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5) 이 퇴치 작전
장관으로 취임한 후 전방부대를 시찰하는 과정에서 나는 뜻밖에도 전방사단 지휘관들이 이를 퇴치하는 문제 때문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가 3~4월경이었으므로 전방부대나 후방부대가 아직도 동복을 입고 있을 때였다. 전방부대 지휘관들의 말에 따르면 대원들이 목욕을 할 수 없는 동절기가 되면 몸에 득실거리는 이 때문에 귀한 피도 빨아 먹히기도 하고 가려워서 잠을 설치게 되어 정신건강과 사기에 적신호가 초래되고 있다면서 이를 퇴치하는 일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DDT를 몸에 뿌린 적도 있으나 DDT가 인체에 해롭다는 결론이 내려 그런 방법을 쓰지 않게 되었고, 궁여지책으로 입고 있는 내의에 붙어 있는 이들을 얼려 죽이기 위해 취침하기 전 한 두 시간 내의를 병커나 내무실 밖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러 놓았다가 혹한에 꽁꽁 얼어죽었을 것으로 판단될 때 그 이들을 땅바닥에 훌훌 털어 버리고 입기도 했으나 보리쌀 만한 큰 이들은 몽땅 떨쳐 버릴 수 있어도 눈에 띠지 않는 서캐들이 금방 자라나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바람에 당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춘천에 있는 2군단사령부를 방문했을 때는 노재현 군단장이 이 퇴치문제를 거론하면서 2군단에서 시도하고 있는 이 퇴치방법을 나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2군단에서 시도하고 있던 방법은 DDT 가루를 직접 몸에 뿌리는 대신 DDT 냄새를 풍겨 이가 생겨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DDT 가루를 담은 조그마한 주머니를 군번 인식표처럼 끈에 달아 목에 달고 다니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도 효과적인 방법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DDT 주머니를 차고 있는 대원을 직접 만나 살펴 본 결과 내의 안쪽에 들어 있는 주머니에 접촉된 살갗 부위(목과 명치 사이)가 발개져 있어 좋지 못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또 다소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완벽한 효과는 기대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전방부대 장병들의 이를 퇴치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를 없앨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방부대 지휘관들이나 군의관들도 그런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목욕을 자주시키고 그 때마다 세탁한 내의를 갈아 입게 하여 몸에서 이가 생겨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인데, 그러한 방법을 알고 있던 나는 문득 진해 해병교육단에 건립했던 보일러 시설을 갖춘 샤워식 대형 목욕탕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한꺼번에 200~300명씩 이용할 수 있는 그와 같은 대형 목욕탕을 각 사단마다 3~4개소씩 건립하여 200~300명씩 교대로 이용하게 한다면 모든 대원들이 1주일에 한 번씩은 목욕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자신의 판단으로는 샤워식 대형 목욕탕은 대원들의 목욕시간을 최대한 절약하고 목욕물도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시설물을 건립하자면 막대한 예산이 있어야 하는데 예산을 여하히 확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과제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목적을 위해 편성해 놓은 예산을 갖지 못하고 있던 나로서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예산이 없어 장벽에 부딛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산문제를 궁리하고 있던 나는 내가 인천중공업 사장으로 있을 때 미 8군의 고철 불하가격을 절하시켜 그 마진을 가지고 누적된 회사의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이 문제도 장차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사령관에게 요청하여 한국군의 폐 장비를 반납할 때 불하가격을 절하하는 방법으로 해결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결국 박정희 의장과 혁명주체들을 원래 복귀를 선언했던 2.27선서와 2.27선서를 번복한 3.16성명 그리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에 이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통한 제3공화국 정부의 출범과 한·일회담으로 인한 국내의 소요사태와 국군의 월남 파병 등 1963년에서 1965년에 이르는 국내정치의 격동과 해외파병 등으로 인해 그러한 일을 추진해 나갈 경황이 없었다.
그러다가 뜻이 있으면 길이 있기 마련인지 1966년 미국 정부에서 월남에 전투부대의 추가 파병을 요청했을 때 나는 내 자신이 꼭 실현시키려고 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비단 목욕탕 시설 뿐 아녀라 전방부대의 독신장교 숙소와 취사장, 식장, 오락시설 등도 함께 건립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 일을 성취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관한 사항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편에서 언급이 되겠지만 1966년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로부터 받아 낸 14개 선행조건을 외교문서화한 이른바 '브라운각서' 제8항의 내용으로 수록이 되어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기에서 잠깐 언급해 둘 것은 그 8항에 기재되어 있는 '위생시설'이란 것을 곧 이를 퇴치하기 위해 건립하려고 했던 대형 목욕탕이란 사실이며, 내가 이 자리를 빌어 설명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목욕탕인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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