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4. 해병제1전투단
(1)5대대장
1952년 1월 19일, 약 7개월간에 걸친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 근무를 마치게 되었던 나는 해병대사령부의 요청과 나 자신의 희망에 따라 해병대로 전입할 결심을 굳혔다.
내가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은, 첫째는 해군 육전대장 시절의 경험과 동키부대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그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 시절의 경험을 지상작전을 통해 더욱 발전시키고 싶었고, 둘째는 나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맞는 해병대의 생활공간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전입과 동시에 육군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던 나는 그 해 6월 25일 그 과정을 수료함과 동시에 장단(長湍)지구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해병 제1전투단의 작전참모로 임명되었다(그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해병 제1연대로 돼 있었지만 그 해 10월 1일을 기해 전투단으로 승격하게 돼 있었으므로 그 해 3월 21일 김석범(金錫範) 준장이 대령의 계급으로 제1연대장의 연대장으로 취임할 그 시기부터 해병대에서는 해병 제1연대를 제1전투단으로 호칭을 해왔었기 때문에 전투단으로 표기해 둔다).
해병 제1연대가 미 해병1사단괴 함께 펀치볼 북방의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던 것은 그 해 3월 중순경이었다.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른 미 8군의 전투부대 재배치 계획, 즉 수도 서울 방위에 역점을 둔 군사적 보완책의 일환인 이른바 믹스마스터(Mixmaster) 플랜에 의거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을 했던 한·미 해병부대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인 판문점(板門店)의 서측방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사천강(四川江) 이동(以東)의 들판에 배치되었는데, 미 해병사단이 배치된 곳은 판문점 서북방의 고랑포(장단군) 지구였고, 해병 제1연대가 배치된 곳은 임진강을 배후와 좌측방에 둔 사천강 전초지대였다.
그리고 그 당시 김포지구에는 수륙양용차 대대(水陸兩用車 大隊)를 주축으로 하는 미 해병 임시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임시연대에는 1951년 2월 중순경 안동(安東) 지구로부터 인천(仁川)으로 이동한 후 그 해 4월 초 양곡(김포군)으로 진출했던 아 해병대의 독립5대대가 배속되어 강화도와 교동도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김포반도 대안(對岸) 개풍군(開豊郡) 일대에 대한 정찰전을 수행하다가 명령에 따라 장단지구에 있는 1연대의 일부(대대) 병력과 부대교대를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10월 1일을 기해 해병 제1연대가 전투단으로 승격할 때 정식으로 전투단에 통합되었는데, 그 직전까지 독립5대대는 한국군 1사단과 미 1군단의 작전지휘를 받고 있었다.
한편 한국군 1사단 15연대로 부터 인수받은 해병 제1연대의 작전지역은 임진강 서측방 백연리(白蓮里) 서북방의 155고지를 정점으로 하여 사천강을 따라 △58, △45, △28, △86 등의 소능선과 개활지로 형성되어 있었고, 중공군 제65군 제195사단이 사천강 이서(以西)에서 덕물산(△288), 천덕산(△203), 군장산(△213) 등 전술상의 좋은 고지군(高地群)을 점령하여 사천강 이동(以東)에 연해 있는 아군의 전초진지 및 주저항선을 감제(瞰制)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부임을 한 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장단지구 전선에는 판문점의 안전을 고려해서 취해진 역사상 유례 없는 까다로운 작전상의 제한조처가 있었다.
그 제한조처란 휴전회담장인 판문점을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이내와 양측 휴전회담 대표단의 연락사무소와 숙영기지가 있는 문산(汶山),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각(各) 반경 3마일 이내, 그리고 개성~문산 간 도로(평화도로) 양쪽 20미터 이내 지역에 있어서는 어떠한 적대행위(適對行爲)나 사격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탄착(彈着)까지 금하도록 한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제한조처는 물론 양측에 다 적용되는 것이었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했던 중공군 쪽이 훨씬 득을 본 셈이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야간을 이용해서 운반해 온 수많은 야포를 평화도로 근처에 배치해 둠으로써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 병력과 탄약을 비롯한 장비 등도 역시 그러한 지대를 이용하여 안전하게 확보해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 해병 제1전투단은 1대대를 우일선, 5대대를 좌일선에 배치해 두고 2대대를 예비대로 확보한 가운데 사천강 전초지대에 대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3대대는 5대대와 교체되어 김포지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임과 동시 좌·우일선 대대의 주저항선과 전초진지를 살펴보게 되엇던 나는 우일선 대대의 주저항선 전방에는 36, 67, 33, 31, 39 고지 등의 전초진지가 구축되어 있었지만. 좌일선 대대 지역에는 주저항선 전방에 있는 50고지에만 전초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50고지 전방 약 1킬로 지점에 있는 86고지에는 전초진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86고지를 좌일선 대대의 전초진지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물론 위험 부담이 수반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초진지가 있음으로 해서 주저항선 전방의 50고지와 주저항선에 가해질 충격을 완화시킬 수가 있고, 또 주저항선에 대한 방어종심을 그만큼 깊게 함으로써 주저항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전투단장에게 건의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깊이 검토해 보라고 했고, 또 수석고문관 섹스튼 중령은 매우 좋은데 착안을 했다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찬의를 표명했으나 유독 그 좌일선에 배치되어 있던 5대대장 백남표(白南豹) 소령만은 적진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근접해 있고, 강변으로 면해 있는 쪽이 절벽으로 돼 있어 적의 접근이 용이할 뿐더러 적의 탄막사격(彈幕射擊)이 가해질 경우 희생자를 많이 낼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래서 그 문제는 한동안 검토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그로부터 약 2주일 후 내가 5대대장으로 임명된 후에 실현시키게 되었는데, 그 때 그 일에 적극적인 찬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전투단 수석고문관은 그러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가 고문단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한국을 떠난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가까운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1967년(해병대사령관 재임기간 중) 내가미국을 방문했을 때 우정 그를 만나 회포를 풀었던 얘기는 뒤에 가서 따로 언급이 된다.
내가 대대장으로 부임을 할 때 장단지구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5대대가 다시금 김포지구로 이동했던 것은 그 해 9월 중순경이었다. 그동안 김포지구에 주둔하고 있던3대대는 5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장단지구로 복귀했다.
그런데 김포지구로 이동하여 김포·강화 지구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5대대는 사천강 전초지대에서 일어난 돌변한 상황으로 인해 김포지구로 이동한 지 불과 1개월도 채 못 되어 다시금 장단지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돌변한 상황이란 10월 2일 밤 8시 30분을 기해 해병 제1전투단(10월 1일부로 해병 제1연대가 제1전투단으로 정식 승격됨) 전초진지에 가해진 중공군의 제1차 추가공세로 인해 특히 그 우일선 부대인 1대대의 피해가 막심하여 부대교대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부대이동 하루 전날 나는 5대대의 예비중대인 51대대(중대장 김학술 대위)를 당일 정오까지 전투단 본부로 급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각 미 고문단에서 지원해 준 헬기 편으로 공수했으나, 처음에는 1대대의 병력 증강을 위해 1대대에 배속이 되었던 그 51중대는 다시 3대대로 배속이 변경되어 주저항선의 방어임무에 투입이 되었다.
10월 6일 15시를 기해 단행된 1대대와 5대대의 병력이동은 미 해병사단의 수송대대와 161헬기부대의 지원하에 이루어졌는데, 헬기부대에 의한 기동성 있는 병력 수송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부대이동을 마친 뒤에는 전투단의 예비대로 확보되었다.
장단지구로 이동한 직후 나는 명령에 따라 소총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임진강 교량(자유문교)에 대한 경비임무를 전투단 수색대로부터 인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2중대(중대장 임상룡 중위)를 기간으로 증강된 1개 중대를 편성하여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67고지를 공격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 날 밤 적이 좌일선부대(2대대)의 전초진지인 86고지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그 명령은 취소되고, 그 대신 그 날 밤 86고지가 적에게 점령당하자 2대대에 배속되어 있던 53중대가 2대대장(박성철 소령)의 지휘하에 86고지의 역습 주공부대로 투입이 되었다.
역습조공부대로는 6중대가 차출이 되었는데, 이들 역습부대는 전투단 포병대대와 전차중대(제2소대)의 지원하에 역습을 감행했다. 53중대장 박병호 중위가 지휘하는 역습 주공부대가 LD를 통과한 시각은 7일 오전 4시 25분경이었고,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86고지의 남쪽 능선으로 접근하여 적진으로 돌입한 시각이 4시 55분경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시각에 역습 조공부대는 86고지 동북쪽 능선으로 접근하여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진내에서는 처절한 백병전이벙어졌다.
그러나 6시 15분경, 적의 탄막사격이 느닷없이 고지 위에 집중되는 가운데 사천강을 도하한 약 1개 대대 규모의 적의 증원병력이 반격을 개시해 옴으로써 아군 역습대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그러한 와중에 아군측에서는 53중대 선임장교 김대열 중위가 적의 직격탄에 맞아 형체가 없이 산화하고 53중대 지원소대장 조순환 소위와 6중대장 김경산 중위, 그리고 53중대장 박병호 중위와 공격 소대장 김정용 소위가 중상을 당하는 등 사상자가 속출함으로써, 아군 역습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6시 55분경 긴급 출격한 우군 항공대와 105밀리포 및 전차대의 엄호하에 50고지에서 철수를 하고 말았다.
한편 53중대의 86고지에 대한 역습전이 실패하고, 10월 2일 밤부터 계속 되풀이 된 67고지와 36고지 등 우일선 부대(1대대)의 최전방 전초진지에 대한 6차에 걸친 역습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투단에서는 결국 적진에 근접해 있던 그 세 개의 최전방 전초진지로 연결돼 있던 전투단의 외곽 전초선을 39-31-50고지로 연결되는 선으로 후퇴시켜 주저항선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그 세 개의 전초진지를 확보하게 된 중공군은 그로부터 1개월 후 그 전초진지들을 발판으로 삼아 아 전투단의 후퇴된 외곽전초선을 공취(功取)하기 위한 제2차 추가공세를 감행하게 됨으로써 피아간에는 다시 한 번 피비린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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