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14) 명당집 자손들?

머린코341(mc341) 2015. 5. 9. 18:03

 

 

매설 된 지뢰의 폭파 현장    

 

(제 1화) 27중대 공병 김 해병 얘기


6월로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저녁 대대본부로부터 27중대로 하달 된 작전 명령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내일 아침 08시 30분 1번 국도와 3번 국도가 접하는 지점. 좌표 000 000에서 미 해병대 공병대와 합류 할 것. 이미 폐쇄된 3번 국도의 5km지점 좌표 000 000에 위치한 교량 아래 미 해병대 아메리칼 사단 소속의 탱크 한대가 어제 작전 중 좌초되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음. 특히 탱크를 견인하는 탱크를 동반 할 것이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비니 정찰 및 호위 임무에 최선을 다할 것**


다음 날 아침 27중대 병력 중 120여명의 대원들은 트럭을 타고 청룡도로와 538번 도로를 지난 다음 1번 국도를 따라 북상을 잠시 하다 3번 도로가 접하는 합류 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13명의 미 해병대 공병 소속 대원들과 우람하게 생긴 견인탱크 한대가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때는 이 부근에 청룡 제 1대대 3중대가 주둔을 해 작전 차 지나칠 때면  반가운 생각도 들었는데 지금은 작전상 적절치 못하다 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기 때문에 매우 섭섭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 날은 우리 소대가 첨병 소대가 되었기 때문에 합류 지점으로부터 먼저 3번 도로에 진입을 해 사방을 두리번거려가며 상황을 판단해 보아야 했다.

 

비포장도로의 폭은 겨우 2차선에 불과했고 언제 폐쇄가 되었는지 도로 위에는 잡초들만 무성할 뿐 인적조차 끊어져 마치 유령의 도로 같은 느낌이 얼른 들기도 했다.


더구나 길 양 옆으로는 길섶을 두고 나무들이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가 우리의 경계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맨 앞에는 미 해병대 공병들이 지휘자 외 무려 12명이나 귀에다 지뢰탐지기의 리시버를 꽂은 채 천천히 전진을 하고 그 뒤는 미 해병대 아메리칼 사단의 견인 탱크가 따랐다.

 

그리고 우리 중대는 견인 탱크의 좌우로 병력을 갈라 길게 대열을 짓고 길 바깥의 숲을 경계하며 선두 미 해병대 공병들의 바로 뒤에 선 첨병들에 의해 천천히 전진이 유도 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목적지가 5km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좌초 된 탱크가 있다는 파괴 된 교량을 볼 수 있는 데까지 오는데 만 무려 3시간을 허비해야했고 중대장은 12시가 아직 멀었는데도 미 해병대 공병 책임자와 의논을 한 뒤  먼저 제자리에서 점심 식사부터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리 소대는 재수가 없어 그런지 맞은편에 있는 다른 소대처럼 도로 가가 넓고 그 뒤로는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대나무들만 빽빽이 차 있는 곳에다 그늘도 시원치 않은 것은 물론, 대나무의 가시들이 곧잘 살을 찌르는 매우 불편한 곳에 자리를 해 점심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뙤약볕을 쪼이며 철모를 깔고 앉은 채 전령이 따주는 씨레이션을 몇 수갈 입에 넣고 있었다.

 

“꽝~!!!!!!” 난데없는 폭발음이 바로 옆에서 귀를 찢는 듯 들리더니 곧 하늘로 치솟은 엄청난 흙가루들이 대나무 가지를 스쳐 내려오며 “쏴르르”하는 소리를 냈다.


우선 나는 먹던 깡통을 손으로 가리고는 잠시 긴장을 했으나 즉시 총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교전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잠시 후 흙가루를 피하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이곳저곳의 대나무가지에는 벌써 불에 탄 작은 천 조각들이 사뿐히 걸린 채 마치 전사자의 혼령처럼 미풍에 나풀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우리는 나중에 사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지만 현장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우리 중대 관측장교 이 소위로부터 들었던 그 비극의 진행은 매우 운명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우리 1소대원 모두가 점심을 먹을 장소가 못 마땅해 이리저리 헤매는 동안 어떤 한 미 해병대 공병이 내가 위치했던 전면 도로의 정 중앙에서 지뢰탐지기에 잡히는 어떤 의심되는 물체를 발견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담배 곽을 의심나는 곳에다 얹어 표시를 하고 다른 한 명의 동료로부터 지원을 받아가며 송곳처럼 생긴 도구로 혹시 지뢰일지도 몰라 뇌관이 부착되지 않는 부분을 찾느라 45도 각도로 찔러보는 확인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한편 우리 반대편에 있던 다른 소대 병력들은 풀 섶 안쪽에서 이미 산개해 점심을 먹기 시작했던 터였고 이 때 마침 그 광경을 약간 먼 거리에서 보고 있던 이 소위는 자기 옆에서 아직 점심을 먹지 않고 앉아있는 우리 중대 공병인 김 해병을 발견하고는 “야! 너도 가서 도와줘야지”하고 말을 했더니 갑자기 그 김 해병이 주저앉은 채로 “엉~엉~”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 소위는 하도 기가 막혀

“야! 도와주라고 했는데 울기는 사내 녀석이 왜 울고 앉아있어!”

하고 꾸중을 했더니 김 해병은 더욱 소리를 더 크게 내며 울음을 멈추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순간 미 해병대 공병이 뇌관을 잘 못 건드렸는지 그만 “꽝~!!!!!”하고 엄청난 대전차 지뢰가 폭발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곧 이 소위는 김 해병에게 다가가 끌어안다 시피 하고는

“야 임 마! 너 정말 잘 안 갔다. 그래 니가 명당 집 자손이다”


하고는 위로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다.

 

김 해병은 우리 중대에 파견 나온 공병이었는데 평소 매우 씩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한양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병대에 입대했던 모범적인 데가 많은 사병이었다.


그 당시 김 해병의 솔직한 말은 이 소위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하던 미 해병대 공병 쪽으로 가 도움을 주려고 일어서려 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다리에 힘이 없어 일어서지지를 않아 명령은 들어야겠고 몸은 마음처럼 되지를 않는 가운데 그저 울음만 자꾸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불행했던 일은 폭발이 너무 강해 그 부근 풀 섶 가까이에서 마침 점심을 먹고 있던 다른 소대원 두 명이 숲 속으로 날라 가 죽어 있는 것을 한참 후 인원 점검을 할 때서야 비로소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대편의 편안하고 쉬기 좋은 풀 섶과 소나무들 대신 우리는 몸을 그늘에 가릴 수도 없고 편히 앉아 점심을 먹을 수도 없었던 대나무 숲에 있었지만 오히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소대원들은 “역시 인명은 재 천”이라는 말을 하며 서로가 수군거렸다.


(제 2화) 포병 연락장교들 얘기


이것은 포병 연락장교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얘기며 내가 월남에 파월되기 전 추라이 지역에서 일어났었던 실화다. 


원래 우리 포병장교들은 각 군청마다 연락 장교의 임무를 띠고 소위 고문단실이라는 곳에 파견 근무를 나갔다.

 

물론 그 곳에는 미군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군청 자체는 월남의 정규군들이 장악 해 보통은 소령들이 군수의 직책을 수행하는가 하면 자체 방어는 정규군의 지휘 아래 민병대가 주로 맡고 있는 것이 군청마다의 공통 된 특징이었다.


1967년 8월 추라이 지역에 있는 빈손군의 군수는 청룡부대에서 파견 나온 포병 연락장교 이 중위로 인해 무척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걸핏하면 자기 부하들을 불러 세우고는 인사를 안 한다고 심하게 구타를 하는 통에 더 이상의 인내를 감내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군수는 마침내 청룡부대(여단)본부에 항의를 하게 되었고 결국 이 일은 포병대대장의 몫이 되고 말았는데 화가 난 포병대대장은 즉시 이 중위를 전출 시키는 한편 이번에는 손 대위를 빈손 군청의 연락 장교로 인사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손 중위는 또 누구 못지않게 터프한데가 많은 사람이라 부임 도중 미군이 자기에게 인사를 안 했다고 주먹으로 얼마나 때렸던지 그만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미군 헌병대에 구속이 되는 수난을 격어야만 했다.


포병대대장은 그만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말 할 수 없는 고충을 겪어야 했고 그렇다고 연락 장교의 공석을 그대로 둘 수는 없어 이번에는 또 다른 장교인 박 대위를 즉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9월경. 적들은 빈손 군청을 불시에 공격을 해 점령을 했고 이로 인해 그 당시 아군은 거의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의 불행을 맞았다.

 

뒤늦게 발령을 받았던 박 대위도 이 때 안타까운 최후를 맞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후 이 일은 못내 포병 장교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처음 문제를 일으켰던 이 중위는 내 동기생이며 세월이 흐른 후 결국 훌륭한 장군이 되어 예편을 했는데 지금도 이 일을 두고 곰곰 생각 해 보면 실로 세상사를 “세 옹 지마”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중위와  손 중위를 두고 “명당 집 자손”이라고 불러야 할지? 실로 망설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빈손군청에서 연락장교의 임무를 수행하시다 안타깝게 전사하신 박 선배님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