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7) 3차 파병
세번째로 파월된 부대는 1개 사단의 전투부대였다.
비둘기부대를 파월했던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의 서거(1963. 11. 22)로 부통령 직위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 존슨 미국 대통령의 공식 초청으로 약 10일간의 일정으로 방미 여행길에 올랐다.
방미 여행에는 장기영 부총리와 국방장관인 필자, 홍종철 공보장관, 문덕주 외무차관, 장창국 합참의장서리, 김종갑 국방위원장,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 김현철 주미대사 내외, 윤호근 외무부 의전실장 등 10명의 공식 수행원과 박종규 경호실장, 박상길 대통령공보비서관을 비롯한 15명의 비공식 수행원이 동행을 했다.
그날 오후 2시 55분 백악관에서 제공한 존슨 대통령의 전용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했던 박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 일행은 약 16시간 후 목적지인 월리암스버그의 행리공항에 도착, 숙소인 알렌버드관에서 일박했다.
그런 다음 박 대통령은 17일 오후 5시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과 제1차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1차 정상회담때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월남에 파견되어 있는 건설공병단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투사단의 증파를 정식으로 요청했고, 요청을 받은 박 대통령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만큼 즉석에서 수락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백악관 맞은편에 있는 영빈관에서 숙박을 하게 된 박 대통령과 나는 그 다음날 아침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갖게 된 조찬모임 때 한국군의 파월기간중 군원이관 문제를 유보해 줄 것으로 요청하여 동의를 얻어 내었다.
군원이관이란 당시 미국 정부에서 한국에 제공해 주고 있던 2억 5천만달러에 해당하는 군사원조를 매년 3천만 달러씩 감축하여 그 감축된 분을 한국 정부가 떠 맡으라는 것이었는데, 국방부에서는 군원이관의 유보를 통해 확보한 예산을 가지고 직업군인들의 처우개선을 도모할 예정이었다.
박 대통령은 19일 오전 11시 제2차 정상회담을 마치고 백악관에서 개최된 고별식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뉴욕을 방문하기 위해 엔드류 공군기지로 향했는데, 양국 고위보좌관들에 의해 작성된 그 공동성명의 골자는
(1) 월남 지원을 포함한 양국의 당면한 공동목표의 달성을 위한 계속적인 협조 유지,
(2) 한국의 안전을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의 계속과 주한미군의 강력한 군사력 유지,
(3) 한국의 경제자립을 위한 1억5천만 달러의 장기차관 제공,
(4)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미국의 대한군원정책의 불변동,
(5) 한·미 행정협정의 체결 합의 등 5개 사항이 었다.
한편 20일 상오 0시(한국시간)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던 박 대통령은 뉴욕시청과 뉴욕시 상공회의소를 차례로 방문하여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오찬회에는 뉴욕시장과 실업계 및 사회명사 등 약 500명의 인사들이 자리를 같이 했고, 그날 오후 4시 30분에는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우탄트 사무총장과 회담을 가짐으로써 뉴욕시에서의 공식 스케줄을 마쳤다.
그런데 5일간의 워싱턴 및 뉴욕 방문기간중 나는 양개 도시의 시당국과 시민들이 베풀어 준 박 대통령에 대한 정중하고도 열렬한 환영에 깊은 인상과 감명을 받았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워싱턴에서 목격했던 환영의 영상들은 이러했다. 즉 17일 1차 정상회담을 마친 박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과 함께 방탄 승용차를 타고 워싱턴시의 주요 번화가를 행진한 후 백악관 맞은 편의 영빈관에 도착했는데, 그때 양국 정상이 탄 승용차를 선도하고 있던 고풍스런 각급 악대의 주악과 행진도 인상이 깊었지만 장식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태극기와 성조기가 물결치듯 나부끼고 있는 번화가들의 인도와 연도에 몰려 있던 약10만의 환영인파도 나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은 뉴욕시의 고층빌딩에서 베풀고 있던 색종이에 의한 화려한 환영장면이었다.
과거 2차대전 직후 아이젠하워 장군이 개선장군으로서 귀국을 했을 때나 6·25전쟁 중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극동군총사령관직과 유엔군사령관직을 해임당한 맥아더 원수가 귀국했을 때 TV를 통해 볼 수 있었던 환상적인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그날 미국 정부와 국민이 베풀어 준 정중하고도 열렬한 환영분위기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던 나는 한·미 양국관계가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계기로 보다 강력한 동반자적 유대를 맺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바야흐로 국운이 새롭게 열리는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미국의 조야는 쿠데타를 주도했던 박 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하고 군사정부의 반민주적, 반미적인 정치행태에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해 왔었는데, 그러한 미국 정부와 국민이 박 대통령의 방미를 그토록 정중하고 열렬하게 환영했다는 사실은 곧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계기로 박 대통령 개인과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180도 전환시켰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을 보필하고 있던 나로서는 흐뭇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한국군의 월남과병이 가져다 준 정치사적 의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뉴욕 방문을 마친 박 대통령은 21일에는 웨스트 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22일에는 미 항공우주국, 24일에는 LA를 방문하고 26일 오전 8시 미 대통령 전용기 편으로 LA공항을 출발하여 27일 오후 5시 30분 김포공항에 도착, 귀국했다.
그런데 10일간의 방미여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 박 대통령은 미처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에게 이러한 지시를 했다.
즉 정구영 공화당 의장에게 전투사단 파견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미리 협조를 구해 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께서 정치권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쓰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행장에 내리는 즉시 와병중에 있던 정 의장을 서대문 자택으로 방문하여 그 분 자택의 서제에서 그 문제에 대한 거론을 하고 협조를 요청했더니 정 의장은 "월남전이 치열하다고 하는데 만약에 전사자들의 유가족들이 전사자들의 유해를 메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라도 벌인다면 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하면서 전투부대의 파견에는 매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그러한 보고에 접한 박 대통령은 수일후 나를 청와대로 불러 전투부대 증파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국회 내에서의 반대여론이 두려워 그런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있는 공화당 정부라면 오늘로써 깃발을 내리고 모두 사퇴를 해야지" 하며 장경한 태도를 표명했다.
또한 전투부대의 파월을 앞두고 국방부에서는 월남에 파견된 선발대장 이훈섭 소장으로 하여금 주월 미군사령부 전투병력 파월에 따르는 제반실무를 협의토록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제기된 것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문제였다.
미군측은 2차대전 때의 선례를 들어가며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월한국군이 주월미군사령관의 지휘통솔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했지만 주무장관인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주월 미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게 될 경우 한국군은 캄보디아 국경지대나 월맹군의 침투 루트가 있는 위험지구에 배치하게 되면 많은 병력손실을 입을 염려가 있었고, 또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그것이 곧 국내 정치문제로 비화하여 민정으로 이양된지 얼마 안되는 정국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그 속사정이란 항만에서의 하역과 수송, 건설 및 구호사업에 참여할 한국 기업체와 근로자들의 월남 진출과 활동을 용이하게 하고 전투부대의 전투손실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작전지역을 비교적 안전한 해안지대를 따라 배정받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해안가로 나 있는 1번 도로의 장악을 통한 군사적인 실리와 국내 건설업체의 진출과 활동을 용이케 하는 경제적인 실리를 함께 추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작전지역을 유지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물론 배수의 진을 칠 상황도 아니고 또 전후방이 있는 전쟁터도 아니었지만 특히 미군의 제해권과 제공권의 장악으로 360도의 방위 각도 중 180도에 속하는 해상공간 지역으로부터는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그 공간지대를 통한 보급품의 운반 등으로 그만큼 작전에 안전을 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 곧 그러한 이점이었다.
그런데 선발대에 뒤이어 월남에 파견된 실무단장(李世鎬 소장)으로부터 주월 미군측의 주장이 너무 강경해서 지휘권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렵다는 보고에 접하게 된 나는 계속 지휘권을 넘겨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면서 지휘권을 고수할 나름대로의 명분과 구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 끝에 월남군이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하게 된 나는 월남군이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는 한 한국군도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할 수밖에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실무단에 보내어 그 주장을 관철시키도록 했다.
따라서 그 문제는 결국 주월 미군사령부와 국방부에서 파견한 실무단차원에선 타결을 보지 못하게 되어 그 후 유엔군사령관 비치 대장은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그리고 브라운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직접 그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장창국 의장과 김용배 총장을 만찬에 초대한 자리에서 비치 사령관은 "전장에서 승패의 관건이 되는 지휘권이 단일화를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고 말하면서 주월 한국군의 지휘권을 주월 미군사령관에게 맡겨 달라고 했으나 장 의장과 김 총장은 답변을 하지 않고 장관에게 그 뜻을 전하겠다고 말하고 그 다음 날 나에게 비치 대장을 만난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일 후 박 대통령을 면담하게 된 나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즉 브라운 대사가 다녀갔는데 김 장관이 파월하게 될 전투사단의 지휘권을 주월 미군사령관에게 단일화시키는 일에 강력히 반대를 하고 있다던데? 하며 하문을 했다.
그래서 내가 반대를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 즉 군사적인 목적과 경제적인 실리와 관련된 자세한 사유를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더니 크게 공감이 갔던지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권 문제는 절대로 양보해선 안 될 일이구만" 하면서 그 문제는 김 장관에게 일임을 할테니 소신대로 밀고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로부터 2~3일 후 브라운 대사가 직접 나를 찾아와 그 문제를 거론했을 때도 소신대로 밀고 나감으로써 결국 미국측은 주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한국군이 갖되 한국군과 미군과 월남군이 상호 협의해서 결정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교활한 생각이었는진 모르나 그때 나의 마음속에는 이런 계산이 서 있었다. 즉 지휘권 문제는 내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가면 반드시 관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1개 사단규모의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날짜는 1965년 8월 13일이었다. 2차에 걸친 월남 공화국 수상의 파병요청과 미국 정부의 증파요청에 따라 7월 2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상정된 그 안건은 8월 3일 국방위원회에 회부되어 8월 7일까지 대정부 질의를 거쳐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 12, 반대 2표로 승인이 되었는데, 8월 6일에는 신상철(申尙撤) 주월대사가 출석하여 현지정세를 보고했었다.
그런데 전투사단 파병동의안을 처리하기 위해 개회된 그 8월 13일의 국회 본회의장에는 야당의원들이 불참했었다. 이효상(李孝祥) 의장의 사회로 개회된 본회의 석상에서 무소속의 민영남(閔永南) 의원은 휴전선의 안전성 문제를 새삼스럽게 질의한 다음 미국 정부가 일본에서 구매하여 월남에 공급해 주는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게 하는 문제 등을 제시한데 이어 "주월 미군과 한국군의 처우면의 격차가 심한 것이 아닌가" 고 했다.
그러고 주월 한국군의 지휘권 문제를 질의했던 서인석(徐仁錫) 의원은 "앞으로 또 몇 개 사단이 더 가야만 승리를 거둘 수가 있을 것이며, 전투사단 파병의 목적이 승리를 거두는데 있는지, 자유진영의 협상고지를 위한 것인지" 를 질의했고, 전사자에 대한 보상문제를 질의했던 조창대(曺昌大) 의원은 미국 정부가 부담하는 해외파견 전투수당이 한국군보다 태국군이나 필리핀군이 더 많지 않는가고 질의했다.
이와 같은 질의에 대해 나는 이런 요지의 답변을 했다. 즉 한국의 안보를 미국은 계속 보장할 것이며, 1개 사단을 파병하게 되면 3개 예비사단을 언제든지 전투에 투입할 수 있도록 군원을 제공해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 또 한국에 남아 있게 될 17개 육군 현역사단과 1개 해병사단의 부족한 장비를 현대식 장비로 보충하게끔 한·미간에 협의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방위능력이 오히려 증강되는 셈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군원이관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군의 봉급 인상을 위한 재원의 일부로서 내년도(1966년)분을 우선 중단하는 방향으로 협의가 진행 중이라고 했고, 지휘권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으로 단일화시키지 않고 한·미·월 3국 군이 상호 협의를 해서 원만하게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답변을 했다.
한데 이러한 대정부질의를 거쳐 그날 오후 5시경에 이루어졌던 국회본회의에서의 표결 결과(기립표결)는 재석의원 140명 가운데 가:101,부:10, 기권:2표로 가결이 선포됨으로써 마침내 전투사단의 파견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애당초 합참에서는 육군 1개사단(수도사단)을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나는 그 계획(제1안) 외에 증강된 육군 2개 연대(수도사단)와 해병 1개 연대(증강)로 편성된 제2안을 만들어 박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제2안을 택하게 되었다.
내가 제2안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은 해외원정 때 전략기동부대인 해병대를 제일 먼저 투입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처럼 역사적인 그 해외원정군에 해병대의 일부병력을 포함시킬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며, 육군사단에서 떼놓은 1개 연대 병력은 그 후 증편부대로 파월이 되었다.
그리고 파월할 전투부대의 편성을 확정하게 되자 나는 '나가자 해병대'(해병대 군가)의 가사 속에 등장되어 있는 용감한 동물명인 '맹호'와 '청룡'을 따서 수도사단을 맹호부대, 해병 제2여단을 청룡부대로 명명했다.
그 군가의 제f절에 보면 "창파를 헤치면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는 무적의 맹호" 라는 구절이 있다.
청룡부대와 맹호부대의 선발대가 함께 부산항 제1부두에서 2척의 미해군 수송선에 분승하여 장도에 올랐던 날짜는 1965년 10월 3일이었다.
국회에서 전투사단 파견 동의안이 가결되자 육군에서는 이미 제정해 놓은 맹호부대의 노래를 본격적으로 보급함으로써 국민적인 출전분위기를 고조시켰으나 해병대에서는 청룡부대의 파월문제가 뒤늦게 결정점에 따라 청룡부대가 출국할 때까지 서둘러 작사를 해서 의뢰했던 작곡이 미처 완성이 되지 않는 바람에 노래를 보급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청룡부대 장병들은 청룡부대 본부 경비요원으로 편성해 놓은 군예대 요원들이 편곡해서 만든 근성가(根性歌) 등을 신나게 부르며 장도에 올랐고, '청룡의 노래'는 청룡부대의 출국 후에 제정이 되어 보급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전투부대의 파병이 결정되자 국방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처들을 취하였다. 즉 첫째는 1964년 9월 1일 월남에 파견했던 군사실무단(장, 李世鎬 소장)으로 하여금 한·미 군사실무약정서를 작성케 하여 파월 전투부대의 작전을 뒷받침하게 했고, 둘째는 그해 9월 25일 주월 한국군을 통합 지휘하게 될 주월한국군사령부를 국방부 직속으로 창설하여 파월했다.
주월 한국군을 대표했던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자유세계 군사원조정책회의의 상임위원으로 월남에서의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했는데, 이 사령부가 사이공에 지휘소를 개설했던 날짜는 1965년 10월 28일이었고, 초대사령관은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있던 채명신(蔡命新) 소장이 잠정적으로 겸직을 했다.
그후 1966. 8 주월한국군사령부는 2개 사단으로 늘어난 전투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작전지휘와 부대 간의 협조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나트랑에 야전사령부를 설치하여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전방지휘소가 되게 했다.
셋째는 수도사단(맹호부대)과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에 대한 군수지원을 담당할 군수지원사령부(십자성부대)를 창설하여 수도사단에 예속시켰다.
그해 9월 1일에 창설하여 9월 15일에 파월했던 이 부대는 10월 24일 퀴논에 도착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1966년 9사단(백마)이 증파됨과 동시에 제100군수사령부로 개편되어 나트랑에서 주월 한국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했다.
이밖에 비둘기부대 파월 후 월남정부로부터 해상 수송업무에 종사할 함정 증파를 요청해옴에 따라 해군수송전대(戰隊)를 창설하여 비둘기부대에 배속시킨 바 있던 국방부에서는 그 후 1966년 전투부대를 증파함에 따라 주월부대의 보급과 수송업무를 담당할 해군수송전대를 창설하여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시켰다.
또한 국방부는 1966년 3월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소수인원으로 편성된 전술항공지원반을 파견한데 이어 그해 10월 한국과 월남 간에 C-54항공기를 취항시킴에 따라 제8공수부대(은마부대)를 창설했는데 그후 1967년 7월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는 C-46 2대의 추가파견을 계기로「주월공수지원단」이란 통합된 지원기구를 발족시켰다.
다음 얘기는 여담으로 남기는 일화이다.
전투사단의 파월을 목전에 두고 있던 어느 날 나는, 6·25동란 때 미 8군사령관을 역임한 바 있는 벤프리트 장군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2차대전 때는 구라파지구 전선에서 참전을 했고, 전후에는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의 적화야욕 저지를 위해 활약한 바 있던 그는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훌륭한 무장이었다.
내가 장관으로 취임한 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벤프리트 장군과 나는 가덕도에서 멧돼지 사냥을 했던 옛 얘기를 꺼내면서 환담을 나누다가 당면한 월남전에 대한 진지한 의견교환도 했는데, 그때 벤프리트 장군은 "월남 국민의 사상적, 정치적인 혼란과 베트콩이 구축해 놓은 촌락의 지하 동굴진지와 정글 등으로 전후방이 없을 뿐 아니라 시계를 차단하는 정글지대와 몬순 기후 등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강한 미국의 해·공군이 십분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월남전에서 정규전을 위주로 한 작전수행으로 과연 어느 정도의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라는 나의 물음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제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그는 나에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전쟁하기 좋은 나라가 어딘지 아느냐" 고 하기에 그 답변은 전쟁경험이 많은 장군께서 하셔야 할 답변인 것 같은데요? 하고 반문을 했더니 그는 그곳은 곧 '한반도'라고 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즉 3면이 바다에 면해 있는 한반도는 특히 동·서간의 거리가 좁아 해·공군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어 정규전에서 육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선진공업국가인 일본을 병참기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과 일본에 있는 미국의 전략공군기지의 이용 가능성 및 한국 국민의 반공의식이 투철하여 전후방이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결국 그러한 얘기 끝에 대화의 초점으로 등장이 된 것은 월남전의 수행과 관련된 여러 가지 현안문제들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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