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1)해병대의 부대증편
1953년 3월 1일, 내가 해병대사령부 인사국장으로 부임할 당시 판문점에서의 휴전협상은 1952년 10월 8일, 회담기간 중 가장 큰 쟁점으로 등장한 전쟁포로 송환원칙을 둘러싼 쌍방간의 양보할 수 없는 주장과 고집 때문에 회담이 결렬된 후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즉, 유엔군측에서는 남한에 억류되어 있는 공산군측 포로들(북한군과 중공군) 대다수가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음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송환하고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송환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자유송환원칙을 고집한 데 반해,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가 용납되지 않는 공산군측에서는 포로들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든 포로들을 강제로 송환해야 한다는 이른바 강제송환원칙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로 결렬이 되었던 그 휴전회담은 내가 인사국장으로 부임한 지 나흘 후인 3월 5일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한 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어 4월 26일부터 회담이 재개된 끝에 결국 그 문제는 쌍방이 일보씩 후퇴하여 자국으로 강제송환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60일 이내에 일단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이관하여 비무장지대에 개설된 설득장소에서 90일간의 설득공작기간 중 소속국으로부터 파견된 설득공작원들(100<포로>:7<공작원>로 구성)의 설득에 설득당한 자들은 본국으로 송환하고 끝까지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자들은 중립국위원회에서 민간인의 자격으로 석방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휴전회담이 개시(1951년 7월 10일)된 지 만 2년 17일 만인 그 해 7월 27일 마침내 그 역사적인 휴전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휴전이 성립되기 약 4개월 전부터 시작된 나의 인사국장 재임기간은 약 2년 4개월간이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전시하의 인사행정업무보다는 휴전 후의 인사업무에 보다 많은 노력을 경주한 셈이었다.
휴전 후의 인사행정 업무는 전투손실에 대한 병력 보충계획에 치중된 전시하의 업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인 것이었다. 복잡성을 띠게 된 이유는 행정체계의 정비와 보임과 상훈 및 전사상자들에 대한 행정처리 등 전시하에서 처리한 제반 인사 행정업무를 재정리하여 문서 관리지침에 따라 보존해야 했기 때문이며, 역동적인 면모를 띠게 된 연유는 휴전 후에 체결된 한·미 양국의 군사협정에 의거한 부대의 증편과 병력의 증강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부대 발전에 고무적인 전기가 조성된 때문이었다.
약 2년여에 걸친 그 인사국장 재임기간을 돌이켜보며 특히 언급해 두고 싶은 얘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휴전 후 각 군에서는 활발한 부대 증편이 이루어졌었다. 그와 같은 부대의 증편과 병력의 증강은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 미국이 시종 통일없는 휴전에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제의를 받아들여 휴전 후의 안전보장을 위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4.11.18)하는 한편, 한국군 20개 사단(65만 5천 명)의 병력과 장비증강을 승인하는 조치를 취한 때문이었으며, 특히 미국은 한국군의 해·공군 증강을 위한 한·미 군사협정을 별도로 채결(1954년 12월)했었다.
해병대의 부대 증편작업 중 핵심체로 등장했던 것은 1954년 2월 1일 해병 제1전투단을 기간으로 해병 제1여단을 편성했던 일과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955년 1월 15일 그 해병 제1여단을 기간으로 해병 제1상륙사단을 편성한 일이었다.
그리고 전투단을 여단으로 개편할 때 그 증강된 병력 중에는 휴전 후 동해의 양도(洋島)와 여도(麗島) 및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로 부터 철수하여 상남(上南)에 집결해 있던 일부 도서부대 장병을 기간으로 신편했던 해병 제2연대 병력과 54년 6월에 발족한 제2포병대대 및 해안공병중대, LVT중대 등의 특별한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상륙전을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이와 같은 특수부대(중대)들은 그 후 해병 제1여단이 사단으로 편성될 떄 각각 대대로 개편이 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전투주력부대의 증편 외에 해병대에서는 많은 부대(또는 기구)를 증편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1951년 4월 기존 부대인 해병학교와 신병훈련소 등을 기간으로 하여 편성되었던 진해 해병교육단에는 휴전 후 교수부, 통신학교, 수송학교, 하사관학교, 야전위생학교, 교관교육대, 상륙전고등군사반, 상륙전초등군사반 등이 편셩(1955.4.2)되어 1955년 6월 1일 현재 그 병력이 1,900여 명으로 증강되어 있었고, 1958년 4월에는 LVT학교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종래 해병대사령부에 예속되어 있던 보급중대, 수송중대를 기간으로 1953년 11월 15일 임시보급창을 진해에 창설하는 한편 동일부로 부산파견대를 설치하여 육군의 각 기지창과 연락, 수송 및 저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했던 해병대에서는 54년 3월 그 임시보급창을 보급창으로 개편(10개 중대로 개편)한데 이어 1955년 6월에는 행정·보급·정비의 3개 부와 부산파견대로 개편함과 동시에 부대명칭을 해병보급정비단으로 개칭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보급정비단의 병력은 1,050명이었다.
다음 얘기는 해병들의 사기에 관한 것이다. 6·25전쟁 중 싸운 곳마다에서 불패 상승의 전통을 세웠던 해병들의 가슴 속에는 해병의 긍지가 분수처럼 용솟음치고 있었다. "나는 해병이다!" "우리는 귀신잡는 해병이다!"라는 그 가슴 뿌듯한 긍지는 간혹 후방지역에서 표출된 꼴사나운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개병대란 별명을 부여받기도 했었지만 황무지와도 같던 무(無)의 상태에서 찬란한 유(有)를 개척해낸 그들의 그 긍지는, 필경 긍지만의 긍지로 끝나지 않고 타군 장병들과의 경쟁적인 군사교육이나 훈련 및 각종 스포츠경기나 군사경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1등을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필승의 신념으로 승화됨으로써 해병대의 사기를 드높이고 명예를 선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면 휴전 후 연천(連川)지구에서는 한·미 야전군 부대의 모든 포병대대가 참가한 이례적인 포술테스트 대회가 열렸었는데, 그 대회에서 해병대팀은 매년 발군의 성적을 기록했고, 1952년에 창단이 된 해병스키팀은 1954년 2월 대관령에서 개최된 전국체전 동계 스키대회에 첫 출전하여 전종목에 걸쳐 우승을 독차지 했는데, 특히 그 전국체전 스키대회에는 군사적 의미를 역설한 국방부의 요청으로 신설된 군사 척후경기와 군인 전령경기(傳令競技) 종목이 포함되어 있어 그 두 가지 종목에 대한 국방부장관의 상패도 독차지했었다.
그리고 그 후 김하윤, 이만성, 서응호를 비롯한 6명의 선수로 구성된 그 해병대 스키팀은 전국체전 동계 스키대회에서 11년 연승의 기록을 세웟으니 참으로 경이적인 위업이 아닐 수가 없었다.
또한 스키뿐만 아니라 농구, 축구, 육상(역전 경기), 권투, 사격, 레슬링, 군사통신경기, 무장경기 및 타자경기 등에서도 해병팀은 속속 우승가도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3년부터 3년간 국방부에서 주최한 6개 종목에 걸친 각 군 대항 유무선 통신경기대회에서 해병팀이 3년 연승(종합우승)을 했던 그 감격과 1955년 6월 21일 서울에서 개최된 미국 빅토리아 농구단과의 친선경기에서 장이진(張利鎭) 씨가 이끌고 있던 해병대팀이 20:16으로 승리함으로써 내한 이래 연전연승의 가도를 달리고 있던 빅토리 농구단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게 했던 그 쾌거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일로 간직되고 있다.
그리고 1958년 가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제8회 국군 육상선수권대회 때는 처음으로 무장경기(武裝競技)라는 것이 실시되었는데, 그 때 해병사단팀(1개 소대병력)이 시종 일사 분란한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각 사단별로 출전한 허다한 타군의 강팀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을 함으로써 그 날 그 운동장을 꽉 메우고 있던 각 군 장병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던 일은 너무나도 감격에 겨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400미터 트랙을 10여 회 돌게 돼 있던 그 무장경기는 철모에서부터 상·하 배낭과 군화 및 M1소총 등으로 완전무장한 1개 소대의 병력이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일사 분란한 팀워크를 유지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완벽하게 주파하지 않고서는 우승을 차지할 수 없는 경기인데, 그 다음 해 때에는 해병사단에서 출전한 A·B팀이 1,2등을 차지함으로써 무적해병의 감투정신을 빛내었고, 또 그 후에 있어서도 해병팀은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이 밖에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병대 사격 선수들의 눈부신 활약상이다. 1959년 5월 태능사격장에서 개최된 국제군인사격대회 파견선수 선발대회에서 4명의 파견선수 중 1,2,4위를 차지했던 3명의 선수가 해병이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매스컴에 크게 보도된 바 있었지만, 그 후 해병대 사격부에는 최성수 씨를 비롯, 이재희, 심문섭, 안재송, 박남규, 고인준, 이봉구, 장문경, 배병기, 오걸, 김우태, 민영록, 박종길, 최철상, 최충석 등 기라성과 같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배출되어 허다한 국내의 사격대회에서 모군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선전 감투했었다.
끝으로 언급해 둘 얘기가 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55년 6월 중순 내가 인사국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해병대사령부에서는 타군 교육기관에서 위탁교육을 받는 장병들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1등을 차지한 장병들에게는 5점이란 고과점수를 배정하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을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러한 제도 역시 해병대다운 배려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당시 국방장관의 표창에 배정된 고과점수가 2점이었던 것을 보면 그 5점이란 점수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점수가 아닐 수 없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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