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5. 휴전
(7) L-19기의 불시착
만 1년간에 걸친 연대장 근무를 마친 나는 1958년 7월 4일부로 사단 참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부임한 지 약 1개월 반이 경과된 어느 날 나는 업무협조를 위한 급한 용무로 인접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1기갑사단의 L-19기에 탑승하여 포항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문산지구에서 포항까지는 L-19기로 약 2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데 미 제1기갑사단의 경비행장을 이륙한 후 약 1시간 반 동안 순조로운 비행을 계속하고 있던 그 경비행기는 돌영 일기예보에도 없던 태풍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 태풍이 동반하고 있는 먹구름 속에 갇혀 약 1시간 동안이나 마치 거센 풍랑을 만난 일엽 편주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방향감각을 일고 표류하다가 두 차례나 산등성이에 부딪힐 뻔한 아찔한 순간을 맞는 등 그야말로 절대절명과도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던 중 하늘이 도왔던지 먹구름 속에 생겨난 조그마한 창문과도 같은 탈출구를 발견하게 된 조종사가 지체없이 그 탈출구로 기체를 급강하시켜 몰고 나감으로써 아슬아슬하게 그 먹구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항공기의 연료가 거의 소진되어 더 이상 비행을 계속할 수 없었던 조종사는 나에게 그런 사정을 알려주곤 기체 아래쪽에 발견된 철길을 따라 가며 비상착륙을 시도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마침 면소재지 같은 고을 변두리 쪽에 약 200미터쯤 돼 보이는 도로가 나타나자 그 도로 위에 착륙을 시도할 결심을 하고 1~2회 착륙연습을 해 본 다음 방향을 잡고 기체를 하강시키려고 했으나, 바로 그 때 그 도로 옆에 있는 학교로부터 집으로 가기 위해 그 도로위로 쏟아져 나온 국민학교 학생들이 비행기를 향해 반갑다며 손을 흔들어대는 바람에 부득불 다른 곳을 물색할 수 밖에 없었다.
기내에 스피커라도 장치되어 있었다면 딱한 사정 얘기를 하고 길을 비켜 달라고 소리쳐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기재가 없는 것이 한스럽기까지 했던 나는 이러다가 연료가 다 떨어지면 어쩌나 해서 입술이 바싹바싹 탈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한 불안감 속에 철로를 따라 잠시 동안 비행을 계속하다가 두 번째로 물색하게 된 장소는 조금 전의 고을보단 훨씬 더 큰 고을 외곽지대에 있는 철교 밑의 하천지대에 있는 약 100미터쯤 되는 모래사장이었다.
그 사장이 시야에 잡히자 조종사는, 연료가 다 떨어져 더 이상 비행을 계속 할 수가 없으니 저 곳에 착륙을 시도해 보겠다고 말한 다음 방향을 잡고 착륙연습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 모래사장은 그 면이 평탄치가 않고 울퉁불퉁한데다 하천선을 따라 굴곡이 져 있었고, 또 비행기가 교량을 향해서 착륙을 시도하건 교량을 등지고 착륙을 시도하건 사장의 길이가 워낙 짧아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그 L-19기의 조종사가 비록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소집근무를 하고 있는 노련한 조종사란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내심 그 조종사의 노련한 기술에 매달리며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작심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는 이러한 양상으로 귀결이 되었다.
즉 교량을 등지면서 꼬리 부분을 바짝 지면에 갖다 대며 착륙을 시도한 그 L-19기는 울퉁불퉁한 사장에 내려 앉는 순간 그 꼬리가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기체가 앞쪽으로 전복하고 말았고, 그러한 과정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던 나와 조종사는 기체가 뒤집히는 순간 프로펠러도 떨어져 나가 버리고 거꾸로 뒤집혀 있는 그 경비행기의 동체 속에 한참 동안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그 때 마침 2~3명의 청년들을 지프차에 태우고 현장으로 달려온 상주경찰서장과 상주군수가 우리 두 사람을 기체 밖으로 끌어 낼 때 비로소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비록 의식은 회복했으나 팔다리의 힘이 죄다 빠져 나가 일어설 수가 없었던 나와 조종사는 두 사람을 구출해 준 그 청년들의 등에 엎혀 내를 건너 도로 위에 정차해 있는 지프차가 있는 곳까지 가서 그 지프차에 실려 상주경찰서 숙직실로 가게 되었는데, 우리를 숙직실로 데리고 간 상주경찰서장과 상주군수는 한여름철인데도 군불을 잔뜩 때게 해 놓고서 팔다리를 주물러 주는 등 두 사람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극진히 간호해 주었다.
그런데 숙직실에서 약 2시간 누워 있던 나와 조종사는 뜨거워진 온돌방의 열기 속에서 어떻게나 갈증이 심했던지 각자가 한 주전자씩의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때 상주경찰서장이 나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들이 차를 타고 그 현장으로 달려가게 된 이유는 누군가가 불시착할 것 같은 미군 경비행기 한 대가 교량이 있는 그 곳 상공에서 선회하고 있다는 신고를 해 왔기에 사고가 발생할 경우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마치면서 그는 애처로운 잠자리 같은 그 경비행기가 대파를 당해 전복을 했는데도 두 사람 모두 찰과상 한 군데 입지 않았고, 또 그런 과정에서 엔진에 불이 붙어 폭발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면서 반가운 인사말을 건넸는데, 미상불 연료가 소진되었기 망정이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더라면 필시 폭발을 면치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한편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게 된 나는 사고 현장에 방치되어 있는 기체의 처리와 조종사의 귀대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대구에 있는 동촌(東村)비행장에 연락을 취하여 사고신고를 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상주경찰서의 전화를 이용해서 동촌비행장으로 연락을 취해 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전화가 연결이 되지 않아 부득불 조종사를 상주경찰서에 기다리게 해 놓고 상주에서 김천(金泉)역까지는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김천에서 대구역까지는 밤이 늦어 객차가 없었으므로 부득불 화물차를 타고 갔다.
그런 다음 대구역 역장실에서 제공해 준 지프차를 타고 동촌비행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동촌비행장에 들러 당직장교(중령)에게 자초지종 사고경위를 설명했더니 그 당직장교는 그러지 않아도 평택에 있는 항공통제소로부터 실종된 그 L-19기의 행방을 수색하라는 명령이 국내의 전 공군기지에 하달되어 있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고신고를 마친 나는 상주경찰서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종사가 빨리 귀대할 수 있도록 신속한 기체회수 등을 당부하곤 당직실에서 알선해 준 근처 여관에서 일박한 다음 그 이튿날 아침 구겨진 카키복을 다려 입고 포항으로 떠났는데, 출장 용무를 마치고 귀대했더니 그 때 이미 그 조종사도 부대(제1기갑사단)로 돌아와 있었다.
그 조종사의 말에 따르면 그 다음 날 아침 기체 회수를 위해 현장에 도착한 쌍발 대형 헬기 편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 얘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과 같은 후일담으로 이어진다. 즉 그로부터 10여 일 후 그 조종사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날밤 미 제1기갑사단에서는 그 조종사와 나의 기적적인 생환을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파티를 개최했는데, 그 조종사의 기적적인 생환 얘기로 시종이 된 그 날 밤의 파티 석상에서 해병 제1상륙사단장 김동하 소장은 사고 발생 직후 그 조종사를 위해 급히 공적을 내신해서 나오게 된 화랑무공훈장을 그 조종사에게 수여하며 특히 한국을 위해 기여한 그의 공로를 치하했고, 하마터면 그와 저승길을 함께 동행할 뻔했던 나는 나대로 정성껏 마련해 간 선물을 그 조종사에게 증정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한편 그러한 사고를 겪었던 나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고, 또 그런 일로 해서 나는 그 후 어쩌다가 상주라는고을 이름을 떠올리게 되거나 상주 사람을 대하게 될 경우 나도 모르게 친근한 정을 느끼곤 했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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