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4) 박 의장의 지방 순시
농번기로 접어들고 있던 1963년 초여름(6월)어느 날 나는, 1일간의 일정으로 계획되어 있던 박 의장의 전북 도청 순시 나들이에 수행원의 일원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 날 박 의장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나 외에도 이후락(李厚洛) 공보실장, 박경원(朴敬遠) 내무장관, 박종규(朴種圭) 경호실장 등 측근인사들과 20~30명의 기자들과 경호원 등 상당수의 인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철도청에서는 2개 량의 대통령 전용기동차를 운행했는데, 앞 차량에는 기자들과 일부 경호원이 탑승하고 뒷차량에는 박 의장과 측근 인사들이 함께 탑승했다.
그 날 박 의장이 전북 도청을 시찰했던 목적은 전북 지방의 식량증산계획과 사방(砂防)공사, 녹화사업(綠化事業)등을 직접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는데, 전북 도청에 들러 알아보고자 했던 사항들을 브리핑과 자신의 질문을 통해 직접 알아본 박 의장은 그 날 오후 2시경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전주역을 떠난 기동차가 이리역에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즉 가는 도중 잠시 김제(金堤)군청에 들러 김제군의 식량증산계획을 살펴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땐 이미 우리가 탄 기동차보다 약 10분 먼저 전주역을 떠난 기자들과 경호원들이 탄 기동차가 이리역을 통과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각하 기자들과 경호원들은 어떻게 하지요?" 했더니 박 의장은 "그 친구들은 벌써 이리역을 통과했을 테니 먼저 서울로 올라가게 하고 우리끼리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그 기동차는 이리역에서 한 정거장 남쪽에 있는 김제역에 정차하게 되었고, 차에서 내린 박 의장을 비롯한 4명의 수행원들은 도보로 군청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는데, 가는 도중 전방에서 질주해 오고 있는 운전기사만 타고 있는 검정색 경찰 지프차가 있기에 내가 그 차를 세워 일행을 김제 군청까지 안내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 기사는 친절하게 내 부탁을 들어 주었다.
차가 당도한 곳은 군청 후문 쪽에 있는 군수실 옆이었다. 예고없는 비공식 방문이었으므로 굳이 군청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후문으로 들어가게 해서 군수실 옆 공지에 정차시킨 것이었다.
의장께서 차에서 내리자 나는 그 공지 쪽으로 나 있는 옆문으로 해서 군수실로 들어가 내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박 의장께서 와 계시니 속히 나가서 안으로 모시라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며 밖으로 나가 박 의장에게 큰 절을 올리고 그 뜻밖의 귀빈들을 군수실로 맞아 들였다.
그런데 군수가 권한 자리에 좌정한 박 의장은 얼마나 얼어 붙었던지 수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선 자세로 굳어 있는 군수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면서 "김제 평야에서 수확되는 곡식이 강원도 전체의 수확량과 맞먹는 양이라고 하던데 긴장하지 말고 곡창지대인 김제군의 식량 증산계획에 대한 브리핑이나 한 번 해 달라."고 하자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성 싶었다. 그러나 워낙 어려운 처지가 되어서 그런지 군수는 받아 든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있기에 내가 라이터를 켜서 담배를 피우게 한 다음 브리핑을 하게 했다.
어려운 분들 앞에서 브리핑을 하게 된 김제 군수는 여전히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으나 잘 준비된 브리핑 차트와 기본운영계획 상황판 등을 이용해서 브리핑을 썩 잘 해 나갔고, 간혹 길다란 지시봉으로 벽면에 붙어 있는 기본운영계획 상황판의 필요한 대목을 빈틈없이 잘 짚어 대는 것으로 보아 모든 상황을 숙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특히 박 의장이 관심을 표명한 김제군의 식량증산과 사방공사와 관련된 계획이 썩 잘 돼 있었으므로 브리핑이 끝난 뒤 박 의장으로부터 브리핑을 잘 해 줘서 고맙다는 칭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박 의장은 김제 군수에게 이러한 당부도 했다. 즉 식량증산계획과 관련된 연구를 좀 더 깊이 해 두었다가 가까운 시일 내에 군수가 직접 청와대에 와서 한 번 더 브리핑을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박 의장의 그와 같은 당부는 그로부터 10여 일 후에 실행이 되었고, 또 맡은 바 소임을 훌륭하게 완수했던 그 김제 군수는 그 후 서울 시청으로 전보되어 중용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그 날 오후 예고없이 김제 군청을 방문했던 박 의장은 그 길로 곧장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금산(錦山)으로 향했다. 기동차가 김제역을 떠난 직후 박 의장은 나에게 모처럼 이곳까지 왔으니 금산(錦山) 군청에도 잠깐 들러 보고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기동차에 설비되어 있는 무전기로 충남 도청에 연락을 취하게 해 놓고 기동차를 논산역 동북방에 있는 연산역에 정차시키도록 했다.
조그마한 시골역인 연산역에서 하차한 박 의장과 수행원 일행은 충청남도 부지사(지사는 해외여행으로 부재)가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 한 대와 검정색 지프차에 분승하여 금산 군청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전 연락이 취해진 그 금산 군청에서는 군수가 상황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던 탓인지 브리핑이 너무 미숙하여 박 의장이 현재 사방공사를 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면서 금산군의 사방공사 현황을 설명해 보라고 했으나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고, 또 길다란 지시봉을 손에 들고 벽에 붙어 있는 기본운영계획 상황판을 짚어 가며 현황을 설명하던 도중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는 몰라도 간혹 엉뚱한 데를 짚어 대는 바람에 노기가 치민 박 의장이 지시봉을 쳐들고 있는 그 유난히 흰 군수의 손이 못마땅하게 여겨졌던지 "군수, 자네 손이·왜 그렇게 흰가?" "사방공사장에는 몇 번이나 나가 봤는가."하며 힐책을 했는데, 어떻게나 그 자리가 민망스럽게 여겨겼던지 슬쩍 밖으로 나온 나는 산림계장을 찾아 사방공사에 대한 현황을 알아본 다음 그 담당계장으로부터 입수한 계획서를 박 의장에게 보여 드리면서 군수가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당황을 해서 그렇지 실은 사방공사에 대한 계획이 이렇게 잘 돼 있고, 또 현재 사방공사를 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 어디라고 설명을 했더니 그제야 노여움이 걷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 날 신문지상에는 "군수, 자네 손이 왜 그렇게 흰가?"라는 글자가 또렷한 제서(題書)가 되어 적혀 나옴으로써 한동안 유행어처럼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 후에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6개월 전에 금산 군수로 부임했던 그 군수는 그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사방공사장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한편 금산 군청에서 브리핑을 청취한 후 박 의장은 금산군 금성면(錦城面) 의총리(義塚里)에 있는 칠백의총(七百義塚)을 둘러보고 또 한 차례 격분을 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때 금성산(錦城山)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의병장(義兵將)조헌(趙憲),승장(僧將) 영규(靈圭), 참봉 이광륜(李光輪)을 비롯한 칠백의사(義士)들의 유골을 안치한 묘소이다.
한데, 길이 나빠 지프차를 타고 그 묘소에 이르고 보니 묘봉은 찌그러져 있는 상태였고, 볼모양 사나운 그 무덤 위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그리고 그 무덤 언저리에 세워져 있는 석물(石物)들은 깨어진 상태에서 모두가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그와 같은 현장을 목격하게 된 박 의장은 칠백의사들의 위패를 모신 다 쓰러져 가는 사당(從容祠)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재배를 했다. 그런 다음 충남 도청의 전갈을 받고 그 곳에 모여 있는 lO여명의 유림(儒林)들과 군수, 부지사(副知事) 및 도청 직원들 앞에서 "이게 뭐야!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을 이렇게 모시다니‥‥,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이럴 수가‥‥, 후세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하면서 격분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부지사가 구구한 변명을 늘어 놓으려고 했으나 박 의장의 더 큰 분노를 살 것 같아 내가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의장은 이런 제안을 했다. 즉 반은 의장이 낼 데니 반은 도(충청남도)와 내무부에서 내어 칠백의총을 복원하여 선열들을 잘 모시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왜정 때부터 황폐화해 있던 그 칠백의총은 1963년 그 해에는 7만 5천여 평방미터로 그 묘역이 넓혀지는 가운데 묘역의 정화작업이 이루어졌고, 1968년에는 1574년(仁祖 25년)에 건립된 칠백의사의 신위(神位)를 모신 그 종용사(從容祠)의 재건과 묘역의 조경사업, 그리고 1976년에는 기념관과 칠백의사의 순의탑(殉義塔) 및 관리사무소 등을 차례로 건립함으로써 결국 박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그 유서 깊은 칠백의총의 사적지를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게 되었는데, 복원공사가 마무리 된 후에 거행된 그 해의 칠백의사 제향(祭享)행사 때에는 박 대통령께서 몸소 그 행사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그 날 오후 칠백의총을 둘러본 일행은 그 곳에서 무주(茂朱)로 향했으나 길이 워낙 험해 1킬로도 채 못 간 지점에서 차량을 되돌려 기동차가 대기 중인 연산역으로 돌아와 대전으로 향했는데, 대전으로 가던 도중 "시간도 늦었고 몸도 피곤하니 유성에 가서 하룻밤 유하고 가자."고 한 박 의장의 뜻에 따라 일행은 대전역에 하차하여 유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유성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즉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나는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고 하기에 나가 遣더니 칠백의총에서 만났던 그 충청남도 부지사가 그 곳에 와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도 칠백의총을 처음 가 봤다고 실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사죄드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박 의장에게로 안내하여 그 뜻을 직접 표명하도록 했더니 그를 맞은 박 의장은 잘 왔다고 하면서 손수 술을 한 잔 따라 주며 열심히 노력하라고 했는데, 그러한 정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새삼 저 어른이 공사(公私)도 분명하고 인정도 많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날 한밤중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던 박 의장과 수행원들은 호텔 밖에서 들리는 시끌시끌한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그 날 오후 김제역을 먼저 통과하여 그 길로 대전을 거쳐 곧장 서울로 직행하고 말았던 선행 기동차의 탑승자들(기자들과 경호원)이었다.
그들은 계획된 당일의 스케줄이 전북 도청 순시뿐이었으므로 그길로 곧장 상경하고 말았던 것인데, 서울역에 도착하여 박 의장이 탑승한 기동차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도착을 하지 않자 필시 딴 곳으로 간 줄 알고 행방을 추적한 끝에 밤늦은 그 시각에 그 호텔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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