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14)추억의 여화(餘話)
당시 백령도에는 백령 면장을 비롯해서 경찰 지서장, 어업 조합장, 국민학교 교장 등, 몇 안 되는 기관장과 유지들이 있었는데 비록 전시하에서나마 나와 미군 사령관(레오파드기지 사령관)은 이들 기관장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일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개월에 한 번 정도 기지사령부의 영빈용 숙소나 여러 기관장들의 자택에서 번갈아 가며 개최했던 그 친목회는 반주를 곁들인 불고기 파티와 가벼운 여흥으로 시종되었다.
여흥시간에 인기를 끌었던 사람은 미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즐겨부른 아리랑 민요가락에 영어로 된 즉흥적인 노래를 붙여 가며 한 줄씩 또는 반 절씩 부르는 등 시종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적인 멋과 흥을 돋우었다.
그리고 회식 때마다 불고기 파티가 벌어졌던 것은 소가 그만큼 흔했기 때문이었다. 소가 흔했던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육지로 작전을 나간 유격대원들은 돌아올 때 으레 몇 마리의 소를 배의 뒷전에 이까리를 매달고서 끌고 오기 마련이었는데, 그 소들은 강제로 약탈을 해 온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자진해서 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소가 농부들 개인 소유의 것이 아니라 국가자산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에 동원령이 내리기만 하면 지체없이 소를 몰고 군수물자 수송에 동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유엔군 공군기의 폭격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던 북한의 농민들로서는 당국에서 소의 행방을 추궁받을 경우 유격대의 소행으로 떠넘길 수도 있는 일이어서 우정 유격대원들에게 자기네 집 소를 건네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부임했던 바로 그 달(1951.7)에는 한여름철이었는지라 어느 유지의 집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그런 모임을 가졌는데, 그 때 그 마당 한 구석에 모닥거리고 있던 그 모깃불의 정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영상으로 간직되고 있다.
백령도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의 뇌리에는 그 섬에서 중국 음식점을 영업하고 있던 70대의 한 중국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내가 그 노인을 기억하고 있는 연유는 처음에는 동키4연대의 전방기지인 육도(陸島)에서 살고 있던 그 노인이 백령도로 이주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도모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노인으로부터 정성스럽기 이를 데 없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70대의 고령이면서도 20대의 젊은 여인과 동거를 하고 있던 그 중국 노인이 나에게 베풀었던 극진한 대접이란 해삼 한 마리를 밤새 따스한 물에 불려 놓았다가 그 이튿날 이른 아침 채를 썰 듯이 가늘게 썰어 그것을 깨끗한 접시에 담아 내 숙소로 가지고 와선 내가 마시도록 했던 것이다.
내가 받은 그 해삼 대접은 그 노인의 말대로 약 20일즘 되어 코밑이 헐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그 후 노인은 과거 백해삼(白海蔘)한 마리를 먹고 큰 효험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만약에 백해삼이 눈에 띄기만 하면 꼭 그것을 구해 가지고 오겠다고 했으나 내가 백령도를 떠날 때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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