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9) 訪美旅行
1개사단의 전투부대를 파월한 지 약 8개월 후인 1966년 6월 하순경 나늘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의 초청을 받고 함께 초청을 받은 나의 아내와 장창국 합참의장, 국방부 인력차관보 문형태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김동빈 중장 등을 비롯한 수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약 1주간의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그 당시 우리 국내 공항에는 펜암여객기(4발제트기)의 항로가 개설되지 않아 일단 동경으로 가서 그 항로를 이용, 홍콩, 방콕, 뉴델리, 이란, 터키를 거쳐 목적지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 이스탄불에 기착했던 나는 터키의 국내선 여객기를 이용해서 수도 앙카라로 가서 터키 정부의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예방하여 6·25때 한국에 파병을 해 준데 대한 정중한 사의를 표명하는 한편 한국 방위를 위한 지속적인 협력과 그때까지 주한유엔군 의장대에 잔류시켜 주고 있던 1개분대의 의장대 요원을 계속 잔류시켜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내가 터키 의장대 요원을 계속 잔류시켜 줄 것을 요청했던 까닭은 비록 상징적인 존재이긴 했지마는 지난날 한국전에 참전했던 유엔 참전국 의장대 요원들로 구성된 주한 유엔군 의장대가 변함없는 상태로 존속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앙카라에서 일박을 했던 일행은 다음날 이스탄불로 되돌아와서 다시 일박한 연후에 펜암기 편으로 이스탄불을 출발, 21일 오후 뉴욕의 케네디공항에 도착, 그 다음 날 아침 워싱턴으로 향했는데 워싱턴으로 출발할 때 맥나마라 장관이 제공해 준 장관의 전용기를 타고 갔었다.
그리고 워싱턴에 도착했던 그날 아침 나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의장대로 구성된 국방성 의장대가 도열해 있는 국방성 광장에서 19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의장대를 사열하는 등 대한민국의 국방장관으로서는 일찌기 누려본 적이 없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나로서는 세번째의 리죤 오브 메리트(사령관급)를 수여받는 영예를 누렸었다.
한편 맥나마라 장관과의 회담을 가졌을 때 나는 먼저 군원이관을 중지해 줌으로써 한국 정부에서 그만큼 절약된 예산을 가지고 장병들의 급료를 인상하여 사기를 앙양할 수 있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인사말을 했고, 맥나마라 장관은 주월 한국군 장병들의 용감성을 높이 치하했다.
그런데 맥나마라 장관과 회담할 때 특히 한국군의 월남파병 후 북괴의 무장공비 남파사건이 빈발하여 휴전선과 해상의 안전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고 전제하고,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에는 목책을 설치 중에 있지만 해상에서는 구축함이 단 한 척(91함·충무함) 밖에 없어 어선과 어부를 납치하거나 해군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약 40노트의 속력으로 설치고 있는 북괴의 소형무장간첩선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니 최소한 동·서해에 한 척씩을 배치할 수 있도록 구축함 1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맥나마라 장관은 남미 콜롬비아에서 마지막 부탁이라고 하면서 통사정을 하기에 구축함 1척을 대여해 주려고 했을 때 의회에서 반대를 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구축함 대신 의회의 승인없이 지원해 줄 수 있는 APD(호위구축함) 4척을 줄테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구축함은 속력(33노트)도 빠르고 화력(어뢰발사기와 5문의 5인치포 등)도 강하지만 속력이 20노트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 APD에는 고작 3인치포 1문과 40밀리 기관포 4문밖에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상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그는 사정은 이해하고 남음이 있으나 자신의 입장이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하기에 어쩔 수 있이 4척의 APD를 받아가겠다고 했다.
그 대신 만약에 의회에서 한국에구축함 1척을 주겠다고 할 경우에는 장관께서 반대를 하지 말아 달라고 했더니 그는 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의회 내에 나를 도와 줄 국방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내가 그분들과 유대를 맺게 된 것은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후 기울여 왔던 다음과 같은 사교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의 예비역 국회의원들도 일정한 연령까지는 매년 정해진 현역부대에 가서 형식적인 입영훈련을 받게 되는데 특히 국방위원들의 경우는 그러한 입영훈련을 미 8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이나 구라파(NATO) 또는 일본에 있는 해외 미군기지를 시찰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던 나는 매년 미 8군을 시찰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내한하는 미 의회의 국방위원들과의 유대를 맺기 위해 주한 유엔군사령관에게 매년 그러한 목적으로 내한하는 국방위원들을 위해 환영리셉션이나 만찬모임을 가질 때는 나도 꼭 그 자리에 초청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바람직한 기연(機緣)이 되어 내가 장관으로 취임한 그 해부터 몇 년 동안 나는 매년 2~3명씩 내한한 국방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고 또 나로서도 답례형식의 초청연을 베풀기도 했고,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를 보내는 등 꾸준하게 유대를 강화해 오다가 특히 1965년 10월 1일, 그러니까 전투사단의 선견부대인 청룡부대의 출국 이틀 전 여의도에서 거행된 국군의날 기념행사 때 하원군사위원장 멘델 리버스 의원을 비롯한 8명의 국방위원을 VIP로 초청하여 극진한 대접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그분들을 위해 베푼 공식 만찬회가 끝난 후 나는 그분들을 청운각과 반도호텔로 모시고 가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댄스파티를 열어 주는 등 극진한 환대를 했는데, 그러한 환대를 받고 돌아갈 때 리버스 위원장은 언젠가 내가 미국을 방문하게 되면 크게 환영을 베풀 것이란 말을 했었다.
한데, 나의 그러한 기대감은 충족이 되고 남음이 있었다. 남음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성과가 있었다는 것을 뜻함인데, 사연은 이러했다.
즉 내가 워싱턴에 도착한 첫날 내가 당도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리버스 하원군사위원장을 비롯한 7~8명의 국방위원들은 나를 의회식당으로 초치하여 성대한 오찬을 베풀며 극진히 환대해 주었다. 그때 나는 "내가 도울 일이 무엇이냐" 고 말하는 리버스 위원장에게 국방성에서 맥나마라 장관을 만나 주고 받았던 얘기와 4척의 APD를 받게 된 일 등을 소상하게 말한 다음 북괴의 무장간첩선이 설치고 있는 한국의 실정으로서는 최소한 3척의 구축함을 가지고 동·서해에 한 척씩을 매치하고 한 척은 예비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한 척도 얻기가 힘드는데 어찌 2척을 바라볼 수가 있겠냐면서 모처럼 미국에 온 김에 한 척은 꼭 얻어가야 하겠으니 여러분께서 도와 주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맥나마라 장관이 의회에서 입법을 추진할 경우 반대를 하지 않기로 약조를 했다고 했더너 러비스 위원장은 "그렇다면 그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안심하고 여행이나 즐기라" 고 했다.
한편 워싱턴에 도착했던 첫날 저녁 워싱턴의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는 김현철(金顯哲) 대사가 나의 방미를 환영하기 위한 성대한 리셉션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 자리에는 험프리 부통령과 상당수의 의회 및 국무성의 요인들이 초청되어 한·미 양국의 전통적인 유대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주미 대사관의 연회에 미국의 부통령이 참석을 했던 예는 주미 한국대사관이 개설된 이래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러한 일은 곧 한국정부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감회를 느끼면서 나는 속으로 한국군의 월남파병으로 다져진 국방외교의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실감해 볼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내가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나의 아내도 어느 날 워싱턴 시가지를 흐르는 포토맥 강에 베풀어진 인상깊고 낭만적인 선상(船上) 오찬회에 초대되어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맥나마라 장관 부인이 내 아내의 워싱턴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대통령전용 요트를 제공받아 베푼 선상 오찬 모임에는 러스크 국무장관의 부인을 비롯해서 로스토 대통령 특별보좌관, 리버스 하원군사위원장 등 20~30명의 국무성과 국방성의 고위 공직자 및 의회 지도자들의 부인이 함께 참석하여 포토맥 강의 하류지대를 유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대통령 전용 요트의 선장은 미 해군의 여군 대령이었다고 한다.
이밖에 미 국방성에서는 조그마한 김치통을 들고 다니는 특별한 수행장교 한 사람(육군대령)을 차출하여 내가 식사를 할 때마다 김치를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었는데 그러한 대접을 받았던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방미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는 방미기간중 국방성과 의회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느라 많은 수고를 해준 주미대사관 무관 신태영(申泰英) 대령(후일 소장으로 예편, 수산청장 등 요직 역임)에게 리버스 하원군사위원장이 약속한 구축함 도입문제와 관련된 의회와 국방성의 추진과정을 수시로 파악하여 보고해 줄 것을 당부하고 귀국의 길에 올랐었는데 내가 귀국한 추 나에게 꾸준히 중간보고를 해 주고 있던 신 대령으로부터 그해 8월말경 마침내 의회의 승인이 났다는 보고를 받게 되어 몹시 기뻐했는데, 그후 나는 전혀 뜻밖에도 신태영 대령으로부터 미 의회의 하원군사위원회에서 또 한 척의 구축함을 우리 해군에 지원하기 위해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무슨 횡재인가 싶어 놀라움을 금할길이 없었다. 그 뜻밖의 횡재를 가져오게 했던 배경담은 이러했었다.
즉 장개석 총통의 영부인 송미령 여사가 개인적으로 연줄을 달고 있던 미 상원군사위원회에 자유중국에 구축함 1척을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됨에 따라 상원군사위에서는 입법권을 가진 하원군사위에 입법요청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요청을 받은 리버스 하원군사위원장이 한국의 사정으론 최소한 구축함 3척이 필요하다고 했던 나의 말이 생각나 상원군사위원회와 협의하여 자유중국과 한국에 구축함 1척을 주게끔 입법요청을 하게함으로써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송미령 여사와 하원군사위원회의 리버스 위원장 덕분으로 구축함 1척을 덤으로 더 얻게 된 셈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해군은 그때 APD 4척과 구축함 2척(92함·서울호와 93함·부산호)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획기적인 전력증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하원의원이었던 맨델 리버스 하원군사위원장은 약 40년간 오로지 하원의원으로 재직해 왔었고, 10여 년간이나 하원군사위원장 자리를 지키고 있던 관록이 대단한 정치지도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한 국방성에 의한 입법이 아니고 의회(하원) 입법을 통해 한국에 함정을 대여한 예는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밖에 덧붙여 둘 얘기가 있다. 그것은 곧 그 2척의 구축함과 4척의 APD가 도입된 후 미국을 방문했던 김영관 해군총장이 리버스 하원군사위원장으로부터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는 후일담이다.
김 총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리버스 위원장은 특히 1965년 10월 1일(국군의날) 나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뜨거운 환대를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날밤 공식만찬회가 끝난 후 그분들을 청운각으로 모시고 갈 때 김영관 총장도 나와 함께 동행을 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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