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0) - 청룡부대의 용맹성
테로이 매복작전(용머리 2호)
바딴간 반도 데사키 강 하구에서 격침당한 월맹군 화물선에 무기를 인수하러 오는 적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상식이었다. 그 상식을 증명해 주려는 듯, 테로이 마을 민병대장에게서 제보가 들어왔다. 상황을 목격한 적 1개 중대 병력이 야음을 틈타 테로이 마을을 거쳐 원대로 복귀 중이라는 것이었다.
꽝나이에서 북쪽으로 19㎞ 떨어진 평야의 중심지에 있는 테로이 마을은 평시에도 중요한 적 보급로였다. 이 마을 민병대장의 제보를 근거로 청룡은 치밀한 매복작전 계획을 세웠다. 분대 병력으로 중대 병력을 격멸한 보기 드문 전과를 올렸다.
1967년 7월 19일 청룡 제2중대 3소대 2분대는 적 1개 중대를 맞아 적 32명을 사살(추정사살 45명)하고 4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승리는 분대장 김학영 하사의 침착하고 주도면밀한 작전에 힘입은 것이어서 더욱 빛났다.
“절대로 소리 내지 말라.”
“담배는 절대 안 된다.”
“적을 최단거리까지 유인하라.”
“언제나 침착하게 행동하라.”
이것이 분대장 김 하사가 대원들에게 내린 행동 철칙이었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저녁, 김 하사 분대는 중대장에게 매복근무 출동 신고를 마치고 군장검열을 받은 뒤 목적지인 테로이 마을로 향했다. 목적지 도착 즉시 조별로 2개씩 휴대한 크레모아 지뢰를 적당한 자리에 매설하고 조별 행동에 들어갔다.
대원들은 볏논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 한가운데 도로변으로 흐르는 수로 옆에 일렬로 배치됐다. 방음(防音) 명령이 가동돼 개인 간에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조 사이의 연락도 노끈을 사용하기로 돼 있었다. 이상이 없으면 조 사이에 연결된 노끈을 두 번 당기고, 적 발견 시는 계속 당긴다는 약속이었다. 사격 개시 신호는 분대장이 터뜨리는 크레모아 지뢰의 폭음으로 정했다. 폭음이 들리면 전방으로 접근하는 적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라는 지시였다.
밤 9시 30분쯤이었다. 근무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포복으로 순찰하던 김 하사 시야에 이상한 물체가 포착됐다. 약 100야드 전방 도로 위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이때 구름이 달을 가려 계속 물체를 감시하기 어려웠으나, 잠시 후 구름이 걷히자 안호송 일병도 적을 봤다. 김 하사는 설렁줄을 당겨 분대원들에게 적의 출현을 알리고, 크레모아 지뢰 점화 스위치를 잡았다. 적은 1조와 2조 사이로 접근해 10야드 전방까지 접근해 왔다.
김학영 하사는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점화 스위치를 힘껏 눌렀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귓전을 때리는 총성이 한참 이어졌다. 첨병으로 나섰던 적 10여 명이 쓰러지고, 뒤에서는 무어라 소리치며 대응하려는 움직임과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 하사는 PRC-10 수선통신기로 중대본부에 조명사격을 요청했다. 중대 OP에서 상황을 청취하고 있던 유현태 중대장은 즉시 81mm와 60mm 조명탄을 발사해 줬다. 작전현장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대원들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조준사격을 가해 또 여럿을 쓰러뜨렸다.
중대 OP로부터 이 상황을 통보받은 중포중대가 적의 퇴로에 포격을 가했다. 도주가 어려워지자 적은 도로 경사면에 몸을 숨기고 반격을 시도했다. 직사화기로는 적을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 하사는 2명의 대원을 데리고 포복으로 도로 가까운 곳으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져 적을 제압했다. 저항을 포기한 적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김 하사는 추격명령을 내렸다.
“와아-, 돌격이다.”
대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도로를 가로질러 논두렁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적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김 하사가 전과 확인을 뒤로 미루도록 지시한 것이다. 도망치기에 급급한 적은 조명탄 빛으로부터 몸을 숨기려고 볏논 속이나 수로, 또는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라이 라이.”(이리 와 이리 와)그것을 목격하고 접근한 대원들이 월남 말로 외치며 총을 겨누어도 그들은 물속에서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안 돼. 큰일 나!”한 대원이 웅덩이를 수색하러 들어가려는 순간 김하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상황이 한밤중까지 계속됐다. 어느새 테로이 마을 초입에 와 있었다. 김 하사는 끝까지 추적해 잔적을 완전히 소탕하고 싶었다. 그러나 중대본부는 작전 중단 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추적하면 마을에 숨어 있는 적의 협공을 받게 될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1개 분대 병력이 적 중대 병력을 궤멸시킨 이 작전의 성공은 분대장 김 하사의 침착한 지휘 덕분이지만, 중대장 유 대위의 정확한 정보 판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작전이 끝난 뒤 김 하사에게는 을지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됐다. 분대원들에게는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가 돌아갔다.
미국 부통령으로 부터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있는 김학영 하사
고노이 섬 작전(승룡 12호)
월맹군 제36연대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자랑한 고노이 섬을 탈환한 것도 월남전의 대표적 전첩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이 요새를 분쇄하기 위해 몇 차례 작전을 벌인 미 해병대는 7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단념했다. 그 정도로 견고하다는 이 기지도 청룡의 용맹성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고노이 섬은 다낭 남쪽 20㎞ 지점에 있는 100년 요새였다. 끼람 강과 찌엔 섬 강 사이에 위치한 삼각주인 고노이는 섬이라기에는 육지와 너무 가까운 땅이다. 이곳에 있는 적 인민해방위원회 지하조직은 월맹의 월남 해방전 작전지휘를 수행하고 있었다. 군사시설로 병참기지·탄약창 같은 군수지원 시설과 훈련소·통신소·의료시설까지 둬 라오스 국경에 이르는 4번 도로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고노이 섬 공략을 미군 측에 건의한 것은 청룡부대장 이동호 준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관할지역 안에 있는 섬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섬을 공격해 손에 넣으면 그만이지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외곽만 봉쇄하는 것은 청룡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룡의 건의로 계획된 이 작전은 청룡부대 제1, 2, 3, 5대대와 포병대대가 주공부대로 활약했고, 미 해병1사단과 월남군 제1군단이 지원했다. 한·미·월 3개국 군이 3개 방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한 이 작전은 함재기와 상륙전 장비들이 동원된 입체작전이었다. 적의 저항은 끈질기고 완강했다. 밀림과 갈대숲 속에 위장된 수많은 땅굴과 동굴진지와 지하 벙커에 숨은 적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무려 열흘이 걸렸다.
1969년 6월 10일 청룡부대 제1대대에 배속된 26중대 장병들은 헬기편으로 고노이 섬 갈대밭에 투하됐다. 고노이 섬 공격 마지막 날이었다.
1단계 작전에서 청룡 제2대대와 미 해병 7연대는 도마뱀처럼 생긴 고노이 섬 외곽을 차단, 포위망을 형성한 상태였다. 적의 퇴로를 막는 공격이 개시된 지 열흘째였다. 26중대가 투입되기 전인 10일 새벽 4시, B-52와 팬텀기의 맹렬한 폭격이 섬 전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미 전함 뉴저지 호의 16인치 함포와 지상포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고노이 섬은 아침 햇살 속에 검붉은 화염과 연기에 휩싸여 시야가 나빴다.청룡 제1대대와 미 해병대대는 800여m 거리를 두고 갈대밭을 지나 밀림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다.
첨병 임무를 부여받은 3중대가 월맹 정규군과 조우해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는 순간, 대대장 이도행 중령은 작전계획을 바꿔 26중대에 미 해병대와의 경계지역 차단을 명했다. 넓게 전개해 부대 간의 기동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L-19 정찰기가 하늘을 날면서 적의 동태를 중계하듯 알려오고, 기관총 탄막 사격의 엄호 아래 공격이 시작된 지 1시간 30분, 동굴에서 여자 베트콩 5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첫 전과에 중대원들의 사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월맹군 20여 명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중대장 안병민 대위는 적색 신호탄 투척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피해를 막기 위해 냇가에 위치한 1소대에 엄폐하도록 조치한 뒤, 적색 연막이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정면을 노출당한 적은 전사자 시신을 남겨둔 채 황급히 달아났다. 갈대숲에 교묘하게 위장된 지하벙커에 집중공격을 가하고, 1시간이 넘는 수색전을 벌였다.
적 사살 23명, 포로 3명의 전과였다. 많은 무기와 함께 수백 포대의 쌀도 노획했다. 대규모 지하 아지트 하나가 그렇게 궤멸됐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상륙주정 LVT와 탱크들이 강을 건너와 본격적인 수색전이 시작됐다. 날이 저물어도 작전 수행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노을이 스러져 간 하늘에서 날아온 전투기들이 수많은 조명탄을 투하해 밤을 낮과 같이 밝혔다. 적이 포진해 있는 목적지로 간단없는 포격이 계속되고, 한미 해병대가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자 적은 더 깊숙이 숨어들었다.
그렇게 확보된 공간으로 불도저들이 열을 지어 압박해 들어갔다. 공중폭격에도 끄떡없던 시멘트 벙커와 수천m 길이의 교통호, 수백 개의 개인호, 갖가지 장애물, 위장된 수중동굴, 수십 개의 지하 보급창고와 탄약고가 그렇게 무너지고 부서지고 파묻혔다.거의 비슷한 시간에 각 공격 방면에서 승전고가 울려왔다.
뒤이어 섬에 투입된 전투공병들은 콘크리트로 된 진지 시설물들을 폭파해 버렸다. 베트콩들의 관망대로 이용되던 밀림 속의 거목들도 불도저 삽날에 뿌리가 패여 옆으로 쓰러졌다.
일주일이 넘는 공격 기간에 적은 282명이 죽고 28명이 포로로 잡혔다. 더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땅속으로 숨거나, 요행히 도망도 쳤을 것이다.
이날 2대대 OP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미 해병 제3원정군사령관 웰트 중장은 그런 융단폭격을 당하고도 적이 집요하게 저항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청룡이 건의하고 주공을 맡은 고노이 섬 공격작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심정은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워했던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26중대장 안대위는 작전이 끝난 뒤의 소감을 참전수기에 이렇게 적었다.
제3대 청룡부대장 이동호 장군, 베리아 상륙전(승룡 15호)
월남전 기간 중 한·미 해병대의 대규모 연합상륙작전이 실시돼 베리아 반도 일대의 양민 2천여 명을 해방시켰다.
1969년 9월 5일부터 30일까지 수행된 이 작전은 규모나 전투의 치열함에서 인천에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두 나라의 해병대가 오랜만에 호흡을 맞춰 치밀하게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인천 이후의 전통과 우정을 세계에 과시했다.
다낭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베리아 반도는 천연의 요새다. 반도 북쪽에 은거지를 둔 월맹군과 지방 게릴라들이 호이안과 다낭의 아군 군사시설을 위협해 우군의 작전활동에 큰 제약이 됐다.
베리아 반도로 돌진하는 청룡부대
이곳은 원래 미 기갑사단의 전술책임지역이었다. 그래서 미 해병대가 두 차례에 걸쳐 상륙자전을 벌여 평정했으나 상륙부대가 철수하면 다시 게릴라 세상이 되곤 했다. 아예 싹을 도려내자는 논의가 한·미 해병대 연합상륙작전으로 발전했다. 작전에 참여한 부대는 청룡부대 제2·3·5대대와 포병대대, 그리고 미 해병대 LVT 중대였다. 연합전력은 미 해병1사단, 제1비행사단, 월남군 제51연대, 미7함대 소속 전대였다.
반도 북부는 한국군, 남부는 미군이 맡아 일주일간의 1단계 작전과 열흘간의 2단계 작전으로 나눠 수행했다. 청룡은 9월 2일부터 베리아 반도 서쪽을 강타한 우군의 함포지원과 포병지원이 끝난 뒤 네 차례의 해상 및 공중돌격작전을 수행했다.
첫 공격은 5일 아침 9시부터 해상 돌격부대와 헬기를 이용한 수직 돌격부대에 의해 반도 북부에서 시작됐다. 7일 아침에도 마찬가지로 2개 중대는 해상으로, 2개 중대는 공중으로 투입돼 차단임무 수행을 위한 탐색전을 벌였다.
1단계 최종 단계에 접어든 10, 11일에는 오수돈 중령의 5대대와 유동욱 중령의 2대대 상륙단이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해 함상훈련을 실시하면서 목표지점으로 항진했다.
2단계 작전 첫날인 12일 본격적인 상륙전이 시작됬다. 기함 이오지마 함에 승선하고 있던 5대대 상륙단이 공수돌격을 감행함으로써 서막이 열리자, LVT에 분승한 2대대 상륙단이 적색 해안으로 상륙돌격을 감행함으로써 작전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5대대 돌격상륙단 김영일 중사는 참전기를 통해 "작전 중 베트콩의 저격탄(스나이핑)이 빗발치는 가운데 평소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작전을 수행하여 단 한 사람의 중대원도 피해가 없었다" 라고 증언했다. 그는 미7함대 함정의 함포지원 아래 적색 해안에 상륙할 때는 아침노을을 배경으로 한 고기잡이배들이 항공모함 주변에 떠 있어 낭만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륙돌격 후 뜨거운 모래사장과 우거진 밀림을 헤쳐 가면서 전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D+3일 11시 40분 첨병분대장 김동호 하사가 발견한 동굴은 이상했다. 입구가 'H' 자 형으로 생긴 이 동굴은 폭은 넓었으나 길이가 짧았다. 탐색조가 동굴 안에서 노획한 비닐 보따리에서는 칼빈 소총과 함께 한글로 된 전단 20장이 들어 있었다. 청룡을 상대로 심리전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이국의 적진에서 노획한 한글 문서는 기억에 또렸하다고 김 하사는 회상했다.
통신병은 자고 있나?
1970년 12월 21일 월남에 파병된 김해룡 하사는 1971년 1월 제1대대 제2중대 특공분대장 보직을 받았다. 다낭 남쪽 디엠반에 있는 부대였다. 김 하사 분대원은 20명이었다. 해병대 분대 편제는 원래 육군보다 인원이 많다.
월남전 때는 미 항공함포연락중대 요원 3명과 전방관측 요원 2명이 배속돼 당시 육군 편제의 2배가 넘었다.
특공분대장인 그는 1971년 1월 31일 야간 매복작전을 나가면서 근무수칙을 강조했다. 얼마 전 주간 매복작전을 하던 중 몇 명의 베트콩이 아군의 기동로나 숙영지에 나타나 아군이 흘리고 간 실탄이나 먹다 버린 C-레이션, 심지어는 수류탄까지 주워 가 아군에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아무리 숙영지 정리를 지시해도 강조하는 그때뿐 곧 이완되는 한국인의 기질은 전장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다. 이는 우리들이 특히 게릴라전에서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야간작전에서는 방음(防音)·방광(防光)이 만고의 철칙이며 세수하지 말고, 이를 닦지 말고 마늘·김치 같은 냄새나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잔소리도 배운 그대로 했다.
그날은 그믐밤이었다. 밤이 그리 깊지 않아 월남인 특유의 체취가 실바람에 실려 왔다. 베트콩의 내습을 알아챈 김 하사는 상황 설렁줄을 한 번 당겼는데 이내 적정(敵情)이 사라졌다. 무언가 낌새를 챈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옆에 있는 통신병의 무전기 안테나 끝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베트콩이 그것을 보고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안테나 끝 피복이 벗겨지면 흙을 바르거나 덮개를 씌워 빛의 반사를 막는 것이 월남전의 상식인데 통신병이 그것을 소홀히 한 것이다. 그렇다고 철수할 수도 없는 일,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개인호 안에 죽은 듯이 있으면 상황이 끝난 것으로 알고 적이 접근할 것이다.
예측은 적중했다. 베트콩들이 어둠 속에 몸을 드러내고 접근해 올 때 김 하사는 힘차게 실렁줄을 당기면서 크레모아 지뢰 스위치를 눌렀다. "쾅, 쾅" 하는 연쇄 폭음을 신호로 특공대원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으로 상황은 일찍 종료됐다. 총성이 멎은 지 5분쯤 지나 김 하사는 좌우의 사정 파악을 마치고 옆에 있는 통신병을 불렀다. 통신병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통신병, 너 자고 있나?"
김 하사는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울 수가 없어 직접 통신기 헨드셋을 들어 중대본부에 간략한 상황보고를 했다.
날이 밝아 김 하사는 전과 확인에 나섰다. 적의 시체 4구가 발견됐고 여기저기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김 하사는 통신병에게 전과보고를 지시하려고 또 불렀다. 그러나 그는 아까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를 흔들어 깨워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마에 적탄이 관통한 것을 그제야 보았다.
김 하사는 다시 무전기를 잡고 "적 사살 4명 아군 전사 1명" 이라고 전과를 정정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감기지 않은 부하의 눈꺼풀을 덮어 주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6대사령관 공정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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