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2) 3·16 성명과 정국
다음에 언급하는 얘기는 내가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부임한 후에 전개된 정치상황과 관련된 내용이다.
내가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부임한 직후인 3월 16일 오후 4시경 최고회의 본회의장에서는 이른바 3·16성명으로 지칭되고 있는 군정연장(軍政延長)과 관련된 최고회의 의장의 중대한 성명문이 발표되어 그 해(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활동이 허용된 재야(在野)정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주일(李周一) 부의장과 7개 분과위원장들이 배석한 가운데 1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낭독된 그 박정희 의장의 성명문 요지는 앞으로 약 4년간의 군정기간 연장에 대해 그 가부를 국민투표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의장의 그 3·16성명은 군사정부가 기회 있을 때마다 공언해 왔던 민정이양 공약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라면서 특히 재야 원로정치인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는데, 참고로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던 그 해(1961년) 8월 12일부터 1963년 2월 27일 사이에 있었던 박정희 의장의 공언(公言」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1. 8. 12 : 1963년 5월 총선거를 거쳐 민정이양을 하겠다.
1962. 1. 12 : 민정이양은 약속대로 지키겠다.
1962. 2. 20 : 혁명목표가 미달해도 정권이양 공약을 실천하겠다
1962. 12. 27 : 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활동을 허용, 4월 초 대통령 선거,
5월 하순 국회의원 선거. 8월 중 민정이양 선언.
1963. 2. 27 :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정국수습 선서식에서 민정불참과 정치활동 금지 전면 해제를 선서.
그런데 박 의장의 그러한 성명에 대해 그 당시 언론계에서는 위기의식 극복을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말하면서 그 배경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즉 혁명주체세력의 민정불참과 군 복귀 등을 골자로 한 박정희 의장의 그 2·27 선서가 있은 후 더욱 거세진 야당의 공세와 정국의 혼란, 그리고 더욱 심화된 혁명주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충격요법이라는 것이었고, 또 그러한 조처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태, 즉 3월 11일에 발표된 일부 주체세력의 반혁명 음모 사건과 3월 12일 저녁 수십 명의 군 장교들이 장충동 의장공관으로 몰려와 민정에 참여하거나 군정을 연장해 달라고 건의했던 일, 그리고 3월 13일 밤 장충동 의장공관에서 회동했던 몇 몇 최고위원들 가운데 일부위원이 사태수습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자고 주장했던 일 등이 그 명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3월 13일 밤 장충동 의장 공관에서 제기되었던 계엄령 선포와 관련된 그 주장의 배경과 그러한 주장에 반대했다가 그 다음 날 국방장관직을 사퇴하고 말았던 박병권(朴炳權) 장군의 사퇴에 얽힌 얘기도 아울러 적어 두고자 한다.
즉 그 날 밤 의장 공관에 모였던 사람들은 박병권 국방장관과 김재춘(金在春)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 최고회의 운영위원장, 김용순(金容珣) 내무위원장, 그리고 뒤늦게 기별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던 본인 및 신직수(申稙秀)의장 법률고문 등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김형욱 운영위원장은 그 전 전날에 발표된 반혁명 음모사건 등으로 더욱 심화된 주체세력들 간의 반목과 알력, 그리고 소란스러운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계엄령을 선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병권 장관은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약속한 박 의장의 민정이양 약속을 위약하는 행위가 될 뿐 아니라 국민생활에 불편을 주는 것이므로 난국수습을 위한 최선책이 아니라며 반대의사를 표명 했다.
그리하여 찬반양론을 가지고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까지 의견교환을 하다가 아무런 결론 없이 공관을 물러 나오고 말았는데, 그 다음 날 아침 내가 출근을 해 보니 뜻밖에도 최고회의 건물 앞 뜰에 상당수의 무장군인들이 집결해 있다가 내가 사무실로 올라가고 있는 동안 "계엄령을 선포하라! 박병권 장관 물러가라!"고 외치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는 최고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군인들인 것 같았고, 일부는 수방사(首防司)소속 군인들로 여겨진 그 군인들이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박 장관을 규탄하기 위해 집결한 것으로 판단하고 때마침 최고회의에 나와 있는 김진위(金振暐)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최고회의 광장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김 장군이 그 현장으로 내려가서 일장의 훈시를 한 다음 그 무장군인들을 해산시켰는데, 결국 그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박병권 장관은 스스로 장관직을 사퇴하고 말았고, 당시 인천중공업 사장으로 있던 김성은(金聖恩)장군이 그 후임장관으로 임명이 되었다.
한편 3·16성명이 발표되자 미국 정부는 군정의 연장을 취소할 것을 촉구하며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했는데, 그 압력의 일환으로 미국 정부는 그 동안 한국을 최대 수혜국(受惠國)으로 대우하며 지원해 준 PL480호(미국 잉여 농산물 무상원조 규정)에 의거한 식량원조를 격감시키는 조처를 취함으로써 5·16혁명 후 계속된 흉년으로 가뜩이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진 한국 정부의 처지를 더욱 난감하게 했다.
보릿고개에 접어들어 있던 그 무렵 농촌에서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근근이 연명해 나가는 절량농가(絶糧農家)가 수없이 많았고, 서울에서도 얼마나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던지 "쌀은 구했소?" 하는 말이 수인사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혁명정부에서는 부득불 주한 미국대사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한국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 발라고 요청했는데, 그 때 버거 대사를 만나러 갔던 사람은 대통령 권한대행 비서실장으로 있던 이동원(李東元)씨와 법사위원장으로 있던 나였다.
그런데 혁명정부의 그러한 요청에 대해 버거 대사는 친절한 말로 "잘 알았다."고 응대했으나 그 결과는 누군가가 말했듯이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양(매회 약 5만~10만 톤)을 공급해 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어느 날 내가 박 의장 공관에서 박 의장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쌀과 관련된 일화인데, 그 후 나는 그 얘기를 모 일간지의 기자에게 소개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그 얘기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즉 어느 날 장충동 공관으로 박 의장을 찾아온 박 의장의 대구사범학교 동창생인 서정귀(徐廷貴)씨(前 국회의원)가 "요즘 식량난이 매우 심각한데 자네는 식량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고 걱정스럽게 묻기에 박 의장은 "우리 집사람(육 여사)이 시장에 나가서 구해 오는데 어떤 때는 겨우 한두 되씩 팔아 오는 모양이더라."고 했더니 서정귀 씨는 "자네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 쌀이 즘 있으니 몇 가마 보내 주겠다고 하더라는 것. 그런데 그 친구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은 박 의장은 정색을 하며 그 친구의 집에 있는 쌀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 본 다음 그 양이 약 50가마가 된다고 하자 "자네가 진정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나를 위한다면 자네가 가지고 있는 그 쌀을 전량 시장에 내다 팔아 줄 수 없겠는가."고 하자, 그 친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다가 "잘 알았네." 하곤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수일 후 재차 장충동 공관을 찾아왔던 그 서정귀 씨는, "나는 자네와 같이 애국적이고 훌륭한 친구를 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고 했고 또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는 자네의 그 마음에 머리가 숙여진다."고 말한 다음 그 날 집으로 들어가는 즉시 그 쌀을 전량 시장에 내다 팔고 나니 정말 기분이 홀가분해지더라는 말을 하자, 박 의장은 "어려운 결심을 해 줘서 정말 고맙네, 자네야말로 나의 진정한 친구일세." 하면서 둘이서 모처럼 좋은 기분으로 약주술을 한 잔 나누었다는 것이었다.
3·16 성명 후 정국의 혼란이 격화되자 재야 지도자들과 최고회의측에서는 혼란스런 정국 수습을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한 대화를 모색한 끝에 3월 19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윤보선(尹潽善), 장택상(張澤相), 이범석(李範奭),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씨 등 5명의 재야 지도자들이 대좌한 5·16군사혁명 후 최초의 조야 지도자회의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날 오후 3시 최고회의 3층 회의실에서 열린 그 조야 지도자 회의에 배석했던 최고위원들은 정치 분야도 함께 담당하고 있던 법사위원장인 나 자신과 외무 ·국방위원장 김희덕(金熙德). 내무위원장 김용순(金容珣), 재무위원장 유양수(抑陽洙)위원 등 5명의 상임위원장들과 그 밖의 수 명의 최고위원들이었다.
그런데 약 2시간에 걸친 그 조야 지도자 회의에서 재야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3·16성명의 철회를 촉구하는 한편 박 의장의 원대복귀와 군정의 연장을 반대했고, 박정희 의장은 국민의 지탄을 받는 구정치인이 정치 일선에서 자진 사퇴하면 그럴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재야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3월 말까지 군정연장을 위한 국민투표를 유보하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조야 지도자회의는 비록 뚜렷한 결론은 없었지만 쌍방간의 의중을 타진하고 대화를 통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 후 조야간에는 걷잡을 수 없는 격돌이 벌어져 혼란한 시국을 더욱 어지럽게 했는데 조야간의 격들은 이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가 2년이 겅과되고 또 민정이앙이 추진되고 있는 마당에 5·16 혁명 그 자체와 혁명정부를 부인하고 군의 단결을 와해시키려는 허정(許政)씨의 발언이 21일 경향신문(京鄕新聞)석간에 보도됨으로써 그 기사를 읽은 최고위원들이 격분을 했던 나머지 김형욱 운영위원장이 의장의 승락을 받아 김성은 국방장관과 당연직 최고위원인 각 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등이 참석한 긴급회의를 소집한 끝에 허정 씨의 그와 같은 발언을 묵과할 수 없으니 그 다음 날(22일) 국방부에서 장성급 이상의 전 지휘관이 참석한 각 군 비상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최고회의에 대한 군의 지지를 표명하고 군의 단결을 저해하는 어떠한 발언도 배격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각 군에서는 그 날 밤 중으로 이용 가능한 모든 통신수단을 총동원하여 비상 지휘관 회의 소집을 위한 통신문을 발신토록 했고, 또 그 통신문을 받은 장성급 이상의 각 군 지휘관들은 항공기와 선박 등 이용가능한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그 다음 날의 비상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대장급 이상의 각급 지휘관들은 추후 서면을 통해 그 비상 지휘관 회의에서 채택한 결의문을 지지하게 됨으로써 군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결국 22일 11시에 개최된 비상 지휘관회의에서 그러한 결의문을 채택했던 160여 명에 달하는 각 군 지휘관들은 회의가 끝난 후 별판이 붙은 97대의 지프차 또는 세단차에 분승하여 동자동에 있는 국방부에서 청와대까지 마치 차량 퍼레이드를 벌이듯이 약 300미터 길이로 늘어선 채 서행하여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하고 있는 최고회의 의장에게 그 날 그 비상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지휘관 전원이 서명한 결의문을 전달함으로써 군의 충성을 맹세하고 군의 단결을 과시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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