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2) - 화천지구 전투

머린코341(mc341) 2015. 1. 11. 21:49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2) - 화천지구 전투

 

영월지구 수복 임무를 수행한 해병 1연대는 춘천으로 이동해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큰 전공을 세운 데 대한 ‘보너스’였다.

 

휴식이 끝나고 1951년 4월 8일 휴식이 끝나고 9일부터 '캔사스 라인(Kansas Line)'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라인은 동해안 남애리(양양군)에서 화천을 거쳐 임진강 하구에 이르는 수복 목표 선이었다.

 

춘천 전선에서 우리와 대치한 적은 중공군 39군 예하 115·116·117사단이었다. 화천으로 가려면 북한강 물길을 건너야 한다.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중공군 115사단이 화천댐 수문을 폭파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 부대 좌우에는 미 해병 5연대와 미 육군2사단 22연대가 배치돼 4월 22일 합동 도하작전이 시작됐다.

 

우리 1대대 최초 화천 입성

 

미 해병 항공사단 항공기들의 맹렬한 지원 폭격과 야포 공격이 대안의 적진에 집중되는 사이에 수륙양용 자동차(DUKW, 다쿠)와 고무보트를 이용한 북한강 도하작전은 순조롭게 수행됐다. 제1진으로 강을 건넌 우리 1대대는 제일 먼저 화천읍으로 들어갔다. 나는 대대 고문관을 불러 레이션 상자 뒷면에 ‘Welcome to US 5th Marine’이라고 써서 거리에 내붙이게 했다.

 

각 부대 사이의 화천 입성 경쟁에서 이긴 기쁨에 겨운 나머지 미 해병대를 놀려주고 싶었던 치기의 소행이었다. 한 발 늦게 화천읍에 들어온 미 해병 5연대 장병들이 그것을 뜯어 던지면서 “갓 뎀 KMC!” 하고 소리쳤다는 말을 듣고 웃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화천읍을 점령함으로써 중부전선 38선 돌파기록을 세운 우리는 수색대를 앞세워 조심스럽게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날 아침 전방지역을 수색하던 우리 대대 화기소대 수색대가 움막집으로 피해 달아나는 한 무리의 중공군을 추격, 몇 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보고를 받은 나는 잘 신문해 전투정보를 얻어내라고 지시했다.

 

포로들은 “오늘 밤 대대적인 공격이 있으니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건 사실이다. 그 대신 우리를 대만으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진술했다. 국부군 출신인데 중공군 포로가 됐다가 끌려왔다는 포로들의 말이 신빙성이 있어 즉시 연대장에게 보고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연대장은 그 자리에서 연대 고문관 해리스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공군 포로에게서 오늘 저녁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정보는 틀림없는 것 같으니 현재의 위치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

 

연대장은 정보를 전하면서, 방어전이 시작되면 연대 정면에 화력지원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시간은 오후 2시, 해병 1연대가 북한강을 따라 4킬로미터쯤 북쪽으로 진출한 때였다. 해리스 중령의 보고를 받은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은 “한국 해병 연대가 가운데를 맡고, 미 해병 연대가 좌우에서 확실한 방어태세를 갖추라”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중공군과의 첫 전투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각 부대는 예정된 전선으로 진출해 교통호와 화기진지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사주 방어를 철저히 하라.”

 

김성은 연대장도 휘하 대대에 확실한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나는 또 한번 한국 해병대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포로 정보의 중요성

 

탄약과 수류탄을 충분히 비축하게 하고, 전화선을 더 가설해 어떤 상황에서도 통신이 가능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22일 밤 8시쯤이었다. 1대대 정면 쪽에서 포성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꽹과리·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중공군이 밀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나도 꽹과리와 징을 크게 울리면서 진지를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연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각자 개인호 진지에서 절대 이탈하지 말고 끝까지 지키도록 전 장병에게 알려라. 움직이는 것은 적이다. 무조건 쏘아라. 후퇴하다가는 아군 총에 맞게 된다고 알려라.”

 

그 자리에서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중공군 포로 두 사람의 진술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중공군의 1951년 4월 춘계대공세 계획을 알려준 것이었다.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철저히 대비한 덕에 아군이 중공군의 파상(波狀)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포로 한 사람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포로를 다루는 방법이 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였다.

 

말로만 듣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정말 대단했다. 눈 덮인 봉우리를 넘어 한 무리가 나타난다. 꽹과리·피리 소리에 맞춰 괴성을 지르며 아군 진지를 향해 몰려든다. 야포·기관총·소총 사격이 그쪽으로 집중된다. 돌팔매질에 놀란 물고기 떼처럼, 그들은 일제히 달아난다. 뛰는 사람보다 제자리에 쓰러진 사람이 많다.

 

달아난 사람들이 능선을 넘어가는가 싶으면 또 한 무리가 넘어온다. 피리·꽹과리 소리에 어우러진 괴성이 지축을 흔드는 것 같다. 물리치면 넘어오고, 물리치면 또 넘어온다. 마치 등불에 몰려드는 불나비 같다. 아무리 연대장 명령이 엄해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용감하기로 유명한 강용 대위의 3중대는 한때 2선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나 보내 주십시오"

 

“통신병! 연대본부에 야포지원 강화를 요청하라.”

 

나는 실지회복을 위해 야습을 감행키로 결정했다. 야포 공격이 약속된 시간에 맞춰 빼앗긴 진지 가까이 잠복했던 우리는 포격개시와 동시에 잠든 중공군 진지를 공격했다. 백병전까지 벌인 끝에 가까스로 진지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잘했다. 공정식 대대장을 믿는다. 뭐 필요한 것 없나?”

 

진지를 되찾았다는 내 전화를 받은 김성은 연대장은 만족한 듯 물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날이 밝거든 막걸리나 보내주십시오.”

 

나는 유쾌하게 웃으며 술을 부탁했다. 저쪽에서도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1대대 지역은 한동안 조용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적정이 너무 조용해진 것이 이상해서 전화로 김연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적이 후퇴할 리가 없다. 수색대를 보내 잘 살펴봐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대원들이 얼마 뒤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대대장님, 중공군 병사들이 진지 안에 새카맣게 엎드려 있습니다.”

 

연대장의 예측이 적중했다. 적은 우리가 승리감을 만끽하고 편안히 잠들기를 기다리며 사방에 배치한 척후병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미 포병 연락장교에게 포격지원을 요청했다. 미 해병사단 105mm 포 54문과 155mm 포 18문이 동시에 포문을 열고, 우리 해병 1연대가 배속된 미 육군9군단 소속 200mm 포와 155mm 장거리포들이 한꺼번에 작렬했다. 깊은 산속은 천둥 같은 굉음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닌 밤중에 집중 포격을 받은 중공군 진지는 금세 쑥밭으로 변했다. 중공군 전사자만 2700명으로 기록된 전투였다. 다음 날 아침 미 해병1사단 부사단장 풀러 준장이 헬기를 타고 연대 지휘소에 날아왔다.

 

“한국 해병대가 이렇게 강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한국 해병대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군요.”

눈밭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중공군 시체를 바라보면서, 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김연대장에게 미국 정부 훈장을 상신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갔다.

 

화천댐에 세워진 파로호 전적비

 

훗날 이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해병대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되찾은 화천댐을 파로호(破虜湖)로 부르도록 지시했다.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이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