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0) 4차 파병
네번째로 파견한 부대는 9사단(백마부대)과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월할 때 남겨 두고 간 1개 연대전투단(혜산진부대) 및 이들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부대 등이었다.
1966년 9월 하순에서 10월 초에 이르는 사이에 단계적으로 파월이 된 그 추가 전투병력은 파월 국군의 독자적인 임무수행과 자체방어를 위해 1개 군단규모의 병력이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한·미·월군 고위층 간에 대두된 가운데 2월 2일에는 전투사단 추가파병을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접수하게 되고, 2월 22일에는 월남 공화국 수상 키 소장으로부터 보내온 전투사단의 추가파병을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바로 그날 2월 22일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여 박 대통령에게 그 문제에 대한 각별한 협조를 요청함에 따라 정부에서는, 2월 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전투사단의 추가파병 요청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되었고, 그것을 접수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는 3월 3일 제1차 국방·외무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국방장관의 제안설명을 들은 다음 3월 8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요청해 왔을 때 나는 한국의 안보와 주월한국군의 처우개선 등 군사적인 면의 실리와 군원이관의 중지, 그리고 이른바 월남특수(越南特需)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경제적인 실리를 단단히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2·3차에 걸친 파병때는 6·25때 입었던 은혜에 대한 보담과 한·미 양국의 혈맹의 유대에 기반을 둔 집단안보상의 개념에 파병의 의의와 명분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할 처지가 못 되었지만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요청해 왔을 때는 그동안에 공헌했던 업적도 컸던만큼 그러한 문제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며, 특히 국가안보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최소한 3개 예비사단(육군 2개사단과 해병 1개사단)의 전력강화와 휴전선과 해상 및 영공을 통해 침투할 것에 대비한 적 무장간첩 소탕을 위한 대간첩작전용장비의 확보 및 한국에 대한 적의 재침이 있을 경우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즉각 응징에 나선다는 미국 정부의 확실한 약속을 보장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말하자면 경제적인 실리와 국가안보를 위한 확고한 보완책을 강구하려는 것이었는데, 만약에 이같은 보장을 사전에 받아놓지 못하게 될 경우 전투병력의 추가파병 동의안은 국회에서 통과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국회에서 전투사단 파병동의안을 심의할때 더 이상의 전투병력은 파병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나 자신이 직접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나는 결국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도록 했다. 즉 군사적인 요구사항은 국방부에서 작성하고 경제적인 분야의 요구사항은 경제기획원에서 작성한 다음 그것을 외무부에 제출하여 외무장관으로 하여금 요구사항들을 종합적으로 문서화하여주한 미국대사관에 제출토록 했는데 그 결과 우리 정부는 그해 3월 4일 한국 정부가 요구한 14재 선행조건의 이행을 미국 정부가 약속한 이른바 '브라운각서'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브라운각서의 14개 선행조건 가운데 제1항은 한국군의 장비현대화 계획에 관한 사항이고, 제2항은 추가파병 전투병력에 대한 장비 및 원화경비를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는 것, 제3항은 전투병력 추가파병에 따르는 보충병력 확보를 위한 미국 정부의 재정부담, 제4항은 한국군의 대(對)간첩작전 수행능력 향상, 제5항은 한국군의 병기창 시설확장, 제6항은 한국군의 전술통신시설 강화, 제7항은 보충병력을 위한 추가비용 부담, 제8항은 군원이관 정책의 수정, 진중막사 독신장교 숙사, 취사장, 식당, 위생 및 오락시설 등 부대 복지시설의 해선, 제9항은 미국의 대월(對越) 군수물자를 한국에서 구매, 제10항은 대월(對越) AID 원조자금으로 구매하는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 제11항은 건설사업체와 한국인 기술인력의 대월진출, 제12항은 한국에 대한 수출진흥과 기술원조 강화, 제13항은 1965년 박 대통령의 방미시에 약속받은 1억 5천만불의 AID차관 조기집행, 제14항은 1,500만불의 신규 원자재용 차관제공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항목 가운데 제1항의 장비현대화계획은 첫째는 10개 예비사단 가운데 3개 예비사단(육군 2, 해병 1)을 현역사단 수준으로 무장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한국군의 장비현대화를 위해 수년간에 걸쳐 수개의 155밀리와 8인치 자주포대대를 편성하고 한국군의 화력증강을 위해 M4-A3 전차를 M-48로, Ml·칼빈소총을 M-16 자동소총으로 교체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4항의 대간첩작전 수행능력 향상문제는 지상이나 해상 또는 영공으로 침투할 무장간첩이나 적 게릴라부대의 침투를 방지하거나 포착섬멸하기 위한 대간첩작전 장비와 관련된 것인데, 그 당시의 사정으로 레이더망을 강화하는 일과 백령도 및 인천 등지에 배치할 쾌속정과 단 한 척 밖에 보유하지 못하고 있던 구축함을 최소한 3척으로 늘이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북괴가 월맹이나 베트콩에 대한 간접지원을 하기 위해 특히 휴전선이나 해상을 통해 무장간첩을 수시로 침투시켜 아군의 전후방을 교란하고 어선과 어부를 납북하는 등의 행위를 자행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을 경우 국가안보를 염려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비등하여 국군의 추가파병에 제동을 걸거나 이미 파월되어 있는 병력의 철수를 요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므로 나로서는 특히 대간첩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한 장비 확보문제에 집착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무장간첩들의 대량 투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예비군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란 생각도 했었다.
한편 브라운 각서가 작성되는 초기단계에서 나와 주한 유엔군사령관 비치 대장 사이에는 전사상자(戰死傷者)에 대한 미국 정부의 보상금 액수문제 때문에 심각한 감정상의 실랑이가 있었다.
그러한 일이 있었던 시기는 2월 중순경이었고, 장소는 장관 공관 응접실이었다. 그날 고위 보좌관 한 사람을 대동하고 공관을 찾아왔던 비치대장이 나에게 제시했던 금액은 사병 500불, 장교 1,000불이었다. 그러한 액수를 제시하면서 비치 대장은 두 나라의 장례 풍속차이 때문에 국방성의 승인을 얻어 내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는 말을 했고,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 같으니 이제 증파할 부대와 시기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자고 했는데, 그 액수에 대해 기대치를 달리하고 있던 나는 냉정한 말투로 그 액수의 배액을 내지 않을 경우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파월할 때 국회에서 더 이상의 전투부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바 있는 나로서는 국회에 나가 동의를 요청할 수가 있다고 했고, 그 문제에 관한 한 설사 대통령의 지시가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국방장관으로 있는 한에는 '노우'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응접실의 분위기는 졸지에 무거운 침묵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고, 비치 대장의 표정은 사색(死色)을 띤 것 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로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 국방성으로부터 그 액수를 얻어내기 위해 그는 그동안 국방부와 협의하여 한·미군 장교들로 구성된 '한미합동 전사상자 보상금협의회'를 발족시켜 장례식장을 찾아다니며 장례식에 소요되는 제반 비용을 조사하도록 하여 사병의 경우 3일장에 500불(당시 환을 15만원), 장교의 경우 5일장에 1,000불(30만원) 정도가 든다는 자료를 근거로 그 액수를 본국 정부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브라운 대사와 함께 몇 번이나 퇴짜를 맞으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려 가까스로 승인을 받은 액수가 바로 그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군 전사자들에 대한 장례비는 장교, 사병 공히 250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잠시 후 비치 대장은 "장관님, 정말입니까?" 하고 물어본 다음 소파에 기대앉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나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는 장창국 합참의장도 배석하고 있었는데 비치 대장을 난처하게 했던 나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그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군이 월남전선에서 전사를 하거나 부상을 당했을 때 미국의 원호법에 의해 원호를 받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국방부에서는 전사자의 경우 장례비 명목으로 전상자의 경우는 그에 준하는 비율에 따라 미국 정부의 보상금을 받게 한 다음 그 위에 우리 정부의 원호금을 받게 할 속셈이었는데 결국 보상금 문제는 내가 주장했던 선으로 타결이 됨으로써 소령이상의 전사자에게는 대위 10호 급여액의 18개월분, 소령 이하 중사까지의 전사자에게는 급여액의 18개월분, 중사이하 2등병까지는 중사 1호봉 급여액의 18개월분을 지급받게 되고, 전상자는 1·2·3급으로 구분하여 1급은 전사자의 보상금과 같고, 2급은 같은 방법으로 급여액의 32개월분, 3급은 24개월분의 보상금을 받게 된 것이었다.
전투병력 추가파병을 위한 동의안은 예정대로 3월 8일 국회본회의에 상정되었고, 그날 정부측에서는 국무총리와 경제기획원장관을 비롯해서 외무, 국방, 법무, 상공, 중앙정보부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 및 각 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등이 참석하여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에 응했다.
그런데 3월 8일부터 3월 20일까지 계속된 4차 파병 동의안에 대한 대정부 질의기간 중 나는 그야말로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만큼 애를 먹었던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질의기간도 가장 길었고, 또 2차 파병때는 12명, 야당의석이 텅 비어있던 2차 파병때는 불과 3명에 불과했던 질의의원의 수가 무려 21명이나 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두가 쟁쟁한 야당의원들이었으므로 그만큼 열띤 질의가 이루어졌었다.
첫날인 3월 8일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개최된 대정부질의는 다음과 같은 나의 제안설명이 있은 후에 시작이 되었다. 즉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1개사단의 전투부대와 편제상 1개 연대가 빠져 있는 맹호사단을 보충하기 위한 1개 연대의 전투부대(혜산진부대) 및 그 부대들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부대를 파견한다는 것이 곧 그 제안설명의 요지였다.
그리고 질의에 나섰던 그 21명의 의원들은 유진산, 차지철, 강승구, 손창규, 김창근, 이중재, 신인수, 김삼, 이정래, 김상현, 한통숙, 홍영기, 서범석, 조경한, 정명섭, 최희송, 이충환, 한건수, 황인원, 고형곤, 유청 의원 등이었다.
한데 이들 의원들이 질의했던 질의내용은 대부분이 표현상의 골자가 약간 달랐을 뿐 그 초점은 휴전선의 안전이라든가 파월장병들의 처우, 군원이관, 파병의 법적 근거 등‥‥ 거의가 2·3차 파병때 질의했던 내용과 같은 것이었고, 또 의원들 간에 비슷한 내용의 질의가 중언부언 되기도 했다. 따라서 장황한 내용 구성으로 각 의원이 최소한 2개씩 질의한 많은 질의내용을 일일이 다 소개하지는 못하고 예리하고 특색이 있는 몇 가지 질의사항만을 참고로 소개해 두며, 답변 역시 f·3차 파병때 했던것과 유형이 같았기에 내 자신이 했던 한 두 개의 답변만을 소개해 두기로 한다.
"만약 한국이 외침을 받았을 때 미국이 미국 본토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고 전력을 다해 방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세계에 선포하도록 할 수가 없겠는가" (유진산 의원)
"대량투입이라는 것은 대량소모를 전제로 한 것인데 장기적이고 어렵고 복잡한, 그리고 휴식도 없고 승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힘겨운 부담을 한다고 하니 의구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차지철 의원)
"존슨 대통령은 월남전에 대한 자신의 권한은 동남아조약기구(SEATO)에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SEATO 가맹국들이 우리보다 앞장서지 않는 것은 우리 정부의 대외정책의 맹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손창규 의원)
"추가파병을 하지 않을 경우 한국의 방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 (김창근 의원)
"우리 국민의 숙원인 통일을 유엔외교를 통하여 성취하려고 하는 이 마당에 전투사단의 추가파병이 중립국 외교에 어떤 부작용을 미치게 될지 판단해 보았는가" (金三 의원)
"휴전선이 제2전선이 될 가능성은 없는가" (이중재 의원)
"작년에 파명문제를 가지고 찬부양론이 벌어져서 결론을 전개할 때 정 총리와 국방장관은 이번 파병으로 끝이 나고 추가파병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증언대에서 분명히 약속을 해 놓고서 또 보낸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동이 아닌가" (이정래 의원)
다음은 민중당 소속 신인우(申仁雨) 의원이 질의했던 사항인데 그 신 의원의 질의는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질의였다.
"국방장관이 지니고 있는 헌법책과 내가 가지고 있는 헌법책이 다를지 모르지만 헌법 제4조를 보면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정한다) 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 깊은 정신이 선전(善戰)은 할지언정 호전(好戰)은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달라($) 몇 푼 받는다고 명년 선거자금이 좀 마련된다고 이 나라 백성들이 꽃과 같이 키운 자제들을 명분없이 월남전선에 집어 넣어 개죽음을 시키려고 하는 김성은 장관은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가슴에 손을 없고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양심에 어긋나면 국방장관 내 던지시오. 그만 두면 될 것인데 왜 그렇게 양심이 괴로운 일을 하느냐 말이예요···"
이런 요지로 전개가 되었던 신 의원의 질의는 다시 이어져 "헌법 72조에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민을 통수하라)라고 돼 있는데 이 통수권이 월남까지 미치는가? 헌법은 우리나라 국내법인데 여기에 있는 통수권이 어떻게 월남까지 미치는가?" 고 했다.
신 의원의 그러한 질의에 대해 나는 기왕지사 전투부대를 보내고 보니 부대의 안전과 효과적인 작전 및 앞으로의 승전을 위해 부득불 증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보내려는 것이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과 추가 파병에 따르는 미국측의 재정부담이라든가 병력과 장비의 보충, 군원이관의 중지, 그리고 한국이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의 본토가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즉각 적을 응징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확고한 보장을 받았다는 내용의 답변을 했고, 또 작전권, 용병권, 인사권, 상벌권, 감독권 등 국군을 통솔하는 대통령의 절대적인 통솔권은 전 한국군에 미치는 것이므로 국군이 파월된 월남에까지 미친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으나 신 의원의 그 첫번째 질의는 나를 매우 곤혹스럽게 했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밤 늦게까지 토론이 계속되다 보니 피로에 지쳐 짜증이 났던 모 의원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더니 5·16 군사쿠데타를 할 때도 새벽녘에 전차를 앞세우고 한강다리를 건너더니 전투병력 추가파병 토론도 한밤중에 해치우긴가" 하면서 매도하듯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신인우 의원의 그러한 질의와는 달리 같은 민중당 소속 김상현(金相賢) 의원은 언뜻 듣기에 매우 흥미로운 고사를 인용한 질의로 좌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질의의 줄거리는 이런 것이었다.
즉, 임진왜란 후 여진족(女眞族)의 침략을 받은 명(明)나라가 우리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 준 은공을 알면서도 선뜻 응해주지 않고 가급적이면 적은 병력을 보내되 원정대장(遠征隊長) 강홍립에게 "네가 만약에 명나라에 가서 싸울 때 명나라가 유리하게 될 때에는 잘 싸우고 명나라가 불리할 시에는 여진족에게로 우리의 입장을 지난날의 관례를 생각해서 과히 불쾌하지 않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라" 는 비밀지령을 내렸다는 고사 속의 비화를 상기시키면서 "설사 파병의 명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38선이 위험한 상태에서 4만이라는 규모의 병력을 보낼만큼 우리 국력이 강한가를 정확히 판단해야 되지 않겠는가"고 했다.
한편 질의에 나섰던 21명의 위원들 가운데 대부분은 파병에 반대한 야당의원들이었으나 그 야당의원들 중 특히 서범석(徐範錫) 의원 같은 중진의원은 당론을 무시하고 "전투사단의 추가파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을 것 같으면 구태여 반대할 생각이 없다" 고 했고, 또 "이유있는 반대를 해야지 현 정부가 파병을 한다니까 반대를 한다는 식의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고 했다. 서범석 의원의 그와 같은 발언은 중구난방의 역경속에서 번갈아 증언대에 오르내리고 있던 정일권 총리와 이동원 외무장관, 그리고 국방담당 주무장관으로서 시종 집증적인 질문공세에 시달리고 있던 나의 고달픈 처지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아 어떻게나 고마웠던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야당 의원으로서 당론을 무시하고 소신껏 찬성발언을 했던 의원은 서범석 의원과 김준연(金俊淵) 의원 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4차 파병동의안을 국회 국방·외무 연석회의에서 토의할 때 민중당 소속의 김준연 의원은 "유사이래 처음 이루어진 월남파병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대사인데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있다" 고 전제하고 "내 자신이 판단컨대 국가에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을 정도로 감동을 했고, 또 그런 일로 하여 나는 그 야당 중진위원들의 꿋꿋한 정치적인 소신과 용기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한편 그 동의안에 대한 국회 본회의의 표결이 이루어졌던 날짜는 3월20일 오전 11시경이었다. 그 결과는 재석의원 125명중 가긴5, 부:a7표로가결이 됨으로써 국방부에서는 그해 9월 하순에서 10월 초에 이르는 사이에 내가 제안설명을 통해 언급했던 그 추가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파월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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