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3) 4·8 성명
한편 조야간의 그와 같은 행동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윤보선 씨는 조야 영수회담을 제의했지만 김응조(金應祚)씨와 김정호(金正皓)씨 등 예비역 장성들이 거중조정에 나선 끝에 3월 27일 김현철(金照哲) 내각수반 주재하의 시국 수습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각계 대표 69명이 참가한 그 3·27 시국 수습회의는 민정당(民正黨)과 신정당(新政黨)측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불참했고, 또 얻어진 결론도 없었으나 건국 이래 초유의 정부 대 정당 간의 공개토론이 이루어진 그러한 회의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3·27 시국 수습회의가 있은 뒤 정부측에서는 김현철 내각수반과 김재춘 중앙정보부장, 이동원 비서실장 등이 윤보선, 허정, 이범석 씨 등 재야의 거물급 인사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시국수습을 위한 대책을 협의한 끝에 3·16 성명 유보시한을 하루 앞둔 3월 30일 오후 4시경 청와대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윤보선, 허정 씨가 회동한 3자 회담에서 쌍방은 조야 실무자 회의(朝野實務者會議)를 구성하는 문제에 대해 극적인 합의를 보게 되었고, 그 3자 회담의 위임에 따라 최고회의측에서는 대표로 임명된 나와 박현식(朴賢植) 최고위원, 이석제(李錫濟) 내각사무처장, 문홍주(文鴻柱) 법제처장 등 4명을 선임하고 재야측에서는 조재천(曺在千) 전 의원을 대표로 박한상(朴漢相), 소선규(蘇宣奎), 박세경(朴世經) 씨 등 4명의 전직 국회의원을 선임하여 도합 8명의 실무자로써 그 조야 실무자 회의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 조야실무자들은 4월 1일부터 모두 4차에 걸친 회의를 개최했는데, 1차에서 3차에 이르는 회의는 방방간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공전을 거듭했으나 제4차 회의에서는 재야측에서는 재헌을 위한 국민투표안을 철회하면 군정을 12월 26일까지 연장하는데 동의하겠다는 제의를 함으로써 비로소 쌍방간의 완충적인 절충안이 마련되어 전국이 파국을 면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박정희 의장은 혁명주체 내부강경파들에 대한 무마작업을 벌인 다음 4월 8일 드디어 시국수습을 위한 자신의 최종단안을 성명서를 통해 발표했는데 쌍방의 입장을 일보씩 후퇴시킨 그 4․ 8성명은 3․16성명에서 제의했던 개정헌법의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9월 말까지 보류한다는 것과 9월중에 정부는 각 정당 대표들과 모든 정치정세를 종합 검토하여 공고된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든가, 또는 개정헌법에 의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든가를 협의 결정한다는 내용, 그리고 정치활동을 다시 허용하고 이 기간 중 모든 정당은 정계의 개편, 재정비를 단행하여 체질개선(體質改善)과 정계의 정화(淨化)를 기함으로써 새로운 정치풍토를 조성하고 건전한 민정 이양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끔 과감한 조처가 있도록 권고한다는 내용과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폐기한다는 것 등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4․8성명이 발표되자 재야에서는 4월 15일 계야 지도자 11인의 명의로 된 성명서를 통해 3․16성명을 변형한 것이라며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킬 4․8성명을 즉각 철회하라는 등 한동안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으나 점차 그 양상이 소강상태로 변모되어 조야 공히 민정이양에 대비한 선거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4·8성명이 발표되자 혁명정부나 언론계의 일각에선 박 의장이 민정에 참여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추측을 하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박 의장의 그러한 결심이 4·8성명이 있기 바로 직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4월 8일 박정희 의장이 그러한 성명을 발표하자 군사정부와 재야의 일각에선 그러한 조처가 박 의장의 출마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가 있었지만 결국 국가의 안정과 경제적인 불안 타개를 위해 민정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한 혁명 주체세력과 범국민 정당으로 발족한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인 박 의장은 5월 27일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게 되었고, 지명을 받은 박 의장은 8월 30일에 거행된 자신의 전역식(轉役式)에 참석한 다음 그 날 오후 공화당에 입당하는 절차를 거쳐 8월 31일에 개최된 제3차 공화당 전당대회(全黨大會)에서 자신에 대한 후보 지명을 공식적으로 수락하게 되었다.
민정이양을 위해 실시하게 된 대통령 선거일은 그 해 10월 15일로 확정이 되었고 10월 15일에 시행된 그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차점자인 윤보선 후보보다 156,026표가 더 많은 4,702,640표를 득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었다.
당시의 후보별 득표 상황은 다음과 같다.
朴正熙(民主共和黨)‥‥ 4,702,640표
尹譜善(民政黨)‥‥‥‥ 4,546,614표
吳在泳(秋風會)‥‥‥‥ 408,664표
張履裵(新興黨)‥‥‥‥ 198,837표
卞榮泰(正民會)‥‥‥‥ 24,443표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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