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4) - 아아! 도솔산, 철(鐵)의 보루(堡壘)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 낸 휴전선은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상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당시의 전선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동쪽은 38도선 훨씬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반면, 서쪽에서는 전쟁 전 우리 땅이던 개성과 옹진반도를 내줘 오늘의 모습이 됐다.
중동부전선이 38선을 넘어 멀찌감치 밀고 올라간 것은 도솔산 지구를 탈환한 해병대를 필두로, 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월등히 우세했기 때문이다. 경기 연천지역과 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라인 미 수복지구를 되찾는 데 큰 몫을 한 도솔산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을 나는 필생의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다.
중동부전선의 요지
도솔산은 중동부전선의 심장이었다. 양양~양구~철원선을 밑변으로 하고 원산을 꼭짓점으로 한 삼각형, 즉 ‘철의 삼각지대’로 일컬어지는 중동부전선 한가운데 위치한 도솔산은 전략적으로 너무 중요한 요지였다.
도솔산 서쪽 자락을 따라 금강산과 원산·고성지구로 가는 도로가 뚫려 있다. 동쪽으로는 인제·속초, 서쪽으로는 양구·화천 지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敢制, 고도가 높아 주위의 고지를 제압하는 위치) 할 수 있는 곳이다.
인민군과 중공군은 도솔산 봉우리와 이어진 앞뒤 좌우 능선의 요소마다 철벽같은 방어선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애당초 도솔산 지구는 1951년 5월 하순경부터 양구를 공격, 점령한 미 해병1사단에 의해 공격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솔산 지역으로 진격하던 미 해병5연대가 24개로 선정된 공격목표 중 8목표 전방의 고지 하나만을 점령하는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부득이 미 해병사단 전체의 부대 조정을 위해 그 공격임무를 한국 해병1연대에게 인계한 것이었다.
즉 미 해병사단의 예비대로 있던 미 해병1연대를 양구 지방에서 큰 타격을 받은 미 해병7연대와 교체시켜 사단의 좌일선이 되게 하는 한편 우리 해병1연대를 미 해병5연대와 교체시켜 사단의 중앙을 맡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미 해병5연대는 그 병력이나 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부대의 전통과 구성원인 미 해병대 각자의 전투 이력면에 이르기까지 우리 해병1연대보다 월들하게 우세한 막강한 부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한 정예 미 해병대로서도 첫날의 공격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우리 해병1연대가 떠맡게 되었으니 대한민국 해병대로서는 그야말로 생사를 건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미 해병1사단의 제7연대와 교체된 제1연대마저도 가파른 산 계곡의 화전(火田)에 매설해 놓은 지뢰 때문에 양구 북동 방향의 도솔산(펀치볼) 너머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임무 변경은 그만큼 시급했다.
미 해병1사단의 전투사(戰鬪史)는 1951년 6월에 있었던 이 10일간의 전투손실이 5월 이전의 1개월 동안 발생한 전투손실보다 많았다고 쓰고 있다. 즉 1951년 6월, 미 해병1연대 사상자는 1,111명이었는데 이 중 67명만 생명을 잃고 나머지 부상자는 군 의료진의 활약으로 회복되었다.
도솔산 산기슭의 빼곡한 지뢰 때문에 발생한 피해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미 해병대는 공격라인 중앙을 한국 해병대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미해병, 한국해병에 임무 넘겨
1951년 6월 3일 작전명령을 받은 한국 해병1연대장 김대식(金大植) 대령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큰일 났다”는 혼잣말 소리도 들렸다. 김성은 대령과 연대장 임무를 교대한 지 10여 일밖에 되지 않아 아직 부대 파악도 안 됐던 때다. 그러나 그는 어렵다고 망설일 사람이 아니었다. 수도탈환 작전 때 용맹을 날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지장이고 덕장이었다.
“미 해병대가 못한 일을 우리가 기필코 해냄으로써 한국 해병의 기개를 보여주자! 끝까지 인내하고 감투하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김대식 연대장은 이런 요지의 훈시로 휘하 장병들의 결의를 강조했다. 나는 선임대대인 제1대대장으로서 연대장을 충실히 보좌할 결심을 굳혔다.
영월지구 전투 이후 용맹성과 협동심으로 똘똘 뭉쳐진 이응덕(李應德)·이서근(李西根)·김환수·임병윤·이재원(李在元) 중위 등이 내 휘하 중대장으로 건재했고, 이근식(李根植) 소위 같은 믿음직한 소대장들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해병1연대에 주어진 임무는 캔자스 라인 너머 해안 분지 우측 봉우리인 도솔산을 포함해 24개의 봉우리를 차례로 공격해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우리 1대대는 공격 목표물이 제일 많은 좌 일선 공격 라인을 담당하게 됐다. 우리 해병1대대가 맡은 공격라인에서 최종 목표인 도솔산 주봉에 이르려면 10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그 가운데 두 봉우리에는 적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고 장담하는 저항선이 구축돼 있었다.
화천 지구 작전을 마치고 장거리 행군을 해 온 대원들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미 해병대가 혈투 끝에 확보한 능선에 도착한 순간부터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인민군 최정예 주력부대와 대치
그곳에서 우리와 대치하게 된 적은 인민군 최정예 부대로 소문난 12사단과 32사단 주력 부대였다. 건빵으로 허기를 달랜 대원들을 즉시 사주경계에 배치하면서 나는 화랑오계 가운데 내가 좌우명으로 삼고 있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강조했다. 해병대에 온 뒤로 적과 정면에서 대치하는 상황은 이때가 두 번째였다.
화천전투 때는 중공군과 맞싸웠지만 이번에는 인민군 최정예 부대라는 사실이 내 신경을 끝없이 자극했다. 수통을 열어 물을 마셔가면서 평상심을 가지려고 애쓰면서 각 중대에 작전임무를 부여했다. 고지 8부 능선까지 접근시킨 뒤에 육박전으로 정상의 진지를 점령하라는 지시였다.
제1중대를 공격 일선에 배치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대원들은 더듬더듬 길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갔다. 날이 새기 시작했지만 고지 주위에 안개가 깔려 시야가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위에서 적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암석으로 된 유리한 지형에 기댄 적은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왔다. 도리 없이 1중대를 철수시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다음 날에는 3중대를 투입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 적을 제압하는 것뿐이다. 죽는 길은 무수히 많다. 부디 촌토(寸土)를 다투어 휘하 해병들과 함께 목표를 점령하라.”
3중대장 임병윤 중위는 소대장들에게 이렇게 지시하고 나서 1소대에게 목표 우측, 2소대에게 좌측을 맡겼다.
대원들이 포복자세로 기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적은 수류탄을 던져 접근을 경계했다.
노출되는 대원이 목격되면 맹렬한 조준사격을 퍼부었다. 중대장 옆에 있던 BAR 사수도 응사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쏘아붙이고 탄창을 갈아 끼우던 그가 “윽, 소대장님” 하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난공불락의 철옹성' 도솔산 점령
중대장 전령이 부축해 상반신을 일으키자 오른쪽 팔목에 관통상을 입어 팔목이 덜렁덜렁했다. 부상자를 후방의 구급차로 옮겨 가려고 접근하던 위생하사관도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래도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벌써 한 분대는 정상의 적진에 도달해 육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돌격준비!”
중대장의 호령을 신호로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오르며 육박전이 벌어졌다. 대검과 대검이 부딪치는 소리,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치는 소리, 총대가 맞부딪치는 소리, 여기 저기서 ‘억’ ‘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뒤범벅이 됐다. 피가 튀고, 흘러내린 피가 흙을 적셨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더욱 모를 일이었다. 고지 좌측을 맡았던 2소대가 가세하면서부터 적은 진지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틀에 걸친 공격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6월 3일 낮 12시, 제1목표가 점령된 것이다. 좌우측 골짜기를 살피고 작전지도상에 표시된 제2목표 중간지점까지 장악한 것을 확인한 뒤에 고지 정상에 호를 만들게 했다. 석양이 지고 나자 구름 사이로 달이 떠올랐다. 한산섬 수루에 앉아 일성호가에 상심했던 이충무공의 시조가 떠올랐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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