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5)용두산 화재사건
휴전이 된 그 이듬해(1954년) 12월 중순경이었다. 그 전부터 큰 불이 잘 나기로 소문이 나 있던 부산에서 또 한 차례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 해 12월 10일 새벽녘에 일어났던 그 용두산 「바락촌」화재사건은 그 산꼭대기에 위치한 해병대사령부에까지 불길이 번졌던 일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불이 처음 일어났던 곳은 용두산 북쪽 기슭에 있는 동광동(東光洞) 3가의 한 민가였고, 그 민가에서 발생했던 그 화재는 겨울철 새벽녘에 불고 있던 거센 찬바람을 타고 소라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마을 일대의 「바락촌」과 판잣집을 불태우게 됨으로써 용두산을 불바다로 화하게 했는데, 그 무서운 불길이 맹렬한 속도로 용두산 꼭대기로 번져 오자 해병대사령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즉 비상연락을 받고 달려왔거나 소방차들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놀라 깨어나서 달려온 각 국감실 장병들과 영도(影島)에 있는 사령부 수송중대 장병들이, 한 머리에선 각 국감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류와 인사국에서 보존하고 있는 해병대의 영구보존서류 등을 영도에 옮기는 작업을 서둘렀고, 한 머리에선 목재 킷 위에 가설해 놓은 천막들을 걷어내어 근처의 안전지대로 옮겼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선 용두산 꼭대기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사령부의 북쪽 울타리 밑에서 저지시키기 위해 사령부에서 보관하고 있던 펌프를 작동시켜 퍼 올린 물을 버킷에 담아 그것을 릴레이식으로 울타리쪽으로
운반하여 그 울타리 밑에 마치 담쟁이 덩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집에 퍼부었다.
그와 같은 일들은 비상연락을 받고 즉시 사령부로 달려왔던 사령관 김석범 중장의 진두지휘하에 질서 정연한 행동으로 진행이 되었다. 특히 인사국의 영구보존 서류와 각 국감실의 중요서류를 영도로 운반했던 그 작업은 용두산 일대의 도로가 부산지구의 각 소방서에서 출동한 수십 대의 소방차와 미군 소방차들에 의해 점거되고 있는 실정이었으므로 부득불 차량으로 하지 못하고 인력에 의한 릴레이식 방법으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반했다.
한편 그 날 새벽녘에 발생했던 그 용두산 화재사건은 난민(難民)들이 발붙이고 살고 있던 약 1,000채의 바락건물과 판잣집을 불태운 것 외에 동광국민학교 가건물과 동양호텔, 중앙교회, YMCA회관 등 많은 건물을 불태워 약 4,000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는데, 그와 같은 피해 속에 해병대사령부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몇 동의 퀀셑을 소실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데 1.4후퇴 전 제주도로부터 진해로 이동해 있던 해병대사령부는 1951년 5월 20일 부산 용두산으로 이전한 후 약 5년간을 그 곳에 머물러 있다가 1956년 6월 30일 서울(용산구 용산동 山 2번지)에 건립된 신 청사로 이전했던 것인데, 이러한 추억을 더듬다 보니 그 시절의 해병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그 용두산 꼭대기의 천막촌과 지금은 구 해병대사령부 건물이 되고 만 그 용산의 옛 청사 생각이 새삼 간절하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7) L-19기의 불시착 (0) | 2015.02.23 |
---|---|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6) 제2연대장 (0) | 2015.02.23 |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4) 태평양 악극단 (0) | 2015.02.22 |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3) 상륙전 훈련 (0) | 2015.02.22 |
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2) 1213위의 영현 (0) | 2015.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