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1) 월남전의 대결 양상

머린코341(mc341) 2014. 9. 27. 12:54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1) 월남전의 대결 양상

 

  주월 연합군의 주축은 미군이었다. 1955년 1월 75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고딘디엠 대통령 치하의 월남군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1961년 이전까지는 고문역할과 장비공급에 그쳤으나 1962년 군원사령부를 설치한 이후에는 지원규모를 증가시켜 1963년에는 16,000명으로 늘어나게 되고,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한 뒤로는 북폭을 단행하여 확전조처를 취함으로써 병력규모가 더욱 늘어나 전투부대가 투입된 1965년 3월에는 60,000명, 주월 미군사령부가 설치된 1965년 말경에는 184,000명으로 늘어나고 1966년 6월에는 27만, 1967년 말에는 해·공군을 포함해서 총 47만명, 절정을 이루었던 1969년 5월에는 54만명으로 증가되었었다.

 

  그리고 비둘기부대가 파월된 후 월남에는 미군과 한국군 외에 호주를 비롯해서 태국, 뉴질랜드, 자유중국 등 도합 7개국의 연합군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나라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던 나라는 약 8,000명의 병력을 파견한 호주였고, 태국은 1개 연대의 보병부대, 뉴질랜드는 1개 포병대대, 필리핀은 약 2,000명의 후방지원부대, 자유중국은 소수의 심리전요원을 파견했었다.

 

  전쟁기간 중 월남에 파병되어 있던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의 총수는 60만을 상회하는 수준이었으며 76만명의 월남 정부군(육·해·공·해병대)을 합친 병력의 총규모는 약 136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월남 정부의 평정사업(平定事業) 지원이라는 작전개념에 입각하여 전술책임지역 내의 적 소탕작전을 과감하게 전개하는 한편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황폐화된 촌락의 재건과 전쟁을 겪고 있는 월남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 공군은 베트콩에 대한 월맹의 지원 루트를 봉쇄하기 위한 월맹의 군사목표에 대한 폭격과 월남군을 포함한 연합군에 대한 작전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연합군이 배치되어 있던 개략적인 배치 현황을 살펴보면 월남군의 1군단 관할지역인 북부에는 미 해병 제3상륙군사령관의 지휘 통제하에 미 육군 1사단과 3사단이 2개 사단의 월남군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고, 월남군의 2군단 관할 지역인 중부에는 미 육군 4사단과 제1기갑사단(공중기동사단) 예하의 1·2여단과 미 25사단 예하의 2·3여단 및 청룡, 맹호, 백마부대 등이 2개 사단의 월남군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도관구인 중남부의 제3군단 지역에는 미 육군 제1사단과 제173공수여단이 월남군 3개 사단 및 호주군 등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고, 남부의 제4군단 지역에는 월남군 3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연합군의 작전지원을 위해 해상에서는 항공모함과 전함 등 미 7함대가 주축이 된 160여척의 각종 함정이 활동하고 있었고, 공군은 미 제7공군과 7함대 예하의 전술공군 및 태국에 기지를 둔 미 13공군의 일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한편 연합군과 대결을 하고 있던 공산군(베트콩 정규군과 게릴라 및 월맹정규군과 지방군 등)의 병력 총규모는 약 60만의 병력 가운데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월맹 정규군(약 22만) 중의 약 14만명이 17" 선 이남으로 남하하여 월남 내부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연합군과 대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병력 규모, 전쟁 장비를 비교해 볼 때 연합군은 공산군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특히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시종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연합군과 공산군의 작전개넘이 상충(相衝)되고 있던 작전지역의 촌락들이 적 게릴라(베트콩)에 의한 전력(戰力)의 조직화로 집과 집, 촌락과 촌락들의 거미줄 같은 지하통로와 지하진지로 연결이 되고 밀림지대로까지 연결이 됨으로써 연합군의 작전을 그만큼 어렵게 했었다.

 

  연합군의 작전을 어렵게 한 것은 비단 그러한 요소들 뿐 아니었다. 빈발했던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정(政情)의 불안과 연일 일어나고 있던 거센 반정부 데모로 인한 사회불안 등도 연합군의 작전에 그만큼 부정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월 연합군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거나 그들의 영향권 내에 있는 전술책임지역에 대한 평정을 위해 많은 실적을 남겼고, 평정된 지역의 재건사업을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미군 다음으로 참전병력이 많았던 주월 한국군(연인원 32만)은 전투병력이 파월된 후 휴전에 이르기까지 약 8년간 캄란으로부터 퀴논에 이르는 중부해안의 약 7,000㎢의 책임지역과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이 담당했던 북부해안 지역의 90% 이상을 평정함으로써 월남 정부의 평정계획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참전기간중 1,174회의 대부대 작전과 576,302회의 소부대 작전을 전개했던 주월 한국군은 41,462명의 적을 사살하고 4,533명의 포로와 2,483명의 귀순자를 획득하는 한편 20,972정의 각종 화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참전기간중 58만여명의 병력(연인원)과 8,600여대의 각종 장비(연대수)를 투입하여 1,744동의 가옥과 교실 357동, 교량 136개소, 공공기관 건물 1,210동, 도로건설 449㎞ 등 많은 건설지원 실적을 기록했던 주월 한국군은 전쟁난민들의 구호를 위해 12만톤의 식량을 지원하고 477만여명의 대민 진료실적도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파병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주월 한국군은 3,506명의 전사자를 포함해서 15,922명의 인명손실(부상자 8,380명, 비전투손실 3,736명)을 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