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1) - 가리산 야간공격 전투
한국 해병대와 우군의 압박에 밀린 인민군은 1951년 3월 11일 야음을 틈타 지금의 영동고속도로 북쪽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영월지구 작전은 2개월도 못 돼 막을 내렸다.
용평스키장 마을인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까지 진출했던 해병 1연대는 미 해병1사단으로 배속이 변경돼 홍천으로 이동했다.
3월 21일 가리산 탈환작전 서전에 나선 1대대와 2대대는 적의 의표를 찌르는 야간 공격을 감행해 큰 전과를 올렸다. 영월지구 전투 때처럼 나는 선봉에 나섰다. 가리산 능선 975고지 점령은 그렇게 얻은 전과였다.
미8군 견학단이 헬기를 타고 날아와 견학하고 간 뒤 야간 공격의 중요성이 새로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미 해병대 한국전쟁 공식 전사는 「피의 길, 승리의 길, 영광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가리산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미 해병 제1연대와 제7연대는 각각 독립작전을 실시해 계획된 목표를 점령했고, 한국 해병 제1연대는 3월 23일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미 해병사단의 중요 목표인 975고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는 23일과 24일 새벽까지 계속됐는데 총탄과 수류탄이 난무하는 생지옥 같은 백병전이 전개되자, 한국 해병대는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감투정신으로 중공군 아성을 쳐부수고 끝내 고지를 점령하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 해병대란 바로 내가 지휘한 제1대대와 제2대대였다. 나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찬양한 부대의 지휘관이 된 것이다.
가리산 탈취 후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미 해병대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곤혹스러웠던 일도 있었다. 미군 군견 ‘실종사건’이 그것이다. 가리산 전투가 한창이던 어느 날 새벽 우리 대대 고문관 스카티나 미 해병대위가 내 천막 문을 두드렸다.
군견을 잡아먹은 강용 대위
스카티나 대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군견을 찾아 달라고 하소연했다. 본토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그 셰퍼드는 수색정찰이나 탐색작전에 매우 요긴하게 이용하던 군견이었다. 나는 놀라서 즉각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용감하기로 유명한 3중대장 강용 대위가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개털까지 발견됐으니 꼼짝도 못할 ‘범죄’였다.
내가 특별히 신임하던 사람이어서 더욱 화가 났던 모양이다. 나는 강대위를 영창에 보냉 수밖에 없었다. 고문관은 이 ‘야만적’인 사건을 미 해병사단에 보고해 결국 미8군에까지 알려졌다.
스카티나 대위는 때마침 우리 대대를 시찰하러 온 손원일 참모총장에게도 범인을 색출해 처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화가 난 손 제독은 범인을 찾아내 엄벌하도록 지시하고 떠났다. 그때 이미 범인을 밝혀냈던 나는 다음 날 손 제독에게 전화를 걸어 선처를 호소했다.
범인은 일본 관동군 출신의 강용 3중대장이며, 매우 용감한 그를 엄벌하면 중대원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말없이 전화를 받은 손 제독은 내 건의를 받아주었다. 엄중히 처벌하라던 전날의 어조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의 군견은 한국 해병대에서는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1952년 말, 미 해병 상륙전학교에 유학을 가서 스카티나 대위를 만났다. 그는 소령으로 진급해 버지니아에 있는 상륙전학교 교관이 돼 있었다.
“아직도 한국군은 개를 잡아먹나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놀리듯 나에게 묻는 말에, 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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