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1) 미국에서 받은 전문
1963년 2월, 당시 해병대사령부 행정참모부장으로 재임 중에 있던 나는 미국 해병대의 초청으로 제1상륙사단장 공정식 소장과 김연상, 박종남 대령 등과 함께 미 해병대를 방문하기 위한 시찰 여행길에 올랐는데, 그 방미 여행 도중 나는 현지 공관(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으로부터 나 자신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 시찰단 일행이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시기는 2월 초순경이었고, 방문을 했던 미 해병대의 부대들은 워싱턴DC에 있는 미 해병대사령부와 캠프 레준에 있는 2사단과 신병훈련소, 캠프펜들턴에 있는 1사단과 그 인근에 있는 항공사단 및 29팜에 있는 보급기지 등이었다.
그런데 3월 초 방문 일정을 거의 끝마치고 귀국을 위해 다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그 곳에서 우리 일행이 탑승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 곳 총영사 내외가 반가이 나를 맞으며 최고회의에서 보내 온 전문과 최고위원 임명 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1963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를 나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 전문 내용을 보니 1963년 2월 21일부로 내가 국가재건회의의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었다는 발령 소식이 담겨져 있었고, 그 말미에 전문을 수령하는 즉시 귀국하라는 내용도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고위원 대폭경질이란 표제하에 크게 보도된 그 기사내용을 일별한 즉 김희덕(육군), 강기천(해병), 김용순(육군), 박두선(공군), 박영석(육군), 박현식(육군), 장지수(해군)등 7명의 현역장성들이 새로운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어 있었고, 그 7명의 위원 중 김희덕 장군은 외무위원장에, 본인은 법사위원장, 김용순 장군은 내무위원장, 박두선 장군은 교체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면에는 4명의 위원이 원대복귀하고 김재춘 위원이 정보부장으로 임명되는 등 대폭적인 경질에 수반된 중요한 인사이동이 동시에 단행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러한 개편이 있게 된 그 배경에 관해서는 별도로 언급키로 한다.
한편 내가 그 전문을 접수했을 때 우리 시찰단 일행의 시찰여행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2~3일 후에는 귀국의 길에 오를 수가 있었는데, 귀국할 때도 역시 하와이를 거치게 된 우리 일행은 미국으로 갈 때 그 곳에 기착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환대를 받았다.
즉 귀국 시 우리 일행이 합승한 항공기가 하와이 상공에 이르렀을 때 그 공항에 나와 있는 군악대와 의장대 등 요란한 행사부대와 인파가 들끓고 있는 것을 본 나는 필시 무슨 행사가 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그 행사부대와 인파가 우리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출영객이란 사실을 알고 내심 얼마나 기이하게 생각했던지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공항에 나와 있던 그 출영객들은 처음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미 태평양함대 해병대사령부의 군악대와 의장대, 그리고 그 의전부대와 참모들을 대동하여 그 곳에 나와 있는 함대 해병대사령관 로버트 중장 내외 및 현지 교민사회의 유지들이었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로버트 중장 내외는 우리 일행의 목에 화환을 걸어 준 다음 공정식 장군과 나에게 의장대를 사열하게 하는 등 극진한 환대를 베풀어 주었고, 또 그 날 저녁에는 현지 주둔 미 태평양전구(戰區) 사령관(해군대장)이 주재한 성대한 환영리셉션을 겸한 만찬회에 참석했는데, 그 저녁 모임에는 약 300명의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함께 초청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녁 교민 대표들이 베풀어 준 김치깍두기 및 불고기 파티에 참석하여 교민들과 우의도 나누고 교민사회의 실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우리 일행은 기착 3일째 되던 날 아침 귀국의 길에 올랐는데 그 때에도 부인과 함께 나와 우리 일행을 전송해 준 로버트 중장은 나에게 이런 희망을 피력했었다.
즉 그 해 4월 초 한국을 방문할 때 해병대사령부와 최고회의도 예방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 했었는데 그 후 그가 예정대로 내한하여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나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그를 최고회의로 초치했고, 최고회의에서는 부의장 이주일(李周一)장군이 의장을 대신하여 그에게 한국 정부가 수여하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내가 최고회의에 부임했던 날짜는 3월 11일이었다.
나와 함께 최고위원으로 임명이 된 다른 6명의 장성들은 그 때 이미 취임선서를 마치고 최고회의에서 근무 중에 있었으므로 최고회의 의장에 대한 나의 취임선서는 그 날 본회의장에서 나 혼자서 했다.
그 당시 최고회의는 혁명주체세력이 아닌 7명의 현역 장성들을 대폭 최고위원으로 임명하기에 이른 그 엄연한 사실이 입증하듯이 그 구성맴버들인 혁명주체세력들의 반목과 알력이 심화되어 체질재선을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최고회의 내부의 그와 같은 갈등과 반목현상은 특히 1962년 말 사전조직이 된 공화당(共和黨)의 모습이 드러나면서부터 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갈등의 요인은 일부 위원들이 주동이 되어 극비리에 공화당을 사전조직(事前組織)하자 배신감과 소외감을 느낀 일부 위원들이 민정이양(民政移讓)시 대세를 잡기 위한 포석인 것으르 판단하고 반발을 함에 따라 조성된 것이었는데, 결국 그러한 갈등은 일부 주체세력이 오월동지회(五月同志會)를 결성하여 범국민 정당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고, 또 일부 세력에 의한 이른바 그 반혁명(反革命) 음모사건이 적발되는 등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을 때 단행된 그와 같은 대폭적인 개편 조처는 당시의 언론들이 지적했듯이 그러한 갈등 속에서 최고회의를 떠난 상당수 위원들의 공백을 최소한 메움과 동시에 그러한 개편 조치를 통해 최고회의의 약화된 체질 개선과 실추된 권위회복을 도모하려 했던 박정희 의장의 비상한 결심을 반영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사개편을 단행하기 위해 박정희 의장은 전례(前例) 없이 각 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과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쳐 특히 중도적(中道的)인 인물을 선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법사위원장으로 부임한 직후 나는 김현철(金顯哲) 내각수반과 조진만(趙鎭滿) 대법원장을 인사차 방문했었는데, 내각수반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유창순(柳彰順) 경제기획원장관과 이석제(李鐵濟) 총무처장관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대법원장실을 방문하여 대법원장 이하 여러 대법관들과 인사를 나누고 브리핑을 청취한 다음 잠시 환담을 나누었던 나는 민복기(閔復基) 법무장관의 안내로 소년원과 서대문형무소를 순시하여 현황을 청취하고 수감자들의 수감실테를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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