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 1진의 기억 -(6) - 신병 생활과 월남 파병 소식.
훈련중에 이따금 특수병과 지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의장대 차출이라든지, 수송 병과가 그랬고 특히 여러 친구들이 보급 병과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병과에도 차출되거나 지원하지 않았다. 언뜻 들은 것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결국 나의 병과는 03 보병.
이 병과는 어디든지 보직이 있기 때문에
사령부에서 말단 소대까지 필요한 경우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총 소대로 간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학벌이 있는데 특별한 자리로 배치해 주겠지하는 알량하기 짝이없는 속셈으로.
1964년 12월31일 저녁, 드디어 팔려나가기 위해 열차에 실렸는데 도착하고 보니 포항 수용대.
연말 연시라 다 휴가가고 실무병 몇이 나와 퀀셑 속에 밀어넣고 사나흘을 그냥 기다렸다.
하나 둘씩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하더니 결국 4-50명 남았는데,
어느 날 오후, 전부 곤뽕 메고 퀀셑 밖으로 나와 두 줄로 서라더니,
한 줄은 2연대, 한 줄은 3연대로 가란다.
한참을 따라 갔더니, 2연대 본부라면서 3열로 세워 “1대대, 2대대, 3대대,
그러고는 다시 따라 갔더니 2대대 본부.
또 각중대 서무병들이 데리고 가니 ~ 드디어 나의 소속이
-- 해병 제1사단, 제2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3소대, 제2분대, 제2조, 소총수 -- 로 정해졌다.
1965년 1월 초 어느날, 두어 시간만에
해병대의 막장이라고 할 수 있는 소총 소대로 수직낙하한 것이었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했던가.
소총소대! 드디어 해병대 소총소대 소총수로 곤두박질을 쳤다.
기기 막히는 상황이었지만 현실로 나타났다.
(현재는 서문이 포항 사단의 정문이 되었다 한다)
1월의 포항 소총소대 생활. 1개 중대가 들어 있는 병사.
으쓰쓰한 추위 속에 캄캄한 새벽 5시 50분.
희끄므레한 병사안, 깔끔하게 차려입은 당직 하사관이
복도의 중간 중대 본부 앞에 서서 또렷하고 짤막하게 웨친다.
“총기상 5분전!”
각 소대 내무반이 조용히 움직이며 옷을 챙겨 입고 구두를 신고 마루에 걸터 앉는다.
드디어 “총기상” 구령과 함께 전 대대가 일제히 뛰어나가 연병장에 집합,
당직 장교에게 인원 보고를 한뒤 연병장을 구보.
날이 밝아지면서 병사 내외 청소, 식기들고 식당으로 가 줄을 서고
밥 타고 국 타, 먹고 들어와 식기함 정돈, 그리고 그 날의 과업 출장.
매일 매일이 훈련소와 꼭 같은 생활이 반복된다.
그렇게 소총소대로 팔린지 두 주일만에,
이 번에는 3연대 상륙훈련의 가적부대로 차출이 되어
1주일간을 주문진 해변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강능 뒷산까지 타고 내려오는
혹한기 훈련에 차출되어 그야말로 소총소대의 혹독한 경험을 하게된다.
해병대는 상륙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육전대라고도 한다지요.
나는 해병대 복무 기간중 상륙전에 세 번 참가했습니다.
두 번은 훈련으로, 한 번은 실전으로 - 실전이라고 하니 어마머마 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6.25 때 인천 상륙전이나 2차 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 같은 것은 아니었고,
1965년 10월9일, 역사상 국군 최초의 전투 부대 해외 파병 이었던
청룡부대 제 1진이 월남 중부 캄란 만에 상륙한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내가 실무에 배치된지 보름만에 상륙군 가적부대로 상륙전 훈련에 참가하였읍니다
1965년 1월 중순, 훈련소에서 나온지 보름만인 생초보 신병이 혹한기 상륙전 훈련의
가적부대에 차출되어 평생에 가장 혹독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월남전은 위험하기는했지만 고생스럽지는않았습니다.)
훈련소에서의 - 팔각모 멋진 해병대 - 영롱했던 꿈이 - 하루 아침에 깨지고,
급전직하 해병대 소총소대에 배치된지 보름 만인 생 초보에게는
사실은 좀 가혹한 경우였지만
해병대는 - "까라면 까야되는 곳" 이니까.
(막상 훈련 당시는 힘들어도 고된 훈련이 강한 정신력을 키워 숨막히는 신병생활을 견디게했다)
우선 완전 군장을 꾸려메고 도구에서 50리 길을 행군하여
구룡포 항에 도착, 엘 에스 티에 승선했습니다.
승선 뒤, 새까맣게 기름 때에 절어 반질반질해진 소위 방한복과 방한모가
(요즘 같으면 아마 쓰레기로도 안받을) 지급 되었습니다.
그 날 밤 배 안에서, 해군 유디티와 해병 수색대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우리 소대 선임하사가 수색대 출신이라, 우리가 있는 곳까지 몰려 와,
내 눈 앞에서 엠원을 거꾸로 들고 내려치는데(그 걸 맞았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개머리판이 낮은 천정에 걸려 깨지는 바람에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생초보 해병에게는,
가히 까무러칠 뻔한 광경이었습니다.
어찌 어찌 훈련이 끝나고 다시 구룡포 항에 하선하고,
50리길을 다시 걸어 돌아 오니, 부대 떠난지 일 주일에 꼬박 2-3백리를 걸은 셈.
신병 훈련 3개월의 여독이 풀리기더 전에 겹친 강훈으로 급기야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오른 발 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곪아버린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부대의 고문관이 되어, 일주일에 두세 번 ,
아직도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신병이 포항 사단 의무대대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는데,
약이라고 있는 것이 ‘아까징끼'가 전부입니다.
실무 배치 받자마자 그렇게 고생하며 어쩔수없는 인고의 생활을 하던 1965년 4월(혹은3월?),
전투 부대가 아닌 비둘기 부대가 월남에 파병되는데
해병 공병 1개 소대도 포함되어 출정을 한다고 하였읍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모두 나와 사단 본부 쪽으로 모이라기에 갔더니
두 줄로 길게 도열하여 박수로, 비둘기 부대 출정을 환송하는 행사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전투 부대의 월남 파병은 생각하지 못한 때였지요.
그저 공병대가 가나보다 했습니다.
그 후 6월 쯤엔가 드디어 전투 부대의 월남 파병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출처 : 파월 제1진 청룡부대 2대대 해병158기 이장원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아! 청룡이여 제1권 캄란에서 호이안까지' 중에서
'★월남전 참전수기 > 해병158기 이장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룡 1진의 기억 -(8) - 파월 휴가. (0) | 2015.01.07 |
---|---|
청룡 1진의 기억 -(7) - 월남 특수전 교육대 (0) | 2015.01.07 |
청룡 1진의 기억 -(5) 해병이 되다 - (빨간 명찰을 달다) (0) | 2015.01.07 |
청룡 1진의 기억 -(4) 해병이 되다 - (상남 보병 훈련대) (0) | 2015.01.07 |
청룡 1진의 기억 -(3) 해병이 되다 - ( 천자봉 구보와 찐빵) (0) | 2015.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