했기 때문이었고, 그의 아우가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은 5월 16일 아침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형 댁에 전화를 걸었더니 새벽녘에 장 준장의 전화를 받고 육본으로 갔다기에 형의 일이 걱정이 되어 그곳으로 갔다가 부속실에서 머물러 있던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러한 위기를 모면했던 나는 일진이 몹시 사나운 날이었던지 그날 오후 해병대사령부에서 또 한 차례 나도 모르게 나를 잡으러 온 6~7명의 해병대 장교들에게 연행되어 갈 뻔한 일을 겪었다.
그날 느닷없이 사령부 현관으로 들이닥쳤던 해병대 장교들은 김포 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대대장 오정근, 중령 조남철, 정세웅 대령과 최웅관, 좌병욱 중령 등이었다.
이들은 4분의 3 트럭에 싣고 온 20~30명의 대원들을 사령부의 정문과 후문에 배치하여 출입을 봉쇄해 놓고서 권총들을 찬 전투복 차림으로 현관으로 들이닥쳤던 것인데, 결국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한 행정참모부장 강기천 대령이 "이럴 수가 있느냐" 며 극력 저지를 했고, 그들을 일단 소회의실로 데리고 가서 "충성스러워야 할 해병대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더구나 사전에 아무런 보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저질러 놓고 사령관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다니 말이 되는가. 할 말이 있으면 대표자가 들어가서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정 대령(정세웅), 자네가 들어가지 그래." 하고 설득도 하고 종용을 한 끝에 가까스로 그들의 집단행동을 저지시킬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전날 아침 강기천 대령은 해병대의 거사병력이 집결해 있는 서울시 경찰국으로 가서 거사부대 지휘관에게 병력을 남산으로 이동, 배치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건의를 하여 그 건의가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알고 있고, 또 하남동 막사에서 주먹밥을 지어 공급해 주는 등 적극적인 협조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그렇게 하여 불쑥 사령관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정세웅 대령(당시 법무관실 차감)을 대면하게 된 나는 설마 그가 거사에 가담한 사람인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오 정 대령, 정 대령은 이런 일 일어날 줄 알고 있었는가?" 했더니 그는, "아 저도 혁명에 가담한 사람입니다. "라고 대꾸하기에, 순간 의아스러운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나는 "여단에 근무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고 했더니 그는, "우리끼리 서로 연락을 해서 가담을 한 것" 이라고 했고, 또 해방 후 하얼빈에서 같이 귀국하여 해군에도 같이 입대한 절친한 전우인데 어떻게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미리 얘기를 했으며 승낙을 해 주었겠냐" 고 대꾸하면서 "일을 저질러 놓으면 믿어 줄줄 알고 한 것이니 다른 총장들과 함께 빨리 지지성명을 해 달라" 고 했다.
한데, 나를 잡으러 왔던 바로 그날 오전에 있었던 일인지 오후에 있었던 일인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7~8명의 해병대 장교들은 해군본부에 들이닥쳐 해군참모총장에게 혁명을 지지해 달라고 했으나 총장이 선뜻 응하지를 않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합께 둘러앉아 있는 응접실의 탁자를 발로 걷어차며 폭언을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날 그들이 사령부를 물러난 뒤 행정참모부장으로부터 그러한 얘기를 전해듣게 되었던 나는 졸지에 위계질서가 무너져 하극상 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비극을 뼈저리는 심정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부연해 두는 것이지만 5·16정변 직후 육군에서나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중장과 6군단장 김웅수(金雄洙) 소장이 혁명 주체들에 의해 체포된 바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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