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3) - 고난의 야간 포위 돌파 장정

머린코341(mc341) 2015. 1. 11. 21:55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3) - 고난의 야간 포위 돌파 장정

 

그런 기념비적인 승리에 악운이 따랐다. 우리 해병대의 좌측방인 화천군 사창리 일대를 담당하던 국군 6사단 전선이 중공군에 돌파 당해 우리는 하루아침에 중공군에 포위당하게 됐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미 해병 1사단의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한국 해병대 1연대와 미 해병 5연대에 화천 점령 경쟁을 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좌우 측방부대와 보조를 맞춰 진격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을, 우리만 너무 깊숙이 들어가 버린 것이다.

 

중공군 포위뚫고 야간만 이동

 

승리의 기분에 들떠 기분 좋게 잠이 깬 1951년 4월 22일 아침이었다.

 

“대대장님 큰일났습니다. 사방을 중공군이 뺑 둘러쌌습니다.”

 

작전참모 서정남 대위의 보고를 받고 나가 보았다. 사실이었다. 급히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모두들 나만 쳐다보면서 풀 죽은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우리 1200명이 똘똘 뭉쳐 돌파해 나가면 되는 거야. 해병대가 못 할 일이 어디 있나? 미 해병대는 영하 40도의 장진호 고원에서도 돌파해 나왔다. 연대장님 전화 연결해 !”

 

나는 큰소리쳤다. 대대에 배속된 미 해병 연락장교 가운데는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들에게서 늘 장진호 얘기를 들은 터라 돌파해 나갈 자신이 있었다.

 

“공소령. 지금 이게 무슨 소리요? 중공군 피리 소리, 꽹과리 소리 같은 게 들리는데!”

 

“네, 맞습니다. 중공군이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돌파할 자신이 있습니다. 연대에 도착하거든 막걸리나 준비해 주세요.”

 

나는 김성은 연대장에게 보고하면서도 큰소리를 쳤다. 연대장은 “최선을 다해 돌파를 지원하겠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무려 8박9일간 계속된 포위망 돌파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줄 몰랐다. 결과부터 말하면 야간에만 이동한 올빼미 작전의 성공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3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연대본부까지 부대원 전원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해 철저한 야간행군 준비를 시켰다. 산중에 고립돼 여러 날 야영할 상황에 대비해 각자 네 끼의 비상식량과 침낭을 휴대시켰다.

 

야간이동의 표지와 유도 엄호를 위한 황색연막탄도 충분히 휴대토록 지시했다. 제일 신경을 쓴 것은 연대본부와의 통신두절 상황을 피하기 위한 준비였다. 유선전화와 무선통신 수단을 철저히 정비해 유사시 미 해병의 근접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강한 정신력으로 극복

 

연대장의 배려로 바퀴가 여섯 개 달린 수륙양용 차량 다쿠(DUKW)가 대대본부에 도착하자마자 돌파작전을 개시했다.

 

북한강을 도하해준 미 해병대 다쿠(DUKW-353). 이 차량을 '집오리(duck)'라고 불렀다.

 

북한강 도하작전은 모험이었다. 수륙양용 차량에 병력을 태워 강을 건너는 동안 중공군은 개미 떼처럼 달려들었다. 미 해병의 항공지원과 포병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파상공세를 방어하면서 한 중대씩 강을 건너는 작전이 성공한 것은 전 대원이 침착히 내 지시에 따라준 덕분이었다.

 

강을 건넌 뒤에는 올빼미 두더지 작전의 연속이었다. 낮에 이동하다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당할 재간이 없다. 밤에만 움직이려니 속도가 여간 더디지 않았다. 그것도 도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적의 관측망을 피하려면 험준한 7~8부 능선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이동할 수 없으니 영락없는 두더지 신세였다. 호를 파고 들어앉아 사주경계에 목숨을 걸었다. 주위에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무수히 매설하고 돌파용 통로를 구축하게 했다. 밤이면 그 통로를 이용해 남쪽으로 축차(逐次)진지를 마련해 나가게 했다. 그 진지를 이용해 중대별로 차례차례 남으로 접근해 가는 전법이었다.


극도로 피로하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잠을 자게 된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아도 수마(睡魔)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8박 9일간의 야간 돌파작전 중 많은 해병이 졸면서 걸었다. 반 눈을 떴다가도 이내 눈꺼풀이 덮이면서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그러면 동료나 분대장들이 일으켜 세워 부축하고 걸었다. 그래도 주저앉으면 군홧발로 걷어차고 따귀를 때려서 데리고 갔다. 잠은 곧 낙오였고, 낙오는 곧 죽음이었던 것이다.


졸음보다 무서운 적은 허기와 추위

 

낙오를 방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앞 대원의 허리띠를 붙잡고 걷게 했다. 그러나 험준한 산길 야간행군에서 그것은 무리한 주문이었다. 노끈으로 연결해 이탈을 방지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줄줄이 쓰러졌다.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자기 의지와 반하는 일이 생기면 더욱 탈진이 됐다.

 

졸음보다 무서운 적은 배고픔과 추위였다. 네 끼의 비상식량을 아끼고 아껴 다 먹은 뒤로는 굶을 수밖에 없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보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신이 온통 먹을 것에 쏠려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졌다. 4월이라고는 하지만 강원도 산골짜기 능선의 밤은 한겨울처럼 추웠다.

 

나도 너무 배가 고팠다. 정신이 몽롱하고 사지에 힘이 다 빠졌다. 제일 큰 문제는 길을 제대로 잡아 나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참모와 중대장들도 자신(自信)과 판단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403번 국도인 양구~춘천 간 신작로로 나가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방향을 남쪽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나침반과 별의 위치와 산봉우리의 모양뿐이었다. 그러나 캄캄한 밤중에 나침반은 무용지물이다. 날이 흐리면 별이 안 보이고, 산봉우리 모습은 골짜기에서 식별 되지 않았다. 영 자신이 없으면 판초를 뒤집어쓰고 손전등을 비춰 지도와 나침반을 보았다.

 

한 번은 3중대장 강용 대위가 돌파해 나가는 방향이 틀린 것을 알고 소리 질렀다. 방한 귀마개를 한 그에게 내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무전병과 전령을 데리고 달려가려고 했지만 통신병이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도리 없이 죽을 힘을 다해 혼자 달려가 불러 세웠다. 때마침 급경사를 오르는 순간이어서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용화산(878고지) 기슭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게 됐다. 지척에 중공군이 우글거리는 ‘독안’을 벗어난 것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부대를 재정비했다. 행군을 멈추자마자 대원들은 바람 부는 언덕에 풀잎처럼 누웠다. 허기와 추위에 지쳐도 잠의 유혹은 달콤한 모양이었다. 중대별로 소대장과 분대장들이 돌아다니며 잠자는 대원들을 때려 깨우기에 분주했다.

 

그로부터 또 4박 5일을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우리가 비교적 적의 공격을 적게 받은 것은 연대장이 예비대인 3대대를 내보내 적을 맞아 싸워주었기 때문이다.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3대대가 싸움을 걸어준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매봉산(615m)에서 목격한 3대대 11중대의 지연작전은 영화 속의 인해전술 장면 그대로였다.

중대장 박근섭 대위는 깃발을 흔들며 개미 떼처럼 기어올라오는 적을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항공지원과 포격지원을 요청했다. 바로 머리 위 상공과 등 뒤 멀리서 날아드는 불 폭탄에 일제사격을 가세해 ‘개미 떼’를 박멸했다.

 

8박 9일의 철수작전을 20여 명의 전력 손상으로 완수한 것은 기적이라 했다. 그러나 의지의 승리이기도 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