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5) - 벌거벗은 돌격대
악전고투 끝에 제1목표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겹겹이 둘러쳐진 적의 방어망을 뚫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투란 언제나 더 높은 곳을 차지한 쪽이 유리한 법이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실수로 곤경에 처하는 ‘사고’도 있었다.
미군 헬기가 적지에 보급품을 떨어트려 전 대원이 벌거벗고 육박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1951년 6월 초, 제1대대 1중대원들이 헬기 착륙장이 없는 고지에 머물 때였다. 그런 지형에서는 접근이 용이한 곳에 보급품을 투하할 수밖에 없지만, 그때 헬기는 투하 장소를 잘못 선정해 적진에 떨어트리고 날아가 버렸다.
식량과 식수는 물론, 탄약마저 바닥이 났는데 헬기가 다시 와 줄 기약도 없었다. 참을 수 없는 허기와 갈증에 방어 수단도 없다는 것보다 더한 위기상황은 없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골짜기를 헤맨 끝에 약간의 식수는 구했지만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통신병이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한 끝에 며칠 만에 노무자 10여 명이 등짐으로 건빵을 지고 올라왔다.
건빵을 물에 풀어 죽을 쑤어 허기는 달랬지만 불안감은 극복하기 어려웠다. 방어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적의 포격은 시시각각 거칠어졌다.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먼저 적을 공격해 한 놈이라도 죽이고 싸우다 죽는 게 낫겠어.”
진중에서 이런 말들이 오갈 때 작전장교 이서근 대위가 중대 일선을 방문했다. 싸우다 죽자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공포심이 적개심으로 변한 것이다. 1소대원들은 말없는 작전장교의 태도를 건의 수용으로 해석하고,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로서로 눈빛을 반짝이며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육박전을 하려면 적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불리한 법이다.
전투복 속에 입은 내의까지 모두 벗어버린 그들은 각자 수류탄 두 발과 대검 한 자루씩을 휴대하고 어둠 속을 나섰다.
수류탄 2발과 대검 한 자루
한 가지 수칙이 하달됐다. 총이 없으니 절대로 일어서지 말고, 끝까지 자세를 낮춰 적진에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적을 공격할 때도 엎드린 자세로 대검으로 찌르고, 수류탄도 엎드려서 던지기로 했다.
벌거벗은 돌격대가 대검으로 철조망을 끊고 포복으로 적진에 접근했을 때 날이 새기 시작했다. 먼 하늘이 뿌연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소대원들은 일제히 진지 안에 수류탄을 던졌다. 호가 무너지고, 안에서 비명 소리, 총 소리, 무슨 일이냐고 외쳐 묻는 소리가 범벅이 됐다.
아비규환이란 바로 그런 상황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안에서 튀어 나오는 적들은 독이 오른 소대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벌거벗은 무리들에게 찔리고 수류탄 파편에 맞아 겹겹이 쓰러졌다. 1개 소대 규모로 보이는 적을 제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돌격을 진두지휘하던 소대장 최경림 소위가 부상으로 후송된 사실이 알려지자, 소대원들은 한동안 의기소침했다.
다음 순간 큰 피해 없이 고지를 점령한 엄청난 전과에 놀라기 시작했다. 그 기쁨을 실감하려는 듯 “해병대 만세”를 외치던 소대원 한 사람이 도망치던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뒤로는 입을 다물었다. 재빨리 사주경계 위치를 찾아갔다.
벌거벗은 돌격은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작전명령을 어기고 상급부대 승인 없이 결행한 전투였다. 마땅히 조사와 문책이 따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극한 상황에서 택할 방도가 그것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목표물 하나를 빼앗은 공로가 너무 크지 않은가. 백병전에 유리하게 대응하려고 벌거벗고 달려든 해병대의 기백이 너무 장하지 않은가.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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