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4) 休戰線의 防柵

머린코341(mc341) 2014. 9. 27. 12:58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4) 休戰線의 防柵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후 나는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아무런 장벽(障壁)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데 대한 염려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휴전 후 각 전방사단에서는 이렇다할 방벽을 구축하지 못하고 약 1개소대의 병력이 배치된 여러 개의 GOP를 설치하여 전방지대에 대한 경계에 임해 왔었는데, 그러다 보니 GOP 사이를 뚫고 내려온 북괴군 병사들이 한밤중에 노래를 부르며 GOP 후방으로 침투하는 등의 일이 예사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을 넘나드는 적병들이 함부로 그 선을 넘나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각 전방사단에 지시하여 전방지대의 잡목들을 베어서 ×자형으로 엮은 방책을 설치토록 했는데, 막상 목책을 설치해 놓고 보니 목책 그자체가 시계(視界)를 가리기도 하고 눈·비·바람에 썩기도 하는 등 단점과 취약성이 노정되는 바람에 나는 목책 대신 어떤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궁리를 했다.

 

  그러던 중 나는 무슨 눈에는 무엇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어느날 국방부 청사에서 미 8군사령부 앞 도로를 차를 타고 지나치다가 평소에는 무심히 보아 넘긴 8군사령부의 담벽 바깥쪽에 가설해 놓은 굵은 철사로 된 닭장 철망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바로 저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휴전선의 방벽 구축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한·미 합동연구위원회의 검토과정을 거쳐 1967년 9월 중순경에 이르러 우리 한국군의 배치지역에 한해서 목책을 지금의 철책으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하고 휴전 후 아무런 방벽을 구축하지 않은 채 일부 휴전선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측은 계속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우려했던 무장간첩 침투행위는 결과적으로 기우가 아니었다. 한국군의 파월기간 중에 발생했던 수십 건의 사건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1965년 10월 15일 동부의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여 아군 초소를 습격했던 사건과 같은 달 24일 양구군의 민가에 나타난 5~6명의 무장간첩이 군인가족을 살해한 사건 등을 시작으로 발생했던 수십 건의 사건 가운데 1965년에 일어났던 가장 큰 사건은 그해 10월 24일 강화도의 갯벌에 나타난 무장간첩들이 109명의 어부를 납치해 간 사건이었고, 1966년에 일어났던 사건 중에는 11월 2일 서부의 비무장지대에서 미군 6명과 카투사 1명이 무장간첩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과 12월 13일 동해 해상에서 일어났던 명태잡이 어선(해양호)의 남북사건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67년에는 거물간첩 이수근 위장 귀순사건(3.22)을 비롯해서 무장간첩 30명의 강릉 임원진 침투사건(6.25), 무장간첩 판문점 동남쪽 미군 막사 기습사건(8.28), 초성리(경원선) 열차폭파사건(9.5), 문정역(경의선) 열차폭파사건(9.13), 동해 해상에서 발생했던 어선 12척과 어부 81명 납북사건(10.6), 동해 해상에서의 어선 4척 어부 44명 납북사건(12.15), 울진 삼척지구 공비 내습사건(12.30) 등 많은 사건이 발생했고, 1968년에는 1·21사태와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1.23) 등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발생했다.

 

  따라서 그러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간혹 나는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월남에서 싸우고 나는 국내에서 대간첩작전을 위해 싸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목책을 철책장벽으로 바꾼 후로는 적병들의 남방한계선 침투사건이 격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