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6) 2차 파병

머린코341(mc341) 2014. 9. 14. 18:37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6) 2차 파병

 

  2차로 파견된 부대는 한국 군사원조단(건설공병단)이었다.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한국군사원조단을 보내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

 

  즉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했던 그해 1964년 11월 어느 날 나는, 청와대 비서실의 전갈을 받고 급히 대통령 집무실로 갔더니 청와대를 방문한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존슨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박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친서의 내용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서의 내용은 월남전이 자유진영에 불리한 양상으로 변모되고 있어 미국으로서는 적극 개입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미국의 의지를 한국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1개 대대규모의 건설공병단을 파견해 주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친서에 대한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신중히 고려하겠다" 는 짤막한 답변을 하고 브라운 대사를 보낸 다음 잠시동안 나와 그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의견교환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일 후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 각 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등 군 수뇌부를 청와대로 불러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공개하고 대책을 협의할 때 박 대통령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파월할 준비를 갖추라" 는 지시를 했다. 당시의 합참의장은 김종오 대장이었고 육군총장은 민기식 대장, 해군총장은 이맹기 중장, 공군총장은 박원석 중장, 해병대사령관은 공정식 중장이었다.

 

  그리고 국회의 동의를 얻는 문제와 관련해서 박 대통령은 나에게 특별지시를 내려 여권 정치지도자들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게 했었다.

 

  그러한 지시에 따라 나는 민주공화당 정구영(鄭球嘆) 총재를 비롯하여 이효상 국회의장, 민병권(閔丙權) 국회 국방위원장, 공화당 원내총무와 정책의장 등을 차례로 만나 박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건설공병단 파견의 필요성을 설명한 연후에 그 동의안의 국회통과를 위해 적극 노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 결과 대다수 여권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협조요청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나 야당(民政黨)의 경우는 윤보선 당수를 중심으로 국군의 파월을 반대하는 것을 당론으로 정해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국회에서 주월한국군사원조단의 파견동의안을 심의했던 날짜는 1965년 1월 18일과 19일 양일간이었다.

 

  2차 파병을 위한 동의요청 주문(主文) 요지는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양국 정부의 협의에 따라 한국 정부가 정하는 기간까지 자체 경비병력을 포함한 공병 및 수송부대 등 비전투부대를 2천명 범위 내에서 파견하며 파견에 따르는 소요 예산은 1965년도 정부 예비비에서 조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비록 비전투부대이긴 했지마는 안건을 심의할 때 나는 의원들의 질문이 너무나 예리하고 까다로워 때로는 말문이 막혀 진땀을 뺄 정도로 애를 먹었다.

 

  그날 질의를 했던 의원들은 한건수(韓建洙), 황인원(黃仁元), 김도연(金度演), 정일형(鄭一亨), 김성용(金星庸), 차지철(車智微), 김형일(金炯一)의원 등이었고, 같은 질문이 중복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들이었다.

 

  즉, "최근 적색 불온 삐라가 상당량 살포되고 있는데 반공망이 뚫려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마당에 휴전선의 불안을 느끼면서 2,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빼낼 생각을 할 수가 있는가? 그 삐라의 내용을 밝히면 참을 수 없는 욕설로 일관되어 있다. 일부 구절을 읽어보면 '동족을 죽음으로 내모는 派兵策動'이라는 제목 하에 <동포형제 국군장병 여러분! 작년 9월에 140명의 국군을 월남의 전쟁 마당으로 파병한 박정희는 이제 또 다시 2,000명의 국군장병을 월남 전쟁터에 파병하려고 노골적으로 책동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청년들을 월남까지 끌고 가서 첨략전쟁의 대포밥알로 써먹으려는 미국놈들의 계획에 무조건 복종하는 천추에 용서못할 매국 반역 행위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많은 정보원이 국고를 낭비해 가면서 이것을 방지 못하는 정부, 우리는 정부 그 자체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내무, 중앙정보부장, 법무장관의 구체적인 소신부터 먼저 밝혀라."

 

  "60만에서 2,000명을 보낸다는 것이 감군(減軍)을 시인하는 결과로 귀착하는 것이 아닌가"

 

  "북괴와 중공이 한국을 침략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공과 북괴가 월남전에 직접 병력을 투입할 가능성은 없는가"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군원이관이 중지되고 군원의 증가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예비비의 설정은 어떠한가"

 

  "전투공병인가 건설공병인가"

 

  "국민의 여론이 비등할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행헌법 34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따라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했는데 월남에 가는 것도 국방의 의무를 위한 것인가"

 

  "의용군은 개개인이 상대방과의 계약에 의해 가는 것이므로 출국승인만 해 주면 될 것이고 전사자에 대한 법적 책임도 다를 것이니 지원병으로 대체할 용의가 없는가"

 

  "의용군과 정규군을 보낼 경우의 이해득실을 비교해 보라"

 

  "집단방위는 국제적인 조약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파병으로 인한 중립국 또는 비군사동맹국 간의 외교상의 이해득실이 무엇인가"

 

  "2,000명이 2만명이 될지 얼마가 될지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라는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질의사항 가운데 치안분야에 관한 것은 민복기(閔復基) 법무장관과 김득황(金得榥) 내무차관이 답변하고 외교분야에 관한 것은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 재정분야에 속하는 사항은 김학열(金鶴烈)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이, 그리고 국방분야에 관한 사항은 내가 답변을 했는데, 그 답변들은 이런 요지로 이루어졌었다.

 

  "서울 시내의 일부 지역에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반대하는 적색 불온삐라가 살포되고 있는데 그 진상을 조사중에 있다. 북괴에서 고무풍선을 이용해서 띄워 보내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

  "2,000명을 보내는데 소요되는 예비비 책정액은 약 5,000만원이며, 정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예비비의 총액은 23억원이다 "

  "월남과 한국과는 현존하는 조약이 없지만 외교상 실리면에서 한국의 안보와 직접 간접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자유우방국의 집단안보를 수호한다는 우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파병을 하려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한 답변의 요지이다.

  "휴전선 상에서의 남침은 유엔군과 우리의 힘이 강대해서 기도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2,000명이 빠져 나간다고 해서 북괴의 전투력이 그만큼 강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빠져 나간만큼 보충을 하면 될 것이다."

  "한국군이 17도선을 넘어서 하노이로 북진하는 것이 아니라 월남공화국 내에서 재건사업을 위해 도와주는 것이므로 북괴나 중공이 월남전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군원이관 문제는 잘 해결될 줄로 믿는다. 국민의 여론은 비등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6·25때 집단안보를 위해 파견된 수십만의 외국군인들이 우리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은공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기 때 문이다."

  "의용군도 한국의 아들들이다. 6·25때 중공군도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참전을 했지만 실제는 현역군이었다. 전역한 예비역 중에서 지원자를 뽑아서 보내게 될 경우 재훈련을 해야 하므로 시간도 돈도 더 많이 들게 된다."

  "전투공병의 역할은 수행하지 않고 건설공병으로서의 복구사업에 투입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집단안보 없이 국내안보는 불가능한 일이다. 6·25때 미군은 36,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14만명의 부상자를 내어 다리가 부러지고 눈이 빠진 중상자들이 지금도 거리를 기어 다니고 있지 않는가. 월남에 파병을 하는 일은 곧 우리 스스로의 국방을 돕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국방위원회에서 가졌던 그 이틀간의 대정부 질의를 거쳐 그 안건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날짜는 1965년 1월 26일이었으며, 본회의에서 처리된 표결 결과는 찬성 106, 반대 11, 기권 8표로 가결되었다.

 

  그날 본회의에서는 정운근(민정당), 김대중(민주), 김은하(민정), 송한철(공화), 소선규(무소속) 의원 등 소수의원의 질의가 있었으나 그 요지가 국방위원회에서 질의했던 내용과 비슷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국방부에서는 일반명령 제11호로 합동참모본부 내에 월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전담할 기획단을 잠정적으로 설치하여 단장으로 임명된 손희선(孫熙善) 소장(합참 작전참모부차장)의 주관하에 파월부대의 증파에 따르는 제반사항, 그 중에서도 특히 주한 유엔군사령부와 주월 미 군사지원 사령부와의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제반 협조사항에 대한 연구를 면밀히 하도록 했다.

 

  그리고 국회의 결의가 있은 후 국방부에서는 파월할 공병단의 명칭을 청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이름을 따서 '비둘기부대'로 명명(命名)하고 육군과 해병대(1개 중대)로 편성된 1개 대대의 공병과 자체방위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대 및 이들 병력을 수송하기 위한 해군병력 등 도합 2,000여명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 장병들을 중부전선에 집결시켜 초대 단장으로 임명된 조문환(曺文煥) 준장의 지휘하에 약 1개월간 현지(월남) 실정을 감안한 특수훈련을 실시토록 했다.

 

  그런 다음 2월 5일에는 주무장관인 나와 합참의장, 각 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및 유엔군사령관을 위시한 한·미 고위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결단식을 거행했고, 2월 9일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개최된 국민환송대회에 참가하고 다음날 인천항에서 우리 해군 특수전대와 미해군 함정에 승선하여 마침내 장도에 올랐는데, 3부요인과 군수뇌부, 주한외교사절단과 파월장병들의 가족, 시민, 학생단체 등 약 2만명의 환송객이 운집한 가운데 개최된 국민환송대회장에서 박 대통령은 전 장병에게 은제팔찌 하나씩을 선물하고 자유민의 전우로서 부여된 지원임무를 완수하고 전원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유시를 했었다.

 

  그리고 비둘기부대가 파월된 무렵까지에는 파월 미 군사지원사령관(R. G. Stillwell 소장)과 대한민국 군사지원단 선발대장 이훈섭 소장 간에 군사협정이 체결되어 비둘기부대의 임무수행을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6일간의 항해 끝에 사이공강 입구에 도착했던 비둘기부대는 그곳에서 사이공 북방 22마일 지점의 '디안'으로 이동하여 월남공화국 정부가 요청하는 바에 따라 자위적인 작전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월남 정부의 평정(平定)계획에 의한 대민 지원사업을 전개했는데 그해 9월 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과 함께 이 주월한국군사원조단은「건설지원단」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