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2) 전쟁의 귀결

머린코341(mc341) 2014. 9. 27. 12:55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2) 전쟁의 귀결

 

  그런데 그처럼 많은 연합군과 공산군이「평정」과「해방」이라는 상반되는 전쟁이념을 가지고 밀림과 촌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숨막히게 격돌하고 있던 월남전은 시종 무력에 의한 대결로 진행되지 않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교전 당사국(미국과 월맹) 간의 의견이 접근되어 휴전을 모색하기 위한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어 그 앞날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했다.

 

  미국과 월맹 간의 파리 평화회담이 개막된 날짜는 1968년 5월 10일이었다. 애당초 협상을 제의했던 쪽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끝내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한 타결을 모색하게 된 그 이면에는 우세한 병력과 장비 등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막대한 전비(戰費)와 희생을 무릅쓰고 있는데 대한 국민의 불만과 반전여른(反戰輿論)이 고조되어 존슨 대통령의 집권당(민주당) 정부로서는 그해 1968년 11월 시행될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고, 또 선거 결과 제3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닉슨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 역시 화전(和戰) 양면작전을 수행해 오다가 1969년 7월 29일 닉슨 대통령이「월남전의 월남화 계획」이란 독트린을 선언한 그 시점을 계기로 협상을 가속화시킨 끝에 1973년 1월 38일 마침내 미국측으로서는 발을 때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결함이 내포된 휴전협정문에 조인을 하게 됨으로써 휴전을 성립시키게 된 것이었다.

 

  한편 약 5만명의 병력을 월남에 파병하고 있던 한국은 미국 정부의 월남화 계획이 진전됨에 따라 월남 정부와 미국을 위시한 참전 연합국과의 협의를 거쳐 1971년 13월 4일부터 1972년 4월 6일까지 전체 병력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을 철수시킨데 이어 휴전이 성립된 후 60일 이내에 모든 외국군의 완전 철수를 규정한 휴전협정 조항에 따라 1973년 2윌 3일부터 동년 3월 23일 사이에 나머지 전 병력을 철수시킴으로써 그 역사적인 한국군의 월남 참전기간을 마감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의 월남화 계획 추진으로 타결을 보게 된 평화협정은 휴전이 성립된 후 주월 미군의 철수가 완료될 시기(60일 이내)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게 했으나 미군의 철수가 완료된 후에는 전투가 재발하여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을 위해 체결했던 평화협정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시킨 책임은 두 말 할 나위없이 전투행위를 중지시킨 평화협정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공산군측에 있었지만 그 이전의 근원적 책임의 소재는 월남전의 수렁에서 발을 빼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전투행위의 재발 방지를 위해 세심한 대책을 강구해 놓지 않았던 미군측에 있었다. 왜냐하면 협상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즉, 협정문상에 미군의 철수시한은 확고하게 못박아 두었으면서도 그때 이미 월남 내에 침입해 있던 근 30만에 달하는 월맹 정규군의 철수문제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해 놓지 않았던 일과 폴란드, 캐나다,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을 유엔에 의해 중개되지 않게 함으로써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던 일, 베트콩이 내세워 놓은 꼭두각시 집단인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를 인정해 놓았을 뿐 아니라 겉으로는 엄정 중립을 표방하며 월남 국민의 양심과 정의를 대변하는 세력임을 자처하고 있던 제3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결과적으로 그 세력이 티우 대통령의 사임과 베트콩과의 협상 및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 등을 요구하며 월남의 적화를 획책하고 있던 월맹과 베트콩의 위장된 전략과 전술을 정면에서 지원하고 나섬으로써 연일 일어난 거센 반정부 데모와 불안한 정정(政情)에 시달리고 있던 월남 정부의 정치적인 붕괴를 가져오게 했던 일 등이 곧 그러한 실책들이었다.

 

  그리고 휴전의 성립과 함께 월남 정부는 군사적인 위기도 동시에 맞고 있었다.

 

  왜냐하면 휴전 후 미국의 군사원조는 격감이 된 반면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월맹에 대한 군원은 급증하는 가운데 공산군의 군사력이 점차 강화되어 군사정세에 큰 변동이 초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와 같은 위협적인 상황 속에 1975년 3월 중순경 중부 12개 성(省)을 장악하고 있던 월남군 2군단 예하의 정예사단인 23사단이 콘톰과 플레이크 지구에서 전개되고 있던 공산군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중부 고원의 요충지인 「반메트오트」(캄보디아 국경지대)를 공산군에 넘겨 주고 후퇴한 것이 군사적인 붕괴를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전면적인 연쇄붕괴 작용을 일으킨 끝에 그로부터 불과 50일 후인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월남 공화국의 패망을 가져오게 했던 사이공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10년간 전쟁을 주도했던 미군은 45,000명의 전사자와 30만명 이상의 전상자를 내었고, 확전으로 치닫고 있던 1965년부터 1972년 사이에 소모된 전비는 무려 1,400억불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