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4. 해병제1전투단 (2) 중공군의 2차 추기공세

머린코341(mc341) 2015. 2. 16. 12:17

나의 人生旅路 - 4. 해병제1전투단

 

(2)중공군의 2차 추기공세

 

그런데, 10월 31일 그 제2차 추기공세가 있기 직전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즉 10월 31일 새벽 1시까지 소총 1개 중대를 3대대에 배속시켜 그 중대로 하여금 우일선 대대의 전초진지인 39·33·31진지를 인수하라는 것과 11월 1일 새벽 5시까지 3대대의 주저항선 진지를 인수하고 계속 방어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전투단에서 내린 이와 같은 부대 교대 명령은 10월 16일에 김석범 준장과 임무를 교대한 신임 전투단장 김성은(金聖恩) 대령이 26일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적의 포격을 감안하여 40일간으로 예정돼 있던 우일선 대대의 부대 교대를 조기에 단행하여 예상되는 적의 공세에 대비코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대 교대 명령은 30일에 이르러 맹렬한 적의 포격이 39·33·31 및 50고지 일대에 가해지고 적병들이 그 주변에 출몰하는 바람에 그 적병들을 섬멸하지 않고서는 안전한 부대 교대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투단에서는 3대대에 배속된 51중대로 하여금 31·33 진지 좌전방에 있는 밤나무 숲의 적을 섬멸한 다음 11중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31진지를 비롯한 우일선 부대의 전초진지를 인수하게 했으나, 51중대장 김창균 중위의 지휘하에 그 날 14시경부터 감행된 그 밤나무 숲 공격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밤나무 숲 앞 구릉지대에 잠복해 있는 중공군(증강된 1개 소대 병력)의 악착같은 저항으로 말미암아 17시경까지 접전을 계속하다가 작전상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전초중대인 11중대와의 진지 교대는 중단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 날(31일) 밤 5대대는 53중대만이 3대대 10중대의 주진지를 인수했을 뿐 155고지 우측 일부와 39·33·31진지 등은 3대대 9중대와 11중대가 5대대에 배속이 된 상태에서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그래서 11중대의 전초진지들을 인수하게 돼 있던 51중대는 1개 소대는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2개 소대는 155고지 후방에 집결시켜 대대의 예비병력이 되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적이 약 2개 연대(추산)의 병력을 투입하여 좌일선 대대의 전초진지 및 일부 주저항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시각은 그 날(31일) 밤 10시 5분경이었다.

 

 

느닷없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던 그 심상찮은 포격이 개시되었을 때 5대대의 상황실에 위치하고 있던 나는 필시 저들의 대공세가 취해지고 있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한 예감은 누구에게나 느껴질 수 있는 예감이었다. 주저항선에도 무수한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손으로 콩을 한웅큼 쥐고 그것을 땅바닥에 뿌려 대 듯이 수없이 많은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전초진지는 인수를 하지 못했지만 일부 주진지를 인수한 상태에서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 나는 전투단 본부에서 이미 하달되어 있는 부대교대 명령을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이행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그 명령을 그대로 이행하는 선상에서 우일선 방어진지 전체에 대한 작전지휘를 나 자신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투단장이 그러한 지시를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즉 첫째는 그 때까지 전초진지와 주저항선에 투입이 되어 있던 3대대는 그만큼 전투력이 약화되어 있는 실정이었으므로 전초진지는 기왕지사 어쩔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주진지의 경우 이미 일부 진지는 교대를 했고, 다른 일부도 철수준비를 완료한 3대대 장병들에게 싸 놓은 짐보따리를 다시 풀고 나가 싸우라고 하기보다는 진지를 인수 중에 있는 5대대로 하여금 돕게 함으로써 배가 된 역량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었던가 싶고, 또 나의 계급이 3대대장의 계급(소령)보다 한 계급 높은 계급이었던 것도 일단의 이유로 작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임진강 서안(西岸)에 있는 5대대의 지휘소에 위치하고 있던 나는 전투단 본부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즉시 그 상황실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그 지휘소에는 다른 대대의 지휘소에서 갖추고 있는 전술 통신망, 이를테면 전투단 본부 상황실과 각 대대 상황실 및 각 중대 또는 소대 본부로 직결되어 있는 전술 통신망(유선망)이 그대로 설치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통신망을 통해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시각부터 5대대장이 우일선 부대에 대한 작전지휘를 한다는 통고를 한 다음 전개되는 일체의 상황보고를 직접 그 지휘소에서 접수하여 처리해 나갔던 것이다.

 

내가 위치한 그 지휘소에는 전투단 포병대대의 포병 연락장교와 미 해병사단 포병연대에서 파견된 연락장교가 나와 있어 내가 원하는 시각, 내가 원하는 장소에 지체없이 포탄을 날려 보내 적의 공격부대와 지원부대를 맹타함으로써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한데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그 날 밤 11시경 3대대장 안창관(安昌寬) 소령이 2~3명의 참모장교를 대동하고 그 지휘소에 나타나선 "5대대장님, 우리 11중대 아이들 다 죽여선 안되갔시니 증원병력도 보내 주시고 포도 많이 때려 주시라구요." 하며 태산 같은 걱정을 하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모든 것을 나한테 맡기고 돌아가라고 했더니 그는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지 두 번 세 번 같은 주문을 되풀이하다가 나로부터 '시끄러워 작전을 못하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한편 그 날 밤 집중적인 포격을 받고 있던 전초진지에서는 계속 상황을 보고해 오고 있었다. 적의 공격 지원사격이 차츰 진지 전방으로 접근해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고, 적의 포격이 진지 후방으로 연신(延伸)되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뛰쳐 나가 적을 무찌르겠으니 급히 적의 예상 접근로에 탄막사격을 을 퍼부어 달라고 했다. 유선과 무선을 통해 그러한 보고를 하는 전초진지 지휘관들의 말소리는 다급하고 비장했다.

 

한편 그들에게 할 수 있었던 나의 대꾸는 간단 명료했다. "잘 알았으니 최선을 다해 적을 섬멸하라!"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전투단 본부로부터 지원받은 3개 소대의 전차(15대)를 좌·우일선 대대 제한점 부근 주진지와 그 후방에 배치하는 한편, 전초진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3대대의 10중대와 5대대의 52중대를 주진지 부근에 추진시켜 놓는 등 만반의 증원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중공군의 지원 공격사격은 약 15분간 계속되었고, 그 공격 지원사격이 아군진지 후방으로 연신됨과 동시에 아군 전초진지(4주방어진지)에선 결사적인 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11중대 본부와 11중대 2소대가 배치되어 있는 31진지와 그 전방의 33진지 및 전투단 OP가 있는 155고지 전방의 39진지 등 5대대에 배속되어 있던 우일선 대대의 전초진지 장병들은 적의 포탄이 진지 후사면 쪽으로 연신되고 있는 것을 마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측정하듯 정확히 헤아리고 있다가 일제히 교통호로 뛰쳐 나와 진지 전방 약 50미터 거리 내로 새까맣게 몰려와 있는 적을 향해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화기를 가지고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그러자 그 불벼락 앞에 적병들이 무수히 쓰러졌고, 슬픈 비명과 아우성이 달빛 찬 밤누리에 구슬프게 사무치고 있었다.

 

그러나 인해전술을 구사하고 있던 중공군은 공격제대의 제1진이 쓰러지먄 곧 제2진을 투입하고, 제2진이 격퇴를 당하면 제3진을 투입하는 전법으로 공세를 취해 왔으므로 그 전초진지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들은 필경 그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처절한 진내전을 감행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서 나는 11중대 1소대와 9중대의 로켓포 소대의 일부 병력이 배체되어 있는 39진지를 지원하기 위해 51중대장으로 하여금 중기관총 4정을 155고지 북쪽에 거치하여 39진지의 서쪽 사면을 커버하게 했으나 그 39진지의 유무선이 단절되는 바람에 그 날 밤 155고지 전방에 잠복근무를 시켜 둔 1개 분대의 잠복조에 39진지의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10시 54분경 39진지의 A고지에는 해병들의 군가 소리가 들리고 있으나 B고지에는 중공군의 말소리가 들린다고 하기에 그 B고지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게 했다. 그 역습전에는 9중대의 1개 소대와 배속받은 전투단의 수색소대가 투입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39진지에서는 소대장과 분대장들이 중상을 입는 바람에 위생하사관 부경중(夫敬重) 하사가 소대장을 대신해서 소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리고 11중대 3소대가 배치된 33진지에서는 10시 50분경 105밀리 VT탄에 의한 진내 탄막사격을 요청한 끝에 가까스로 진내에 돌입해 있던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었던 3소대장 김용호 소위는 피아군의 시체로 덮혀 있는 그 고지위에서 "중대장님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신 부하 대원들을 잃어버린 죄책감을 죽음으로써 속죄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유서를 수첩에 써 놓고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함으로써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장병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또한 11중대본부와 제2소대가 배치되어 있던 31진지에서도 10시 50분경 105밀리포의 진내 탄막사격을 요청한 끝에 가까스로 진내의 적을 섬멸하는 등 최후의 일각까지 사투를 벌여 끝까지 그 진지를 고수했다.

 

한편 그 날 밤 우인접 부대인 미 해병사단에서는 미 해병대 소속 항공대를 출격시켜 아군 전초진지 전방 상공에 조명탄을 띄워 아군의 작전을 적극 지원했다.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나는 미 해병사단으로 부터 전해진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고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즉 미 해병사단의 정보참모실에서 캐치한 중공군의 무선통신에 따르면 미 해병사단장의 명령으로 감행된 155밀리포에 의한 대(對) 포병사격으로 판문점에서 개성에 이르는 이른바 그 평화도로 인근지역에 구축해 둔 중공군의 대형 탄약고가 명중되어 그 곳에 집적해 둔 수많은 탄약이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고, 또한 "부사단장이 부상을 입었으니 구급차를 보내달라" "증원병력을 못 보내 주겠다면 당신이 나와서 해 보시라구요!"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시각에 11중대장 임경섭(林炅燮) 중위가 지휘하는 11중대 본부와 11중대 2소대가 배치되어 있는 31진지에서는 결사적인 백병전(白兵戰)끝에 적을 격퇴시킨 장병들이 감격에 겨운 우렁찬 목소리로 「나가자 해병대」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너무나 통쾌한 승전고가 아닐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난 시각은 그 다음 날(11월 1일) 아침 6시경이었다. 처절한 혈전이 벌어졌던 그 전초진지 전방의 황량한 갈대밭 속에는 무수한 중공군의 시체가 흔해 빠진 가을 들녘의 짚단처럼 뒹굴고 있었고, 진내전이 벌어졌던 그 전초진지 안팎에도 피아군의 시체가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다.

 

참고로 그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 때 거둔 전투단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전과 : 확인사살 337명(우일선 대대 - 217명, 좌일선 대대 - 120명),

포로 9명(우일선 대대 - 5명, 좌일선 대대 - 4명),

추정사살 1,750명(포병·전차·중포 및 좌우일선 대대)

피해 : 전사 106명(우일선 대대 - 104명, 좌일선 대대 - 2명),

부상 86명(우일선 대대 - 81명, 좌일선 대대 - 5명),

실종 8명(각 4명)

 

 

전투가 끝난 그 날 오후 5대대는 11중대가 배치되어 있는 3개의 전초진지를 완전히 인수함으로써 전투단의 우일선 부대가 되고 3대대는 전투단의 예비대로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난 뒤 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즉 그 날 밤 좌일선 대대(2대대)에서도 유일한 전초진지인 지산동(地山洞)의 50고지를 끝까지 지켜 내었는데, 만약에 내가 그 50고지 전방에 있는 86고지를 5대대의 전초진지로 구축하지 않았었더라면 10월 2일에 있었던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때 그 86고지 대신 필시 그 50고지를 잃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또 만약에 그 때 50고지를 잃게 되었더라면 그 2차 추기공세 때 아군으로서는 마땅한 전초진지가 없어 좌일선 대대의 주저항선에 큰 위기가 초래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해 보게 된 나의 마음 속으로 그 때 86고지를 좌일선 대대의 전초진지로 구축한데 대한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평가를 해 볼 수가 있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나는 그 날 밤 나의 작전지휘하에 용전분투하여 끝까지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모군의 역사를 빛낸 3대대 11중대 장병들과 5대대 장병들의 빛나는 전공을 기리고 아울러 그 전투에서 산화한 전몰장병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