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2) 1213위의 영현

머린코341(mc341) 2015. 2. 22. 10:51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2)1213위의 영현

 

휴전이 된 후 정부 당국에서는 6·25전쟁 중에 전사한 전몰장병들의 영현을 봉안하기 위해 동작동(銅雀洞)에 43만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군 묘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현재의 그 위치에 군 묘지관리소를 설치한 날짜는 1955년 7월 15일이었으며, 그 날로부터 군 묘지관리소에서는 전쟁기간 중 전후방 각처에산재해 있던 군별 또는 부대별 임시묘지와 그밖의 가매장된 장소에 매장된 전몰장병들의 유골과 유품 등을 이송받아 군 묘지에 안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 당국에선 1956년 4월 13일 군 묘지령을 공포한 데 이어 1956년 4월 26일에는 현충일(6월 6일)을 제정했고, 1965년 3얼 3일에는 군 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시켜 국가유공자묘역과 애국지사묘역 및 경찰관묘역도 함께 설치했다.

 

그러데 군 묘지관리소가 설치되기 전부터 해병대에서는 장차 조성될 군 묘지로 이장할 전사자들의 임시묘지의 실태를 조사한 바가 있었는데, 휴전이 될 때까지 임시묘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전사자들의 시신은 진해 장충단(奬忠壇)묘지에 711구, 금촌지구에 350구, 파주지구에 41구, 양구(楊口)에 90구, 김포에 21구 등 모두해서 1213구에 달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그 시신들은 1957년 4월 2일까지 대부분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한편 이 자리를 빌어 내가 인사국장으로 부임한 후에 겪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도 아울러 소개해 두고자 한다.

 

내가 인사국장으로 부임한 뒤 인사국장실에는 간혹 전사통지서를 받은 전사자들의 유가족이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나 남편이 분명히 전사를 했는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또 어떤 유가족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디를 어떻게 다쳐 전사를 했는지에 대해서까지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담당장교를 불러 친절하고 정중하게 답변을 하게 했고, 또 나 자신도 따뜻한 위로의 말로써 그들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혹 그 유가족들이 먼 지방에서 왔을 경우엔 숙식도 제공해 드리고 노비도 보태 드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이런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즉 전사자의 매형 되는 사람이 장인 장모와 함께 찾아와선 다짜고짜로 나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누가 내 처남을 죽였어?" 하며 소리치는 바람에 어떻게나 기가 찼던지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전사자의 매형 되는 사람한테서 그러한 봉변을 당하고 보니 매우 불쾌하고 노여울 수밖에 없는일이었지만 그가 모시고 온 진짜 유가족을 생각해서 우정 그러한 감정을 억제했던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도 전쟁터에서 친동생을 잃은 유가족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가까스로 그들의 격한 감정을 달랠 수가 있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