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6) 張 中將과 朴 少將의 對話

머린코341(mc341) 2014. 9. 6. 14:46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6) 張 中將과 朴 少將의 對話

 

그날 아침 7시 30분 군사혁명위원회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4개 항의 포고령을 방송했다.

 

1. 5월 16일 아침 7시를 기해 장면 정부로부터 일체의 정무를 인수한다.

2. 참의원·민의원 및 지방의회를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

3. 장면 정부의 국무위원 및 정부요원을 체포한다.

4, 국가기능의 일체는 혁명위원회가 이를 정상적으로 집행한다.

 

  그리고 오전 9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방송을 했는데, 그러한 조처가 있은 후 나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위치하고 있는 육군본부로 출두하라는 지시가 있어 육본으로 갔더니 육군본부 건물 안팎은 6군단의 포병부대에 의해 완전히 점거되어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광장에는 수백 명의 병력이 득실거리고 있었고, 정문과 건물 안 복도와 총장실 입구에는 집총한 군인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총장실에 들어서서 각 군 총장들과 거사 주동자인 박정희 소장이 침통한 분위기 속에 대좌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심각한 말을 주고 받고 있는 사람은 박 소장과 장도영 총장 두 사람이었고 해군총장 이성효 제독과 공군총장 김신 장군 등은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박정희 소장과 장도영 총장이 주고 받고 있던 말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박 소장은 "총장께서 속히 지지성명을 발표해 주셔야지요." 라고 했고, 장 총장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없었던 일로 할테니 병력을 철수시키고 원대로 돌아가시오." 하며 대꾸를 했다. 그러자 박 소장은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병력을 철수시킬 수가 있겠느냐." 며 때를 쓰듯 간청을 되풀이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이 대목에서 박정희 소장과 장도영 중장이 그런 말을 주고 받게 된 그 배경에 관해 잠깐 언급을 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 얘기는 4·19 직후 장도영 소장이 2군사령관으로 좌천이 되어 대구로 내려간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4·19때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 소장은 허정 과도내각이 출범한 후 그의 부인은 자유당 정권 때 박마리아 여사의 총애를 받아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우고 있던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을 무상출입하고 자기 자신은 자유당정권의 제2인자인 이기붕 의장의 양아들이란 소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좋은 기회에 참모총장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2군사령관으로 좌천이 된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때 대구로 내려갔던 장도영 소장은 4·19 직후 육군본부 작전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과도정부의 이종찬 국방장관에 의해 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속이 된 박정희 소장과 2군사령부 참모장 이주일 준장의 권유로 그 두 사람과 해병 제1상륙사단장 김동하 소장 등이 모의중에 있던 쿠데타 거사계획에 동참을 한 끝에 자신의 동의하에 군사혁명위원회의의장으로 추대되고 말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1960년에 실시된 이른바 3·15 부정선거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서 부산지구에서 일어난 학생·시민들의 데모에 적극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던 박정희 소장은, 내가 사단장으로 있을 때 부사단장 김동하 준장이 여러 차례 나에게 박정희 장군 얘기를 하면서 거사에 동참해 달라고 권유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그가 6군단 부군단장으로 있던 시기부터 이미 쿠데타를 모의해 왔던 5·16 군사정변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김포에 주둔하는 해병대의 일부 병력을 거사에 끌어들인 것은 예편이 되어 있던 김동하 장군이었다.

 

  한편 대구에서 거사의 총책임자로 추대되어 있던 장도영 중장이 제2공화국 정부의 장면 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이 된 것은 현석호 국방장관이 그와 친분이 두터운 장도영 장군의 장인 백인제 씨(당시의 백병원 원장)의 간곡한 청탁을 받아들여 그를 장 총리에게 천거하여 승락을 받았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고, 또 장 총리와 장 장군은 같은 평안도 출신이기도 했다.

 

  그런데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이 되어 육군의 최고실력자가 된 장도영 총장은 장면 총리와 현석호 장관의 총애를 받는 가운데 집권당의 핵심민물들과 주한 미국대사와 유엔군사령관 등 외교계 인사들과 접촉하며 교관하는 등 자신의 처지에 중대한 변화가 초래됨으로써 고민에 빠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 소장 등과의 밀약을 깨뜨리고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 자리를 사퇴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장도영 소장이 육군총장으로 영전하게 되자 대구에서는 마치 어용(漁龍)이 득수(得水)를 한 듯이 활발하게 거사계획을 밀고 나왔으므로 장 총장으로서는 파다한 소문 때문에 언제 일망타진이 될지 알 수가 없어 그 처지가 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경황 속에 드디어 거사가 결행이 되고 말았는데, 문제는 거사가 성공을 하게 될지 실패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던 당시로서는 장 총장 자신이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에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은거나 다를바가 없었을 것이다.

 

  거사 당일 장 총장은 마치 살얼음 위를 걸어가듯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거사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날 밤 12시경 장면 총리에게는 때늦은 보고를 했으면서도 현석호 국방장관이나 당시의 김업(金業) 국방부 사무차관, 또는 메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핑계로 보고를 하지 않았던 일과 전차를 앞세운 해병부대의 한강교 통과를 저지시킬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하는 척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던 그러한 행동들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날 아침 지지성명을 해달라는 박정희 소장이 요청을 어째서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게 어정쩡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일까? 추측컨데 그 이유는 적어도 그때까진 거사의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