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8) 최고회의 해체식
민정이양을 하루 앞둔 1963년 12월 16일 오후 2시 정각. 최고회의청사 앞 뜰에서는 10·15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이주일 부의장, 그리고 조진만(趙鎭滿) 대법원장, 김현철 내각수반을 비록한 각료들과 전(前) 최고위윈을 포함한 모든 최고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5·16 혁명 후 942일간 존속해 왔던 최고회의의 문을 닫는 해체식이 거행되었다.
5·16 군사혁명과 동시 삼 권을 장악한 권력의 총본산으로 군림해 왔던 그 최고회의 건물(8층) 옥상에 게양돠어 있던 최고회의 기가 하강된 후 박정희 의장은 "오늘로서 파란과 격동의 5월혁명은 일단매듭을 짓게 되었지만 5월의 구국혁명이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한것이 아닌즉 5월의 구국혁명이 민족과 국가에 제기한 제반 명제(命題)는 계속 추구되어 나가야 할 것'이라는 감회어린 치사를 했다.
2년 7개월간에 걸친 최괴회의의 운영실적에 관해서는 황종갑(黃種甲) 총무처장이 낭독한 결과보고에도 언급이 되었었지만, 그간 최고회의에서 주재했던 회의의 운영실적을 살펴보면 67차에 걸친 본회의와 274차에 걸친 상임위원회가 개최되었고, 그 기간 중에 제정되거나 정비, 또는 개정된 법률안건의 수는 1567건에 달했다.
그리고 당초 30명으로 출발했던 최고위원들(당연직 포함)은 여러차례 개편을 거듭한 끝에 해체될 때까지 상당수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현상을 빚었고, 적을 때는 21명의 위원들에 의해 회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최고위원 중 대부분은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민정에 참여 한 셈이었고, 공약(公約)대로 원대복귀 한 사람이 17명, 반혁명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된 사람과 재야에 묻힌 사람이 각각 13명이나 되었고, 예비역으로 있다가 혁명 직후 특별법을 제정하여 현역에 복귀했던 사람은 김종필 중령과 김동하 소장 등 두 사람이었다.
한편 해체식 전날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은 그 때까지 최고회의에 몸담고 있던 최고위원들과 개별적인 고별(告別)면담을 통해 각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각 위원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진로에 대한 의견도 물어 보곤 했는데, 그 때 박 의장은 나에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있느냐고 했으나 나는 군에 복귀하여 국토방위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내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피력했다.
박 의장이 나에게 출마의사를 타진했던 것은 그 당시 공화당에서 나를 출마 내정자로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수차 신문지상에서 보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고회의 해산을 앞두고 나는 나대로 그간 법사위원회에서 함께 근무하며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배려를 했다.
즉 당시 법사위원회에는 2명의 자문위원과 2~3명의 전문위원 및 1명의 위원장 보좌관을 비롯한 20여 명의 직원들(현역군인, 공무원 또는 민간인)이 있었는데, 그들 중 원소속에 복귀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원소속에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해 주고, 기업체로 전직하기를 바라는 자들에겐 사환(여자)에 이르기까지 전원 마땅한 직장을 알선해 주는 등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협조와 지원을 해주었다.
다음은 내가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어 부임 선서를 했던 1963년 3월 11일부터(임명된 날짜는 2월 21일) 최고회의의 해체식이 거행된 그해 12월 16일까지 만 9개월 5일간 최고회의의 법사위원장으로서 봉직했던 그 시절에 대한 나 자신의 솔직한 회고담이다.
미국 시찰여행 중 임명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어떤 이유로 혁명주체도 아닌 현역장성들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내가 맡게 된 법사위원회가 관장하는 소관업무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했고, 또 그러한 이유들로 해서 최고위원으로 임명된 데 대한 내 자신의 감회 그 자체도 그저 덤덤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 시찰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부임선서를 할 때의 내 마음 속에는 나에게 부여된 임무를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서 있었다.
그 사이 나름대로 분석도 해 보고 다짐한 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나를 포함한 7명의 현역장성들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했던 그 시기는 혁명주체세력들 간의 알력이 심한 때였고, 또 민정 이양이 란 국가적인 중대한 과제를 둘러싼 조야간의 대립이 격심한 때였다.
그리고 부임해서 그 권력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었지만 내각에 대한 지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최고회의의 권한과 기능이 실로 막강하고 막중했던 것처럼 최고위원들의 할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러한 시기에 법사위원장으로서 정치(政治)까지 관장하게 되었던 나의 일과는 말할 수 없이 분망했다.
매일같이 열리게 되어 있는 상임위원회에도 참석해야 했고, 내각에서 올라오는 결재서류에 대한 결재, 타 위원회의 안건 심의, 본회의 참석, 내각에 대한 감독과 산하 기관에 대한 순시 및 출장업무 등 그야말로 몸이 열이 있어도 부족할 만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민정이양을 앞둔 그 중요한 시기에 나 자신이 일체의 사심(私心)을 버리고 6·25전쟁 때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고 싸운 각오로 오로지 애국심 일변도로 나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노력했던 것을 지금도 나는 보람있게 생각하고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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