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29) - 전장으로 재출동
새로 탄생한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 지휘관으로서 나는 바짝 긴장했다. 낮에는 훈련하고 밤에는 전투교범을 연구하는 ‘주경야독’ 생활이었다.
1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상전투에 투입될 날을 대비하려면 촌음도 헛되이 쓸 새가 없었다.
경험이 없는 나에게 선임 대대장 중책을 맡긴 김성은 연대장을 실망시키지나 않을까 걱정도 됐다.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몸을 던져 모범을 보이기로 결심했다.
해병대 지휘관으로서 처음 출동 명령을 받은 것은 1951년 1월 하순이었다. 1·4후퇴 직후 공산군의 대공세에 밀려 원주∼오산 선까지 위협당하는 때였다.
경북 영덕·청송 지역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게릴라 활동을 하던 인민군 10사단 잔류 부대를 소탕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3척의 미 해군 LST 편으로 진해를 떠난 것은 한창 춥던 1월 25, 26일이었다.
2월 5일 영덕에 상륙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포항에서 대구·안동을 거쳐 북상해 온 미 해병1사단의 소탕작전에 쫓겨 적이 강원도 내륙 쪽으로 퇴각한 것이었다.
묵호에 상륙해 태백산맥을 넘어 내륙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묵호에 주둔했던 육군수도사단은 미 해군의 강력한 함포 지원을 받아 해안지방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백두대간 서쪽 정선(9사단)·평창(7사단)·영월(7사단) 지역을 맡고 있던 육군3군단이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태백준령의 전장으로 출동
묵호에서 영서 지역 남쪽으로 가려면 울진으로 내려가 불영계곡을 따라 경북 봉화군을 넘어 춘양에서 북상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500리 험준한 산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루트였다. 눈 쌓인 태백준령 좁은 도로를 차량으로 대부대가 이동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다.
트럭이 눈길에 미끄러지면 대원들이 뛰어내려 밀고 끌어야 한다. 추위와도 싸워 이겨야 한다. 그렇게 눈길을 헤쳐가면서 3군단 본부가 있는 영월읍 영월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당도한 것이 2월 19일 오후 1시였다.
“아니 이게 누구요! 하와이서 만난 공소령 아니오. 해군장교가 해병대 지휘관이 됐으니 어찌된 일이요?”
마침 3군단본부에 와 있던 육·해·공군 총사령관 정일권 중장이 반색을 했다. 해군 전투함 인수 출장을 갔다가 돌아올 때 하와이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잘 왔소. 반갑습니다.”
옆에 있던 3군단장 유재흥 소장과 부군단장 임선하 준장도 반색을 했다.
“김성은 대령, 이제 해병대가 왔으니 안심이요. 좀 도와줘야 하겠소.”
수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정일권 총사령관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아침에 빼앗긴 고지요. 이것을 찾아야 해요. 해병대가 해 줘요.”
우리말이 서툴었던 유재흥 군단장은 고지 탈환부터 부탁했다.
“염려 마십시오. 저희들이 해치우겠습니다.”
내가 큰 소리로 결의를 표하자 두 사람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김성은 연대장도 의미 있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우수한 장비와 잘 훈련된 우리 부대를 둘러본 정 사령관은 우리 군에도 이런 부대가 있다니 참 자랑스럽다고 했다.
뒷날 국방장관이 된 유재흥 장군은 해병1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때 해병대가 수천리를 달려와 3군단을 도와준 것을 참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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