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6) 목포 공생원

머린코341(mc341) 2015. 3. 4. 10:33

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6) 목포 공생원

 

1963년 3월 11일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취임했던 나는 박정희 의장의 허락을 받아 수일간의 일정으로 호남지구에 대한 순시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순시 여행에는 최고회의 법사위원회의 전문위원 박천식(朴天植) 소령(육군 법무관)이 동행을 했다.

 

한데 목포시청을 방문했던 그 첫날에 나는, 목포 해병막사장(幕舍長) 박천만(朴千万) 중령으로부터 목포에 공생원이란 고아원이 있다는 얘기와 윤학자(尹鶴子)라는 일본인 여성(본명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이 6·25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한국인 남편(尹致浩 院長)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며 그 고아원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꼭 한 번 방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박천만 중령으로 하여금 그 날 중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게 하여 그 날 오후 박 중령과 함께 그 고아원을 방문했던 나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공손하게 나를 맞이해 준 그 윤학자 원장으로부터 공생원의 현황 설명도 듣고 그녀의 안내로 비록 시설물은 빈약한 편이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그 공생원의 모든 시설과 그 고아원에서 양육되고 있는 말쓱한 옷차림을 한 원생들도 직접 만나 볼 수 있었는데, 그 공생원을 방문하고 돌아온 나는 마치 고아들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그 윤학자 원장의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인 사랑에 깊이 감동을 했던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윤학자 원장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여기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때까지 존속해 왔던 그 목포 공생원의 간략한 내력부터 먼저 설명하고 다음 얘기를 진행하기로 한다. 공생원의 창립자는 일제 때 피어선 성서학윈(聖書學院)을 나은 전도사 윤치호 씨였다.

 

1909년 전남 한평군 대동면 상옥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던 그는, 소년 시절에 그 고을을 무대로 하여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미국인 여선교사(본명 마우리)의 전도활동을 지성껏 도운 것이 인연이 되어 7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그 여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피어선 성서학원을 다닐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 자격을 취득했던 윤치호씨는 그 때 이미 신(神)의 소명(召命)을 받고 있었던지 목포시의 호남동에 공생원이란 팻말을 꽃아 놓고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7명의 고아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타고난 웅변술과 성서학원에서 배운 선교이론으로 노방(路傍)설교도 하고 스스로 걸식도 하면서 그 공생원을 키워 나가고 있었는데, 호남동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그 날이 곧 1928년 10월 15일이었고, 그로부터 4년 후 목포시 당국으로부터 사회복지사업체로서의 사업인가를 받았다.

 

그 후 윤치호 원장은 소문을 듣고 차츰 늘어나기 시작한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독지가 정병조(鄭炳朝) 씨가 희사해 준 200평의 용당동(龍塘洞)의 영산강(榮山江) 해안 매립지로 원사(園舍)를 옮김과 동시에 그 원사에 용당학원(龍塘學院)이란 또 하나의 간판을 내걸고 원생들에 대한 인간교육에도 힘을 쓰다가 그 후 다시 인기(人家)가 없는 유달산 서쪽 해변가(지금의 죽교동)의 암석지대에 부지를 개척하여 그 곳으로 원사를 옮기게 되었는데, 죽교동에 부지를 개척하고 있을 그 무렵 윤 원장은 원생들을 돌봐 줄 보모(保姆)와 원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줄 자원봉사자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나머지 목포고등여학교의 다카오(高尾)선생에게 상담을 한 끝에 소개받게 된 사람이 곧 그의 제자인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였다.

 

당시 지즈코는 목포여고를 졸업한 후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의 음악교사로 재직 중에 있었는데, 다카오 선생의 소개로 틈을 내어 공생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그 지즈코 역시 주님의 소명을 받았음인지 정명여학교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자기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그 공생원의 보모가 되어 윤 원장을 돕다가 그것이 곧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었던지 1938년 10월 15일, 그러니까 공생원이 창립된 지 10주년이 되던 날 윤 원장의 청혼을 받아들여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반대를 무룹쓰고 통칭 거지대장으로 불리고 있던 그 윤치호 원장과 화측을 밝했다. 그 때 지즈코(尹鶴子)의 나이 26세, 윤치호 원장의 나이 29세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람과 신앙으로 일심동체가 되었던 이들 부부는 그로부터 일제의 중국 대륙 침공과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그리고 8․15의 격등기와 6·25 전쟁을 겪는 가운데 날로 늘어나는 고아들을 키우느라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을 해 왔는데, 6․25전쟁 중인 1951년 1월 하순경 식량 조달을 위해 전남 도청(광주)으로 간 윤치호 원장이 행방불명이 되어 끝내 돌아오지 않게 되자 윤학자 씨는 약 300명으로 늘어나 있는 원생들을 굶겨 죽일 수가 없어 특히 일본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와 멸시, 그리고 심지어는 공생원이란 이름 그 자체를 말살해 버리려는 어떤 성직자(목사)의 배신과 폭력까지 감내하며 그 사이 믿음직스럽게 자라나 있던 몇몇 졸원생(卒園生)들과 힘을 합쳐 끝끝내 그 공생원을 지켜 나왔던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1952년 2월 보사부장관(許政)으로부터서는 표창장을 받았고, 휴전이 되기 전인 1953년 4월에는 함태영(咸台永) 부통령이 직접 공생원을 방문하여 윤학자 원장의 그 갸륵한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었다. 이상이 그 때까지의 간략한 내력이다.

 

한편 출장 용무를 마치고 귀경했던 나는 박정희 의장에게 그 목포 공생원과 윤학자 원장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나로부터 그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박 의장은 감명을 받은 듯 "강 위원장, 좋은 데를 다녀왔군. 그렇게 훌륭한 여성이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하면서 나로 하여금 관계부처 장관과 협의하여 공생원을 지원할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했다.

 

박 의장으로부터 그러한 지시를 받게 되었던 나는 마음 속에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윤학자 원장에게 대한민국의 훈장을 수여하려는 계획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고아들을 양육하는 일에 신이 들려 있는 듯 했던 그 윤학자 원장의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높이 현양하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공생원의 존재를 널리 알려 공생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의 손길을 뻗쳐 오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세우게 된 나는 내 자신의 마음에 이끌려 제과점에서 직접 구입한 초콜릿 등 원생들이 좋아하는 다량의 과자를 차에 싣고 한두 차례 공생원을 다녀온 뒤 윤학자 원장에 대한 훈장 내신서를 직접 작성하여 박 의장의 내락을 미리 받아 놓고 주무부처인 총무처에 제출했는데, 그 내신서에 기재했던 훈장의 종류는 문화훈장 국민장이 었다.

 

그리고 내가 복안을 세우고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은 어떻게 해서든지 박정희 의장께서 윤학자 원장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했던 나는 그로부터 2~3개월 후(1963년 6월) 박 의장이 영산강(榮山江) 개발계획과 관련된 일로 목포를 시찰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기회를 실현시켰다.

 

그 날 박 의장을 직접 모시고 내려갔던 나는 전남 지사 송호림(宋虎林) 준장과 목포 시장에게 미리 당부하여 박 의장이 탄 전용기동차가 목포역에 도착할 때 그 윤학자 원장을 미리 그 곳에 안내해 두었다가 박 의장과 제일 먼저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했던 것인데, 그 날 기동차에서 내린 박 의장은 윤 원장을 보자마자 "목포 공생원의 윤학자 원장님이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하며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 간 금일봉을 윤 원장에게 전하면서 "처지가 어려우실 텐데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로써 위로와 격려의 인사말을 대신했고, 또한 박 의장을 직접 대면하게 된 그 뜻밖의 자리에서 그토록 극진한 격려와 위로의 말을 듣게 된 윤 원장은 감격을 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작성했던 그 훈장 공적 내신서는 혁명정부에서소정의 결재 과정을 거쳐 대통령 권한대행(박정희 의장)의 최종결재를 득하여 확정을 보게 되었는데, 그 훈장이 나오게 되자 나는 그것을 신임 전남 도지사(金容寬 준장)에게 보내어 그 해 광복절 기념식 때 윤학자 원장을 식장에 초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여토록 조처를 취했다.

 

그 날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유서 깊은 광주(光州) 서(西)중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그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윤학자 원장에게 수여된 그 영예로운 훈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에게 일찍이 수여된 적이 없는 훈장이었을 뿐 아니라 더구나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일본 국적을 가진 민간인 여성에게 수여된 전무후무한 훈장이었다.

 

따라서 그 날 윤학자 원장에게 영예로운 그 훈장이 수여되자 목포 공생원과 윤학자 원장에 대한 놀라운 화제가 매스컴을 타고 국내외에 널리 보도가 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특히 일본의 매스컴들이 그러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조야(朝野)는 물론 모든 일본 국민들의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에서는 그러한 사실이 계기가 되어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1965.6.22)지 2년 수개월 후인 1967년 11월 24일 하시모도(橋本) 관방장관이 각료회의 석상에서 그러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보고하고 일본국의 남수포장(藍綬褒章)을 수여키로 의결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포장은 그 해 12월 21일 우애가와(上川) 주한 일본공사(公使)에 의해 중병(폐암)으로 입원해 있는 서울 성모병원(聖母病院) 병상으로 전달되어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던 그녀의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했다.

 

한편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그 이듬해(1964년) 5월, 그러니까 한일회담 관계로 한국인의 대일 감정이 격화되고 있었고, 또 일본 국민의 한국민에 대한 이해도 극히 부족했던 그 시기에 윤학자 원장은 약 6개월간의 일정으로 장녀 청미(淸美)의 남편인 공생원의 정영걸 총무(6·25전쟁 때 진남포에서 월남하여 공생원에서 고락을 같이 해 온 청년)를 대동하여 모국을 방문, 자신이 손수 쓴 취지문을 가지고 재계(財界)와 정계(政界)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느끼고 있는 한국에 대한 소개와 공생원에 대한 후원을 호소했는데, 한국을 자신의 제2의 모국이라고 했고, 또 공생원의 고아들 모두가 자신의 친자식과 같은 아이들이라고 말하면서 도움을 호소했던 그 윤학자 원장의 눈물겨운 호소 작전은 그 당시의 일본 언론들이 언급을 했듯이 불행했던 지난날의 역사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이 파여져 있던 한·일 양 국민의 이해 증진을 위해 기여한 바가 켰으며, 그 해 10월 17일에 발족된 일본 경련단(經連團) 부회장 우애무라 고고로(植材甲午郎) 씨를 회장으로 하는「다우치(田內-尹鶴子)격려회」가 곧 그러한 결과를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한편 한·일국교가 정상화 된 그 해(1965년) 10월 1일 목포 개항기념일을 맞이하여 목포 시장으로부터 제1회 「목포 시민의 상」을 받았던 윤학자 원장은 1966년 4월 장남 기(基)가 서울중앙신학교(사회복지과)를 졸업하자 기(基)를 데리고 다시 모국을 방문했는데, 그 1966년도의 모국 방문 시에는 일본 NHK의 아침 TV방송에 출연하여 프로듀서와 한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한편 공생원에 관한 사진을 소개하면서 후원을 호소함으로써 1964년10월에 발족된 「다우치(田內-윤 원장)격려회」외에 동경에 있는 일본 사회사업회관의 「중앙공동모금회」내에 「다우치(윤 원장)후원회 연락사무소」가 설치되고, 또 윤 원장의 고향 고지시(高知市)에도 후원회가 발족되어 보다 적극적인 후원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처녀 때 폐렴(肺炎)을 앓은 적이 있었고, 또 1965년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폐종암을 수술한 적이 있었던 윤학자 원장은, 1967년 5월 13일 대판(大阪)에 있는 일본 유수(有數)의 사회복지기관인 박애사(博愛社)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그 결연식을 마친 후 동경에서 지병으로 쓰러져 그 길로 서울의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성모병원에서 윤 원장은 앞에서 언급한 그 일본 정부의 남수포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1968년)9월까지 계속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던 윤 원장은 서서히 꺼져 가고 있는 자신의 명(命)을 헤아리고 있었던지 10월에 접어들자 병원 당국과 측근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공생원으로 돌아가 자신의 56회 생신일인 10월 31일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서의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고 그녀의 갸륵한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천국으로 개선했다.

 

한편 윤학자 원장이 타계하자 목포시에서는 6․25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그 한국인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그 사이 3000명의 고아를 길러 낸 그 천사의 분신 같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목포시가 생긴 이래 최초의 시민장(市民葬)을 엄수하고 고인의 유언에 따라 그 시신을 그녀 남편의 고향 선산으로 운구하여 안장했는데, 목포시를 눈물바다로 화하게 했던 그 시민장에는 목포시민의 6분의1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의 조객이 참석했다.

 

그리고 윤학자 원장이 타계한 그 이듬해(1969년)3월 9일 일본 천황(天皇)은 고인에게 훈(勳) 오등보관장(五等寶冠章)을 추서했고, 또한 그 이듬해 (1970년)5월 8일 경향신문사에서는 고인을 국민이 증정하는 <희망의 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하여 공생원 내에 <어머니 탑>을 기증하여 제막식을 거행했는데, 그 당시 나는 공화당 목포시 지구당 위원장의 자격으로 그 제막식에 참석하여 헌화를 했었다.

 

끝으로 60여 년 전 신(神)의 소명을 받아 그러한 사랑의 씨를 뿌렸던 그 윤치호 씨와 그의 아내가 되어 함께 그 씨를 뿌리며 가꾸어 나오다가 불행하게도 6․25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던 그 남편의 유지(遺志)를 가냘픈 외국인 여자의 몸으로 사력을 다해 계승해 왔으나 끝내는 병으로 쓰러져 애석하게도 5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그 윤학자 여사가 뿌린 그 사랑의 밀알들이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 소망스럽게 자라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두고자 한다. (이미 언급된 사항은 제외)


※ 먼저 고인의 생존 시에 이루어졌던 일들부터 언급해 둔다.

1955년 12월 27일. 공생원 조산소(助産所)를 설치 운영

1956년 12월 27일. 재단법인 인가를 득함.

195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존스 씨로부터 젖소 20두를 이수하여 공생목장에서 사육

1961년 10월 31일. 공생영아원 설치

1962년 11월 30일.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부터 감사장 수장

1962년 12월 국제인권옹호연맹 한국본부 목포시 지부장의 감사장수장

1964년 10월 1일. 제1회 목포 시민의 상을 수상※ 다음은 윤학자 원장의 사후(死後)에 이루어졌던 주요한 일들이다.

1971년 6월 7일. 일본항공(주)마쓰오(末尾)사장으로부터 아동숙사(兒童宿舍) 「잘 하우스」를 기증받음

1971년 6월 23일. 공생원 수선화 합창단 고지현 지사의 초청으로 방일

1972년 4월 5일. 공생원 원장 윤기(尹基)씨 대판(大販) 박애사 생활지도원 후쿠다 문지(福田文枝) 양과 결혼

1972년 4월. 사회복지 법인 대판자강관(大販自張館)과 형제시설(兄弟施設) 결연

1972년 12월 30일. 보모재훈련사업 전남사회복지교육원 개설

1975년 4월 1일. 공생가정상담실 개설

1975년 10월 31일. 목포 공생원에서 아동숙사 「오사카(大販)사랑의 집」 준공식 거행

1976년 6월 일본 동경도(東京都)에 마음의 이친(里親) 협력회 발족

1976년 9월 수선화 합창단 제2회 방일(아다미 시장 초청)

1977년 3월 3일. 사회복지법인 목포 공생원을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으로 변경

1977년 3월 12일. 서울특별시로부터 시립소년기술원과 시립소녀직업보도소를 위탁 운영

1978년 2월 23일. 목포 공생원이 제22회 소파(小波)상 수상

1979년 6월 15일. 윤기(尹基)원장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상

1979년 10월 15일 서울소년소녀 직업훈련원을 서울종합직업훈련원으로 변경. 직종: 자동차정비, 건축, 목공, 옵셋인쇄, 목조공예, 양복, 미장, 전기용접, 기계조립, 가구제작, 조리(調理) ※1977년 3월부터 1989년까지 배출인원 20,485명

1984년 12월 21일 목포시 고하도(高下島)에 정신박약아를 위한 재활시설 「공생재활원」을 인가받음

1986년 2월 단행본 <어머니는 바보야>를 발간

 

윤기 이사장과 윤문지 여사가 쓴 이 책(신국판 281면 ·弘益社 刊은 1,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윤기 씨가 쓴 제1부-<어머니는 바보야>의 주된 내용은 6.25전쟁 때 윤치호 원장과 윤학자 여사가 겪었던 쓰라린 수난기(受難記)와 윤학자 원장의 타계에 읽힌 얘기 및 그 후 양친(兩親)의 유지를 계승한 윤기 이사장의 꿋꿋하고 활기찬 사업 개척 과정을 싫은 글이며, 윤문지 여사가 쓴 제2부-「羊이 한 마리」는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모집한 제3회 <여성 휴면 다큐멘터리>에 입선한 작품인데, 그 스토리는 1971년 6월 윤기 이사장이 수선화 합창단을 데리고 도일하여 박애사를 방문했을 때 윤 이사장과 만나게 된 그 사연과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및 결혼 후 말할 수없는 역경을 극복하며 축복받은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기까지의 감명 깊은 추억담을 읽은 넌픽션이다(윤문지 여사는 일본 同志社 대학 문학부 사회학과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여성이다).

 

1988년 2월 4일 서울종합직업훈련원 소녀부를 서울 한남(漢南)여자직업훈련원으로 독립 운영하게 됨

훈련직종 : 자수, 미용, 편물, 양재, 한복

*연간 배출 인원 750명

1989년 5월 30일. 제주도에 정신요양시설을 인가받아 위탁 운영

1989년 7월 12일. 목포 앞바다 고하도의 공생재활원에 현대식 신축건물과 자립작업장을 완공

1989년 9월 25일 서울특별시로부터 시립상계(上溪)직업훈련원을 위탁받아 운영하게 됨

1989년 공생복지 재단 윤기(尹基) 이사장이 일본 대판부(大販府)로부터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을 인가받아 대판부 계시회옥(堺市會屋) 3360-12번지에 특별양호(養護)노인홈 「고향의 집」(지상 3층 지하 1층)을 건립.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일 한국인 교포 노인들의 안식처인 이 「고향의 집」을 건립하는 데 있어서는 현재 9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생복지재단 이사(理事)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 이사인 전(前)주한 일본 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대(金山政英)씨의 후원이 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0여 년 전 전도사 윤치호(尹致治)씨에 의해 창립이 되었던 그 목포 공생원은 오늘날 국가 사회를 위해 참으로 축복받을 공헌을 하고 있는 공생복지재단으로 성장했으니 그 창립자인 고(故)윤치호 씨와 그 모진 형극의 세파 속에서 남편의 유지를 계승하여 목숨이 다하는 그 최후의 한 순간까지 오로지 공생원을 위해 육신과 영혼을 불살랐던 그 윤학자(尹鶴子) 원장, 그리고 56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던 그 윤학자 원장의 유지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공생복지재단으로 크게 성장하게 한 현 공생복지재단 윤기(尹基) 이사장을 비롯한 고인들의 유족과 전(前)·현(現)공생복지재단 이사 및 같은 일본인 여성으로서 고인이 된 시어머니에 이어 2대(代) 걸처 공생원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윤문지 여사 등 그 모든 분들의 눈물겨운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밖에 특히 언급해 두고 싶은 말은 가나야마(金山)대사를 비롯한 마애다(前田), 스노배(須野部)등 역대 주한 일본 대사들과 하라다겐(原田憲)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기시(岸) 전 일본 수상과 사토(佐藤)수상 등 일본의 원로 정계 인사들과 일본경련단(經連鬪)부회장 우애무라 고고로(植村甲牛郞)씨 씨 등 재계 인사들이 공생원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했다는 사실이다.

 

주한 일본 대사들의 경우는 민정이양(民政移讓)후 박 대통령과 수시로 공생원을 돕는 일에 대해 건의를 했고, 또 한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기시 전 수상도 박 대통령에게 공생원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임명된 직후 목포시를 방문했다가 공생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나는 그 후 해병대사령관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도 한결같이 공생원을 돕기 위해 노력을 했었지만, 특히 내가 공화당 목포시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된 후에 9대 총선에 출마, 당선되어 6년간의 국회의원직을 수행하는 동안 공생원에서 개최하는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등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공생원을 도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최고회의 의장 때 목포 공생원과 윤학자 여사에 대한 얘기를 나로부터 전해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나에게 공생원 소식을 물으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했고, 또 자신의 의사나 복안을 나에게 알려 주며 음으로 양으로 공생원을 지원했다.

 

끝으로 1993년 8월 하순경 내가 사회복지 법인 「공생복지재단」 윤기 이사장 내외분의 초청으로 나의 아내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윤문지 여사가 시설장(施設長)으로 있는 재일(在日) 한국인 노인들을 위한 특별 양호노인 홈 - 「고향의 집」과 고 윤학자 여사의 출생지 인 고지시(高知市)를 방문했던 소감과 유아원과 고아원등의 아동복지사업을 비롯하여 지역사회복지사업, 직업훈련원, 장애자복지사업, 부랑인(浮浪人)보호사업, 노인복지사업 및 후원사업 등을 활기차게 추진해 나가고 있는 사단법인 「공생복지재단」의 본부소재지와 국내외 사무소 및 전화번호 등을 소개해 둔다.


나와 나의 아내가 일본을 방문했던 날짜는 1993년 8월 26일이었다.

그 날 낮 12시 30분 오사카(大阪) 비행장에 도착했던 우리 부부는 윤문지 여사의 안내로 승용차로 약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사카이 시(堺市)의 특별양호노인홈-「고향의 집」으로 향했다. 고향의 집에 도착하니 윤기 이사장은 때마침 그 곳을 방문 중인 사카이 시 부시장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 이사장의 소개로 사카이 시 부시장과 인사를 교환한 연후에 나는 50명의 재일 한국인 노인들을 양호하고 있는 그 「고향의 집」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지상 3층 지하 1층의 현대식 콘크리트건물로 건립되어 있는 그 「고향의 집」의 내부시설과 그 건물 속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남녀 노인들(65세~92세)의 생활상을 직접 관찰하고 접해 본 나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향의 집」 운영자와 료모(寮母)들의 극진한 양호를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노인들이 마치 천국(天國)에서 살고 있는 신선들과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행복한 군상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담화실(談話室)과 회의실 등이 갖추어져 있는 그 건물 1층에는 의무실과 약국, 세탁실과 욕실 등이 있었는데, 특히 욕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들어가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거실과 잠시 쉬는 휴식공간이 병설되어 있는 2층에는 료모실과식당 및 개호(介護)자료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고,거실과 잠시 쉬는 휴식공간 및 료모실이 있는 3층에는 기능회복훈련실 및 개호자료실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니 참으로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온돌방은 별도로 있었지만 1실에 4명씩 배정되어 있는 넉넉하게 넓은 거실마다에는 4개의 좋은 침대가 놓여 있는 것 외에 노인들이 무료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방마다 TV와 라디오가 설치되어 있었고, 부부 노인들이 동거하는 방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석양길에 접어든 그 교포 1세 노인들이 김치와 온돌방, 운치 있는 옛 가락과 한국말이 함께 하는 그 「고향의 집」에서 마련한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을 즐기며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날 윤기 이사장의 안내로 내부시설을 살펴보는 동안 나는 찾아온 손님들을 반가이 맞는 그 노친네들과 손을 맞잡으며 인사도 나누고, 또 넓은 회의실로 가서는 그 곳에 모인 노인들(절반 가량이 제주 출신)에게 고향 소식과 고국 소식을 전해 주기도 했는데, 나로부터 그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노인들은 더러는 향수에 젖어 흐느끼기도 했고, 더러는 박수를 치며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다.

 

그 노인들 중에는 무자식 노인도 있었고, 자식이 있는 노인들도 있었다. 대판에 자식을 둔 어떤 노인은 자식이 가멸하게 잘 살고 있지마는 그 자식집보다는 「고향의 집」이 훨씬 더 낫다고 했고, 또 다른 노인들은 이구동성, "여기가 천국이지요." "어디 가서 이런 대접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재일 한국인 노인들을 100프로 무료로 양호하고 있는 그 「고향의집」에는 지체가 부자유스런 노인들의 손발이 되고 마음의 반려자가 되어 치료도 해 주고 시중도 들어 주고 있는 의사와 간호원 료모,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프로그램과 학습을 지도하는 지도교사, 수녀와 취사장 종사원 등 「고향의 집」을 위해 지성을 다해 봉사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다. 그 곳에 있는 5명의 수녀는 전주(全州) 천주교회로부터 파견된 수녀들이라고 했다.

 

그 「고향의 집」을 둘러보면서 나는 특허 그 건물의 시설장인 동시에 관리책임자로서 한국인 노인들을 친부모 이상으로 공경하며 양호하고 있는 윤문지 여사를 보고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 시어머니의 분신(分身)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그 날 윤기 이사장은 나에게 이러한 청사진을 소개해 주었다. 즉 1994년 5월 오사카시에 건립될 예정인 제2의 「고향의 집」을 포함한 5개소의 「고향의 집」을 연차적인 건립계획에 따라 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건립한다는 것이 곧 그 내용이었다. 그러한 말을 전해들은 나는 그 청사진이 차질없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었는데, 1994년 5월 30일 그 두 번째의 고향의 집이 오사카시(生野區 中川2丁目4番126號)에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윤학자 여사의 고향인 고지시(高知市)를 방문했던 날짜는 8월 28일이었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 오전 11시경 윤기 이사장과 함께 고지 비행장에 도착했던 나는 윤 이사장의 안내로 고지 시내의 그랜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 관광을 나섰다. 고지시에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말기에 왕정복귀(王政復歸)를 위해 투쟁했던 사카모도 료마(板本龍馬)등 왕정복귀와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위해 헌신했던 이름난 지사(志士)나 위인(偉人)또는 명사(名士)들의 유적과 기념관이 많았다.

 

그 날이 일요일이 아니었더라면 고지시에 있는 「다우치후원회(田內後援會」를 방문하여 후원회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질 수가 있었을 텐데 그 다음 날 고지시를 떠나는 바람에 그러한 기회를 갖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대신 숙소인 호텔에서 나는 윤기 이사장으로부터 고지시에 있는 「다우치후원회」에 관한 충분한 설명을 들은것 외에 모친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한 고 윤학자 여사의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말과 그 기념관 건립을 위해 고지 시내에 100평의 부지를 이미 확보해 두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바로는 그 때 이미 어떤 영화사에서는 윤기 이사장 내외의 동의와 협조를 받아 고 윤학자 여사의 일대기(一代記)를 영화로 제작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마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러한 시기에 그와 같은 소식까지 접하게 되고 보니 나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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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