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생활중 에피소드(7)
고문단실 연락 장교
당시 한국군 부대는 미국의 군사원조로 여러 가지 물품을 지원 받고 있었으며 이의 효율적인 사용을 감독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큰 단위 부대마다 미군 고문관들이 파견되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김포 해병 여단에도 미 해병대 중령이 단장으로있고 그밑에 중,상사등 약 7명이 파견되어 별도 울타리내에서 식당과 크럽도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작은 단위 부대 였읍니다.
연락 장교는 해병 대원 약 20명 정도를 데리고 이곳 부대의 외각 경비를 해주고, 여단내 각 부대와 고문단실간의 업무를 협조도 해주고, 일종의 통역관 노릇도 해주는 그런 직책이였습니다.
한번은 여단장께서 저를 포함해서 미 고문단실 요원 8명 전원을 후암동 사택에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녁을 잘먹고 귀대하는 차안에서 미 해병 중령, 수석 고문이란 자가 한다는 소리가,여단장이 봉급이 얼만데 저렇게 좋은 집에서 잘해놓고 살수가 있냐고 하면서 마치 도둑질이나 해서 호화 생활을 하는 듯이 비꼬는 투로 얘기를 하더군요.
사실인즉 제가 알기로는 그 집도 전세 집이였고 살림도 별로 신통치 않던데, 그저 트로피 여러개, 각종 군대 장식물 몇개정도에 불과한 그저 평범한 살림이 였는데 이 친구의 어투는 혈기 왕성한 초급 장교가 듣기에는 참으로 모욕적이였습니다.
몇일을 고민하다가 여단장께 사실 직고를 드리고,저는 도저히 그런 사고를 하고있는 그 친구 하고는 같이 근무를 못하겠고 여단에 돌아 와서 타 부대에 근무를 하겠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여단장께서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귀대를 인가해 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후 미 해병 고문단실 요원이 전원 있는 앞에서, 간밤에 고민하며 쓴 발표문을 읽고, 그래서 당신들하고는 같이 근무를 못하겠으므로 여단으로 돌아 가노라 하고 짐을 싸서 여단 본부로 돌아 왔습니다.
그후 수석 고문관은 여단장을 찾아와 백배 사죄하고 새로운 후임을 절대 사양 하면서 꼭 저하고 같이 자기가 떠날때까지 착실히 근무를 하겠노라고 하면서 신신 부탁을 한 모양 입니다.
저는 다시 여단장 명에의해 그 위치로 복귀하고 그 수석 고문 귀국할때까지 몇 개월을 사이 좋게 근무 하였습니다.
그리고 4년후인 1969년말 제가 월남에서 근무중, 그 수석 고문이 대령으로 진급하여 월남의 다낭 근처 어느 미해병 부대 연대장을 하고 있다기에 수소문 끝에 찾아가 만나서 그간의 회포를 풀었읍니다.
이사람은 착실한 카도릭 신자로서 당시에 자식이 12 명이나 있었는데 시집,장가들은 다 잘들 보냈는지,손자들은 몇이나 되는지, 아마도 지금쯤 살아계시다면 80세 중반가까이 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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