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혁명과 해병대
혁명 전야
1. 합동작전회의
해병대는 거사 준비를 모범적으로 하고 있었다.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출동부대로 내정한 오정근(국세청장 역임)중령의 대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5월초에 보전포 협동훈련을 실시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작전참모는 "보전포 훈련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고 반대했다. 김윤근은 "군단장과 인접 사단장을 모시고 훈련시범을 가지려는 것이니 비좁더라도 여단 지역내에서 장소를 물색해보라"고 지시했다.
보전포 훈련이 오정근 대대 중심으로 끝나자 김윤근 여단장은 이 대대에 대해서 야간 기동훈련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장교들은 훈련이 오정근 대대에 집중되는 걸 보고는 기합을 받고 있다고 생각 했다. 오정근 대대는 중대 단위의 도보훈련만 해오다가 대대 규모의 차량 이동훈련을 받게 되었다.
김윤근 여단장은 김포 가도를 현지시찰했다. 비포장에다가 노면이 울퉁불퉁하고 웅덩이도 있어 야간 기동에 장애가 될 것 같았다. 그는 해안 중대와 공병 중대를 동원하여 길을 보수했다. 해병대가 5월16일에 모범적으로 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5월14일은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이날 아침, 영천에서 상경한 한 웅진 육군 정보학교장이 신당동 박정희 집에 들렸다. 한 준장의 임무는 거사 당일 박정희의 경호와 수행이었다. 이때 이틀 전에 경찰에 연행, 구속된뒤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에 대해 추궁을 받고 있던 김덕승의 처가 찾아왔다. 남편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한웅진은 "며칠 참으면 절로 해결될 터이니 기다려주세요"라고 달래보냈다. 박정희, 한웅진 두 사람은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한 웅진은 박정희의 호위병으로 데리고 올라온 부하들이 묵고 있는 화신 옆 미화 호텔로 돌아갔다. 박정희는 집을 나와 약수동으로 향했다.
서울 약수동 김종락(김종필의 형)의 집에 아침부터 평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검은 색 안경을 낀 이들이 많아 장교들임을 짐작케 했다. 은행 간부이던 김종락은 집안의 아이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보냈다.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 늦을까봐 일찍 출발했는데 회의 시간 10시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한꺼번에 오면 이웃에서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근처 다방에서 3, 4명씩 모였다가 들어오곤 했다. 참석자들은 박 정희 소장과 김동하 예비역 해병소장, 김종필을 비롯하여 25명.
공수단: 단장 박치옥 대령, 대대장 김제민 중령.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6군단 포병단: 6군단 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대대장 신윤창 중령, 대대장 구자춘 중령, 대대장 백태하 중령, 대대장 정오경 중령, 대대장 김인화 중령.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김포 해병여단: 여단장 김윤근 준장, 대대장 오정근 중령, 부연대장 조남철 중령,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
특수임무 담당자: 오치성 대령, 옥창호 중령, 김형욱 중령, 이석제 중령, 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
박정희가 간단한 인사를 했다. 이어서 쿠데타군 출동계획의 입안자인 박원빈 중령이 각 부대의 임무와 출동시간을 설명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선두부대 공수단. 점령목표는 반도 호텔과 총리실.
제2대 해병여단. 목표는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제3대 33사단. 시청앞, 덕수궁에 집결. 점령 목표는 KBS제1-제 2방송국과 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국, 중앙전화국.
제4대 30사단. 점령 목표는 중앙청, 청와대, 시경 탄약고, 서대문 및 마포 형무소, 연희 송신소.
제5대 6군단 포병단. D데이 H아워인 5월16일 새벽 3시보다 40분 뒤까지 육본 광장에 집결하여 예비대의 역할을 한다.
요인 체포 등 특수임무를 맡은 장교들은 16일 새벽 2시30분에 영등포-김포 삼거리에서 대기하다가 공수부대의 병력들을 인수받아 임무를 수행한다.
제1 지휘소는 6관구 사령부, 제2 지휘소는 남산, 제3 지휘소는 육군본부.>.
원래 박원빈은 한강 서쪽에 위치한 부대가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 순서를 해병여단, 공수단, 33사단으로 제의했으나 김윤근 해병여단장이 반대했다.
그는 해병여단이 가장 먼 곳에 있으니 공수단 뒤로 해달라고 했다. 공수단 김제민 중령은 공수단에 차량이 부족하다면서 스리쿼터 수송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스리쿼터 한 대에 공수단 1개 팀이 타도록 하기위해서였다. 박원빈 중령은 6관구의 차량들을 15일 밤 10시까지 공수단 연병장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김종필이 신문지에 싼 돈을 돌렸다. '집에 양식이라도 사주자'는 취지였다. 해병대 몫은 30만환이었다. 이 합동작전회의가 끝난 뒤 해병대의 네 사람은 따로 모였다. 오정근 대대장 등 세 영관 장교들은 여단장에게 불평했다.
"왜 한강인도교 통과의 선봉을 양보했습니까.".
김윤근 준장은 찬찬히 설명했다.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았소? 우리가 선봉이 되었다가 실패했을 경우, 해병대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소. 또 성공한다 하더라도 해병대가 선봉이었다고 하면 누가 집권해도 해병대를 경계하고 푸대접하게 될것이고, 육군측의 시기와 중상이 첨가되면 해병대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으니 피해야지요.".
합동 작전회의를 마친 뒤 김종필과 이석제, 민간인 김용태는 남아서 문안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혁명공약, 포고문은 김종필이 작성했다. 유승원 대령과 이석제 중령은 국민, 학생, 재향군인, 국군, 유엔군장병 및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이런 문건들을 검토한 뒤 김종필 중령이 박정희에게 가져가 최종 검토를 받기로 했다.
2. 혁명공약 인쇄 이학수사장
5월14일 오후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에선 이상한 풍경이 벌어졌다. 육군 방첩대 산하 서울지구대(506부대) 대장인 이희영 대령과 육군본부 직할 제15범죄수사대(CID) 방자명 중령이 박정희의 집을 방문한것이다. 서울지역의 두 군수사기관장은 박정희의 혁명 모의를 알고 있었다. 이 희영은 전날 밤엔 박정희 소장을 구속하느냐 마느냐로 검찰총장과 논의까지 한 사람이다. 방첩대는 그 순간에도 박정희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었고 미행조를 붙여놓고 있었다.
그런 판에 박정희는 두 사람을 앉혀 놓고는 동석한 혁명파 김동하를 태연히 소개시키고 쿠데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한해 전 이희영 대령이 2군 방첩부대장이었을 때 하던 그 이야기였다.
"군이 한번 나서서 깨끗이 쓸어버린 뒤 병영으로 돌아간 다음에 정치를 감시하다가 마음에 안들면 또 나오면 되는 거야. 이게 버마 네윈 식이지.".
박정희는 날짜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거사가 임박했다는 냄새를 풍겼다.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충분히 설명했다는 암시도 주었다. 방자명이 들으니 박정희는 자신과 이희영을 혁명동지로 생각하는 듯했다. 방자명은 속으로 '무슨 배짱으로 저러나'하는 반발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날 이희영은 박정희에게 전임 506부대장인 이행주 중령의 선처를 부탁하려고 박정희와 잘 아는 방자명을 데리고 갔었다고 한다.
이 중령은 박정희의 집 앞에 군고구마 장수로 위장한 정보원을 배치, 감시하다가 박정희에게 발각되었던 사람이다. 박정희는 "다 지난 일을 가지고 뭘…" 하면서 부탁을 받아주었다. 쿠데타 음모 분쇄의 책임을 지고 있던 이희영은 이 때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막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미리 이중 령의 구명을 부탁해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5월14일 오후 박정희는 바빴다. 이낙선 소령에게 친서를 지참시켜 1군사령부의 장교들에게 전달하도록 보냈다. 대구에 있는 이주일 2군 참모장에겐 "모레 친구의 결혼식이 있어 못내려간다"고 전화로 연락을 했다. 모레, 즉 16일에 거사한다는 뜻이었다.
14일 밤 박정희는 신당동 자택에 머물면서 늦도록 김종필이 가져온 혁명공약, 각계에 보내는 호소문, 포고령 따위의 문안을 검토했다. 자정을 넘겨도 끝나지 않아 다음날 다시 하기로 했다. 밤늦게 문재준 6군단 포병사령관이 방문했다. 지방에 내려갔다가 오전에 있었던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뒤늦게 들러 박정희로부터 지침을 받으러 온 것이다.
이날 밤 공수단 대대장 김제민 중령 집에는 박종규 소령, 차지철 대위등 11명의 팀장(대위)이 모여 장면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반도호텔점령계획을 논의했다. 엘리베이터조, 비상구조, 층계조, 정문조를 편성, 약 70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했다.
다음날(15일) 오전에 김제민, 박종규, 차지철, 그리고 다른 세 대위는 반도 호텔 건너편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갔다. 박종규가 비스듬히 옆면이 보이는 반도호텔의 외부 구조에 대해서 설명했다. 건물 양쪽면에난 철제 비상계단의 하단은 접혀져 있었다. 위에서 비상탈출할 때 펼 칠 수 있게 된 것인데 밑에서 오르려면 로프가 필요할 듯했다.
이들은 이어 반도호텔의 내부를 정찰키로 했다. 먼저 1층에 있는 바로 들어가서 맥주를 한 잔씩 했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맥주잔이 떨어져 깨졌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나는 파열음은 그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누군가가 "장면 정권이 깨지는 소리야"라고 했다.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 위를 오가면서 8층에 있는장면 총리의 집무실과 숙소를 공격할 행동 계획을 짰다.
5월15일은 월요일이었다.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살던 김종필은 아침에 군복으로 갈아입고 신당동 처삼촌 집으로 향하면서 만삭의 아내 박영옥을 향해서 한 마디 했다.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이 거사에서 죽더라도 그놈만은 잘 키워주시오.".
김종필은 언덕배기에서 내려오다가 뒤돌아보았다. 박영옥은 문 앞에 서있었다.
5월15일 오전 11시쯤 서울 종로구 안국동 광명인쇄공사 이학수 사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안경을 쓴 김종필이었다. 이 사장은 일본에 주문한 인쇄기 구입건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김종필은 안경을 벗더니 "내일 미명을 기해서 거사하기로하였소"라고 했다. 이학수는 "제가 맡은 일은 완수하리다. 염려마시오"라고 했다.
"이형, 제가 안내할테니 박 장군한테 갑시다. 이형을 만나자고 합디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신당동으로 달리는 차중 에서 김종필은 이 사장의 손을 잡더니 귀엣말로 "오늘처럼 시간이 안가는 날도 처음이오"라고 했다. 신당동 박정희 장군집에 들어가니 키가 큰 한웅진 육군 정보학교장이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있는 데 박정희가 안방에서 나왔다.
"이형, 잘 오셨소.".
인사를 나누는데 노란 스커트를 입은 육영수가 들어왔다.
"여보, 인사하시오. 이분이 이주일 장군의 친척되시는 이학수씨요.".
박정희는 이학수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옷장 깊숙이 넣어둔 공책 한 권과 서류를 꺼냈다. 혁명공약과 혁명취지문 포고문 초안이었다. 박정희는 이 서류들을 내놓고 이학수의 의견을 구했다. 이학수는 32절지 크기로하여 35만∼50만장을 인쇄하면 자정부터 시작할 경우, 다음날 아침 6시에 끝날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는 "포고문의 인쇄는 혁명군이 서울 시내로 진입한 뒤에 시작하라"고 했다. 확정된 혁명공약과 포고문의 인쇄원고는 김종필이 밤에 전해주기로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당부했다.
"이 사장, 사전이나 작업중에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붙들려가는 일이 있더라도 15시간만은 입을 열지 마시오. 공장 직원들이 작업하는 동안에 기밀이 누설되지 않게 잘해주시오.".
박정희는 옆에 앉아 있던 김종필에게도 지시했다.
"경호원 3, 4명을 데리고 가서 직접 작업을 감독하게. 그리고 순찰 경관이 오거든 입을 막고 잡아둬.".
3. 혁명공약 제6항 첨가
광명인쇄소로 돌아온 이학수 사장은 공장장을 불렀다.
『오늘 밤 공보실에서 급한 원고가 나와서 철야작업을 해야 하겠으니 야근할 사람들을 뽑아 대기시키시오. 저녁식사도 모두 공장에서 하도록 이르시오.』.
이학수는 그날 저녁 친구 세 사람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리곤 정색을 하고 말했다.
『며칠 안으로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내가 불행해지면 자네들 세 사람이 힘을 모아 내 공장을 경영해주고 내 자식들도 클 때까지 돌봐주어야 해.』.
친구들은 『농담이 지나치군』하고 웃어 넘기려 했다.
『진담이다. 절대 흐지부지하게 듣지 마.』
『혹시 수뢰사건에 걸려든 것 아냐.』
『아니야.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니 더 이상 묻지마.』.
이학수는 식사를 끝내고는 집으로 갔다. 잠든 처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자정 직전 전화가 울렸다.
공장에서 온 전화였다. 그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어난 아내에게 『오늘 야간작업이 있어 공장에서 밤샘을 해야겠다』면서 자식들 얼굴을 한번 더 내려다보고는 공장으로 향했다. 야간작업 인원들을 파악한 다음 그는 김종필이 오기를 기다렸다.
민간인 참여자 가운데 장태화는 박정희와 직통으로 정보수집, 상황분석의 일을 하고 있었다. 5월15일 낮에 육영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전화를 받으니 육영수는 박정희를 바꾸어주었다. 박 장군은『집으로 좀 와주시오』라고 했다. 장태화는 점심을 먹고 신당동으로 갔다. 박정희, 김종필, 장태화, 그리고 좀 늦게 합류한 이낙선 네 사람은 안방에서 어제 끝내지 못한 혁명공약, 포고령, 정부기구표 등의 문안 검토 작업을 계속했다. 김종필이 써온 혁명공약에 박정희는 나중에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제6항을 추가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조항은 박 정희의 입버릇이 된 '버마식 군부통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군대는 병영으로 들어가 대형처럼 정치를 감독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정치에 개입하여 정리를 해주고 들어가는 식의 군부통치 구상은 장구한 문민통치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 먹힐 리가 없었다. 박정희나 김종필이나 국가근대화를 혁명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구정치를 청산한다는 한시적 정치참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종필은 이 6항의 첨가에 반대했으나 박정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혁명공약의 발표자 명의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김종필은 반발했다. 『그런 사람을 왜 우리가 모셔야 합니까』하고 대들다시피 했으나 박정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 김종필, 장태화가 문안을 검토하여 수정한 것을 이낙선이 정서했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1호는 출국금지, 집회금지, 언론검열, 직장이탈 금지, 통금시간 연장, 영장없는 구금과 극형을 규정한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포고령 제 2호는 16일 오후 5시를 기해서 일체의 금융거래를 동결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16일 아침 9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것과 맞추어 오전 9시로 수정되었다. 은행의 인출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포고령 3호는 공항과 항만 폐쇄.
포고령 4호는 국회(민의원, 참의원)와 지방의회의 해산, 정부 인수, 정당과 사회단체의 정치활동 금지, 국무위원 체포를 명령하는 내용이었다.
포고령 5호는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예금인출을 1회에 10만환, 한달에 50만환으로 제한하는 내용.
포고령 6호는 물가동결과 매점매석자에 대한 극형.
포고령 7호는 외국인 재산에 대한 보호령이었다.
5월16일 이후 김종필은 열건이 넘는 포고령 문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차례로 발표하였다. 포고령 15호부터는 혁명 이후에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혁명 이후의 정권안정과 권력구조의 대강을 결정한 이날의 문건 검토작업이 이뤄진 작은 안방은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 산실이기도 했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장태화는 팔멀, 김종필은 컨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박정희가 말했다.
『이 담배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김종필이 받아서 말했다.
『실컷 피웁시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뀌니 양담배를 장송하는 셈 치고 마음대로 피웁시다.』.
내일 쿠데타에 실패하면 양담배를 피울 수가 없게 될 것이고 성공해도 지도층의 입장에서 양담배를 피울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어차피 양담배는 이것이 마지막이란 뜻이었다.
이날 육영수는 몸조심을 하였다. 박정희가 부르지 않으면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육영수가 차려온 저녁을 먹는데 김종필이 이은상에게 집필을 부탁해 두었던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사람은 글을 돌려가며 읽어보았다. 내용이 너무 유약하고 박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보류하기로 했다.
이날 신당동 자택에는 혁명파 장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오전엔 진해 육군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육사8기 정문순 중령이 찾아와서 '민주당사 점령'이란 임무를 받아갔다. 광주 항공학교장 이원엽 대령, 보병학교 참모장 최재명 대령도 찾아왔다. 박정희는 이원엽에게 『전국 주요도시에 혁명의 취지를 알리는 전단을 뿌려라』고 지시했다. 하루 전 박정희의 친서를 지니고 1군 사령부의 혁명파 장교들을 찾아갔던 이낙선은 전달을 마친 다음 오후 1시쯤 신당동으로 와서 문안 정서에 매달렸다. 혁명이 성공한 다음 장도영에게 전달할 박정희의 편지초안도 이낙선이 썼다.
점심 무렵엔 박종규 소령이 와서 김종필에게 반도호텔 작전 계획을 현장에서 점검한 결과를 보고했다. 박정희는 국방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윤태일, 송찬호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5시까지 와 달라고 했다. 이 두사람이 나타나자 박정희는 이낙선이 작성한, 장 도영 앞으로 보내는 박정희의 편지를 건네주면서 거사가 시작된 이 후 장도영을 찾아가서 편지를 전하고 군사혁명에 가담하든지 아니면 방해는 하지 말도록 설득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육본 교육처장 장경순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까지 와 달라고 했다. 장경순은 왜 자기를 불렀는지 모른 채 신당동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장 장군, 내일 거사야.』.
4. 윤보선의 불만
육본 교육처장 장경순(농림부 장관 역임) 준장은 5월15일 오후 박 정희로부터 "내일 거사야"란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장경순은 "그럼 저는 뭘해야 하지요"라고 물었다.
"장 장군은 장도영 총장과는 대학동창이잖아. 그러니 혁명을 이끌어달라고 설득해주어야겠어. 또 하나 박치옥 공수단장도 동참하기로 했는데 공수단의 출동을 감독하는 책임을 져주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더 데리고 와도 좋습니까.".
"알아서 하시오.".
장경순은 아끼는 부하 권천식 소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경순은 일단 집에 들렀다가 "야간 비상훈련에 참가하러 간다"고 아내에게 말 한 뒤 밤늦게 친구인 한웅진 준장이 기다리고 있는 화신 옆 미화호텔로 향했다.
혁명전야의 밤이 깊어가고 있던 이 순간 군부 쿠데타의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사람이 청와대에서 장면 총리에 대한 불만을 가득 품은채 살고 있었다. 실권이 약한 제2공화국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출신 윤보선이었다. 신파 출신인 장면 총리와는 원래 친밀하지도 않았지만 이즈음은 결코 한때의 정치적 동지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윤보선의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서 윤보선은 '장면 총리의 배신'이란 표현을 써가면서 그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윤보선이 나라가 총체적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1961년 3월22 일, 혁신계가 주동한 야간 횃불 시위였다. 이날 밤 윤보선은 서민으로 변장하여 지프를 타고 시위대를 뒤따라가면서 그들이 외치는 섬찝한 구호를 듣고는 '색채가 수상하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윤보선은 청와대로 돌아와서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 장시간 대책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릴 수가없었다.
그때 장면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제정하여 과격한 시위를 다스리려고 했다. 민주당 구파가 분당하여 만든 야당인 신민당도 내심으론 이 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당리당략적 이해관계로 반대하여 정부는 이 법의 통과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즈음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서 부산에 다녀온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와서 위기감을 전달했다.
"지금은 여고 야고 가릴 때가 아닙니다. 여야의 지도층이한데 모여서 사태를 수습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급히 불러서 회의를 갖도록 합시다." 이날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소집한 원로 모임엔 장면총리, 곽상훈, 참의원 의장 백낙준, 신민당 대표 김도연, 간사장 유진산, 국방장관 현석호, 그리고 양일동 조한백 의원이었다. 곽상훈이 부산에서 느낀 민심을 설명했다.
"서울에 있으면 언론이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번에 부산에 가보니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상상보다 격심했소.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윤보선은 장면을 압박하는 발언을 했다.
"중대한 사태를 수습할 소신과 방안이 없다면 거국내각이라도 만들어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하지 않겠소?".
장면 총리는 "좀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으나 거국내각 이야기가 계속 제기되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윤보 선 회고록).
"내가 만일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 있겠소?".
이 말에 윤보선은 발끈하여 이렇게 쏘아붙였다.
"장 총리가 지금까지의 국내 실정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오.".
이날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으나 윤보선은 피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나름대로 평가했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에게는 '이날 회동에선 신생활 운동에 대해서 논의했다'고 발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날 여당에선 윤보선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신민당편을 들어 장면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그런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성명이 나왔다. 윤보선은 이 사건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의 정치적 결별'이었다고 썼다. 5월16일 아침 군사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하게 되는 윤보선 대통령의 동기 가운데는 장면 총리에 대한 불신도 끼여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 모의에 참가했으나 돌출적인 행동 때문에 마지막엔 소외되었던 유원식 대령은 임시정부 요인 유림의 아들이었다. 그는 윤보선의 친구인 심명구를 통해서 윤 대통령과 접촉하려고 했다.1961년 봄 심명구는 윤 대통령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군 일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책동하는 모양인데 들어본 일이 있소?"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나잇살이나 든 사람이 왜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가.".
"지난 정초에 하례객으로 청와대를 다녀간 육군 대령이 그 거사를 모의하는 군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 대통령을 다시 한번 만나 보고싶어 한다던데." "자네 무슨 그런 부질 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나. 큰 망신당하기 전에 입을 다물게.".
그런 핀잔을 듣고도 심명구는 "그 육군 대령을 만나보지 않겠소?" 하고 대통령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더란 것이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면 어찌 내가 여기에 앉아서 만나야 되겠는가? 그런 소리 하려면 여기 오 지도 말게나.".
윤보선 대통령은 여러 경로로 군부 쿠데타설에 접하고 있었으나 실권이 없는 그로서는 할 일이 없었다. 한번은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서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장 총리나 국방장관도 다 알고 있는 일인데 대수롭지 않은 역정보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5. 해병대와 공수단
김포 주둔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5월15일 아침부터 출동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참모회의에서 김윤근은 "오늘밤 오정근 대대에 대해 차량을 이용한 야간 기동훈련을 실시하라"고 작전참모에게 지시했다. 이 기동훈련이 실은 정권을 뒤엎기 위한 군출동이란 것을 알리가 없는 참모들은 "또 여단장이 오정근 대대장을 죽이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윤근 준장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참모장 박성철 대령 일이었다. 박 대령은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 중장과 만주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함께 다닌 사이였다. 그런 박 대령에게 거사계획을 털어놓으면 비밀이 샐 것 같아서 김윤근은 참모장을 따돌렸다. 막상 거사를 앞두고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참모회의가 끝난 후 정기외출을 나가겠다고 인사하러온 박성철 대령에게 김윤근이 말했다.
"혹시 외출을 연기할 수 없겠소?"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는데 제가 꼭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면 전 화로 약속을 취소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별일도 아닌데.".
김윤근은 참모장에게 귀띔해줄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중대사를 앞두고 의심받을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박 대령을 잡아두지 않았다. 거사가 성공한 이후 박성철은 친구들로부터 "여단장으로부터 얼마나 불신을 받았기에 그처럼 따돌림을 받았느 냐"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오전 11시 김윤근은 헌병대장을 불렀다.
"각 부대장에게 통보해서 오늘 외출, 휴가를 가는 장병들은 늦어도 오후 1시까지 부대를 떠나고 오후 3시까지는 여단검문소를 통과하게 하라.".
여단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점심식사를 한 뒤 김윤근은 여단본부 중대장 좌병옥 대위와 여단통신참모 문성태 중령을 따로 따로 불렀다. 김윤근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개인적인 요청이다. 들어주면 고맙고 안들어주어도 무방하다"고 전제한 뒤 거사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여단장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행동을 같이 하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김윤근은 좌 대위에게 자신을 수행할 지휘부의 조직을 맡겼다. 문 중령에겐 전방 지휘소와 후방 지휘소를 연결하는 무전 통신망의 구성을 지시했다. 아울러 비밀유지를 위해서 오후 5시에 서울과 여단과의 전화선을, 밤 9시에 군단과의 전화선을 절단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3시가 좀 지나서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과 군수참모 유철수 중령이 어두운 표정으로 여단장을 찾아왔다.
"출동부대에 탄약1기수(한번 전투에 필요한 분량)를 보급하라고 했더니 병기참모가 말을 안 듣습니다. 기동훈련에 무슨 탄약이 필요하냐고 하면서 막무가내입니다.".
사실 기동훈련에 탄약을 공급하라는 쪽이 무리였다. 그렇다고 정권을 뒤엎으러 나가는 부대가 비무장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 윤근은 잠시 궁리를 한 뒤 병기참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기동훈련 부대에 탄약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병기참모도 잘 알다시피 휴전 후에 입대한 장교와 사병은 1기수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있으니 이번에 휴대시켜 그 부피를 체험하게 해야겠어요." "말씀대로 공급하겠습니다. 그러나 포장을 뜯으면 분실될 염려가 있으니 포장을 뜯지 말고 상자 단위로 휴대시켜주십시오." "나도 대대장에게 그렇게 지시하겠소.".
오후 4시 해병 제2훈련소장 정세웅 대령이 출동부대에 합류하기 위해서 여단본부에 들어왔다. 김윤근은 정세웅과 함께 수송중대와 오정근 대대를 둘러보았다. 수송중대는 출동에 대비한 차량점검과 정비로 분주했다. 강화도에 건너가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오정근 대대에 들르니 타부대에서 도착하는 보충병력과 탄약 분배로 북적이고 있었다. 김윤근은 자신이 출동부대와 함께 나간 뒤 이 여단을 지킬 여단장 대리를 지명하려고 2연대장 박승도(해병소장, 사단장, 구미공단 이사장 역임)대령과 작전참모 정태석 중령을 불렀다. 김 윤근은 비로소 두 사람에게 거사 취지를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상기되더니 "부재중의 여단 지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주시고 우리는 거사부대와 행동을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김윤근은 두사람을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두 사람이 협력해서 뒤를 맡아 주어야 내가 마음놓고 출동하지 그렇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고 설득하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김윤근은 잠을 자두기로 했다. 부관 홍경식 소위에게 밤 11시에 깨우라고 지시한 뒤 숙소에 가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5월 15일, 약 6백명의 병력을 가진 공수단은 도봉산과 안성에서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김제민 대대장은 훈련을 받으러 나가는 장교들에게 밤까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귀대하라고 지시했다. 이 훈련은 미군 공수부대 고문관들의 지도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김 제민 중령은, 이들 미 고문관들이 타는 자동차의 바퀴바람을 빼버리더라도 공수부대원들이 귀대하는 것을 막지 못하도록 하라고 시켰다. 이날 낮에 오치성 대령과 옥창호 중령이 박치옥 단장을 찾아 왔다. 두 장교는 "출동시간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박 대령은 "차량만 제때에 보내주게"라고 응수했다.
공수단 차지철 대위는 이날 특별히 바빴다. 14일 밤 도봉산으로 출동했던 차지철은 15일 아침엔 시내로 나가 박종규와 함께 장면총리 체포에 대비하여 반도호텔 정찰을 실시하고 오후 2시쯤 도봉산으로 돌아와 지상에서 낙하훈련을 유도하였다. 2개 중대 병력의 공수단 훈련부대는 이날 밤 도봉산을 출발, 밤 10시15분쯤 김포의 본 부로 돌아왔다. 낙하훈련에 지친 이들은 돌아오자마자 쿠데타를 위한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부대에 남아 있었던 김제민 대대장은 이날 밤 팀장들을 불렀다.
그들에게 거사계획을 털어놓았다. 해병대가 동참할 것이고 장도영 참모총장도 이 쿠데타를 지도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박치옥과 김 제민은 그때까지도 박정희의 말을 믿고 장도영이 쿠데타를 지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팀장들은 모두 거사에 찬동했다. 김제민은 박치옥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장님이 내려오셔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박치옥은 팀장들을 집합시킨 뒤 거사의 당위성에 대해 일장 훈시를 했다고 한다. 김제민 대대장은 이제 6관구 사령부에서 스리쿼터 수송대를 보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6. 1군과 6관구 사령부
쿠데타군의 지휘소가 될 영등포 6관구 사령부에는 김재춘 참모장과 박원빈 작전참모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김재춘 대령은 먼저 황산웅 수송관을 불러 이틀 전에 지시한 사항을 확인했다. 스리쿼터에 기름을 가득 넣어두도록 지시했던 것인데 그 사이 누가 기름을 빼내 팔아 먹었을지도 모르고 타이어가 터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혁명주체로 포섭된 황 대위는 20대의 트럭을 2개 중대로 편성하여 10대를 공수단으로 보내고 나머지 10대는 비상대기시켜 두라는 지시를 받아두고 있었다. 김재춘은 본부사령 계충의 소령을 불렀다. 그도 포섭 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혁명대열에 참여할 장교들이 오는데 대부분이 무장하지 않은 상태일거야. 그러니 우리 본부에 있는 총과 실탄을 준비해두게.".
김재춘은 한달 전부터 이미 위병교육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붙여 1개 소대 병력을 본부사령 지휘하에 두도록 했었다. 이날 다시 제10경비 중대에서 1개 소대를 뽑아 본부사령 아래로 배속시켰다. 본부 무기고엔 45구경 권총을 포함, 15발들이 탄창을 끼워 단발 사격을 하는 카빈M1과 30발들이 탄창을 꽂아 자동연발사격이 가능한 M2가 2백여 정이 있었다. 계충의 소령은 이들 소총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15일 밤의 주번사령은 비상출동 명령을 내리는 데 관계하고 본부의 병력을 지휘하는 등 중요한 직무를 맡게 되어 있었다. 박원빈 중령은 자신이 이날 주번사령 이라고 착각하여 박정희에게 이날을 거사일로 하자고 건의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날 주번사령은 공병참모 하 중령이었다. 그는 육사8기로 박원빈과는 동기였지만 포섭되어 있지 않았다. 김재춘 참모장과 의논하였더니 능수능란한 참모장이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김재춘은 2 군 사령부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에게 전화했다. 박 대령은 육사5기로서 동기 사이일 뿐 아니라 혁명군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박기석에게 부탁하여 하 중령을 대구로 불러내릴 구실을 만들었다. 김재춘은 대구로 출장을 보낸 주번사령 대리로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부관참모 이경화 중령을 근무하게 하였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또 한 사람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이었다. 1940년 박정희와 함께 신경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들어간 이래의 친구 사이였다. 그의 휘하엔 5개 군단 20개 사단이 있었다. 적어도 수치상으론 이한림이 반대하면 어떤 쿠데타도 성공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군 정보기관이 활동하고 있으므로 적절히 대처할 것'으로 믿고는 적극적인 음모 분쇄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장도영, 이한림, 그리고 많은 장성들이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이를 장면 총리에게 보고하여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장면 정부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의 결여를 보여준다.
많은 장교들은 장면 정부가 민주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바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의 3대 내용물인 자유, 복지, 안보 가운데 3분의 2(복지와 안보)가 결격인 장면 정부는 이들에게 정통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이름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무능과 부패는 장면 정부에 대한 민심과 군심의 이반을 불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한림은 친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내가 야전군을 믿는 것처럼 서울도 그 나름대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과 기능이 있으므로 잘 될 것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회고록 '세기의 격랑').
5월15일, 이한림 중장은 그동안 야전군에 대한 업무파악을 위해서 미루어 두었던 1군 창설 기념식 행사를 원주의 사령부 연병장에서 성대히 거행했다. 야전군 산하 전중대의 대표들이 수천 기의 중대기를 들고 참석하게 한 기념식은 장관이었다. 이 행사를 참관한 5명의 군단장, 20 명의 사단장 가운데 내일 새벽에 거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5군단장 박임항, 5사단장 채명신, 12사단장 박춘식.
박임항은 만주군관학교 1기출신으로서 박정희와 이한림보다는 한 기 선배였다. 채명신, 박춘식은 육사5기 출신으로서 박정희를 참모장으로 모시고 참모로 근무하면서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한림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20개 사단이 박정희의 음모를 저지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으나 음모의 긴 손은 바로 그의 발밑까지 와서 굴을 파고 있었다. 15일 오전 박정희의 밀사 이낙선 소령이 친서를 품고 1군 사령부 작전처 조창대 중령을 찾아왔다. 조 중령은 1군내 혁명조직의 중심이었다. 이낙선이 전달한 친서는 박임항, 채명신 장군 앞으로 된 것인데 저녁식사 후 전달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조창대 앞으로 된 친서와 이낙선을 통해서 구두로 전달한 메시지에서 박정희는 16일 새벽 3시를 기해 거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박임항 중장을 통해서 이한림을 설득해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또 육사8기 중령들이 접촉 하지 않고 있던 포병참모 정봉욱 대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정봉욱은 6·25 때 낙동강 전선에까지 내려왔던 인민군 포병장교(당시 중좌)였다. 국군에 투항해온 그는 박정희가 사단 포병단장일 때 부하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창대는 쿠데타 지도자의 친서를 받은 직후 이종근, 심이섭, 박용기 중령에게만 내용을 알려주고 다른 장교들에겐 '오늘밤 9시 작업복 차림으로 박용기 집으로 모여라'고 통 보했다.
조창대는 창설기념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던 축구 경기장으로 가서 박임항, 채명신 장군을 만났다. "오늘 오후 6시에 여관으로 찾아뵙겠다" 고했다.
조창대는 저녁에 두 장군을 찾아가 박정희의 친서를 건넸다. '이한림 사령관을 설득하여 혁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친서의 요지였다.
조창대는 밤 9시 박용기 중령의 집으로 향했다.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 중령이 모였다. 안찬희 중령은 이한림 사령관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조창대는 박정희의 친서를 낭독한 뒤 불태웠다. 이들은 밤 11시엔 조창대 중령의 관사로 옮겨 다음날 새벽 5시 방송을 기다리기로 했다. 후방지역의 쿠데타군 장교들에겐 KBS의 아침 5시 혁명공약낭독 방송이 행동지시가 되게끔 계획되어 있었다.
7. 누설
서울 근교에 주둔한 30사단은 1개 연대병력도 되지 않는 예비사단이었지만 수도권에 위치한 때문에 중요했다. 5월15일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은 출근하자마자 '오늘 밤에 비상출동 훈련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지시를 연대로 내렸다.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이 기안하여 4월말에 육본-6관구사령부를 거쳐 수도권 부대에 내려보낸 폭동진압훈련 계획(비둘기 작전계획)에 의거한 지시였으므로 의심을 받을 리가 없었다.
참모장 이갑영 대령, 90연대장 박상훈 대령은 이백일에 의해 20여일 전에 포섭된 혁명동지였다. 오후 한 시쯤 이갑영은 박상훈을 데리고 사단 내 야산으로 올라가서 이백일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오늘 비상출동대기 명령이 시달된 것을 보니 혁명을 위해 출동하는 것은 분명한데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상의나 통보도 해주지 않는 이백일의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박상훈 대령은 출동부대의 지휘관은 자신이 되는데 한 마디 의논도 없었던 이백일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박 대령은 이백일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오늘 출동한다는데 사실인가. 나에겐 어째서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러는가. 나는 못하겠다.".
대강 이런 요지의 불평을 했다. 이백일도 신경질을 냈다.
"못하겠으면 그만두십시오.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밤 10 시에 육본에서 사람이 올 텐데 그때 모든 것이 알려질 것입니다. 전투단장(출동부대의 편제)으로서 행동하기 싫으면 오후 5시까지 확답을 해주십시오".
박상훈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갑영 참모장이 들어왔다.
"사단장 각하께 이 사실을 보고하시오." 박상훈은 사실상의 밀고권유인 이 말을 듣고는 "밤 10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이갑영은 이상국 사단장실로 갔다.
"각하, 박상훈 연대장이 사적인 일로 만나뵙고자 원합니다." "약속이 있어 퇴근해야 하는데 빨리 오라고 하시오.".
부름을 받고 연병장을 가로질러 오는 박상훈 대령을 마중나간 이갑영 참모장은 "사단장 각하께 모든 것을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박상훈 연대장과 이갑영 참모장이 사단장실로 들어왔다.
"박대령, 사적으로 할 말이 있다는데 뭐야?"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공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하 우리 부대가 오늘 밤 작명에 의하여 출동하는 것 알고 계십니까. 오늘 이백일 작전참모한테 들었는데 제가 전투단장이 되어 있습니다.".
"아니 내가 모르는 출동명령이 어디 있나?".
이상국 사단장이 화를 내면서 캐묻자 박상훈은 실토했다.
"이번 출동은 훈련이 아니고 군사혁명의 성격을 띤 부대동원입니다.
그동안 B형 전투단이란 이름을 붙이고 훈련을 해온 것도 혁명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이상국 준장이 더욱 화를 내자 이갑영 참모장은 "사단장님,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하시면서 말씀하시죠"라고 달랬다. 이상국은 자신이 운전 하는 지프에 박상훈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이갑영 참모장은 뒤차로 따라오고 있었다. 차중에서 이상국이 말했다.
"연대장, 천명도 안되는 우리 예비사단으로 무슨 혁명을 한다고? 만고 역적될 소릴랑은 하지도 말고 지금부터 내 명령만 들어!".
이상국 사단장의 지프가 녹번동의 삼거리에 이르렀다. 뒤따라오는 참모장 차를 기다리기 위해서 차를 세우고 사단장과 연대장은 내렸다. 여기서 연대장 박상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혁명계획을 사단장에게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뒤따라온 이갑영도 다가오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오늘밤 혁명군이 사단장님과 6관구 사령관님의 자택을 포위하고 두 분을 감금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상국 사단장 일행은 밤 8시30분쯤 서울 중구 무교동에 있는 삼희정이란 음식점에 도착했다. 이상국은 수행한 본부사령 지동식 대위에게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켜 놓으라는 지시를 해서 내보냈다. 식사를 하고 나오는 육본 정보국 김판길 대령과 마주친 이상국 장군이 말했다.
"여보김 대령, 오늘 저녁에 쿠데타가 일어난다는데 알고 있소?" "저도 비슷한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만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입니다.".
김 대령은 육군방첩부대로 전화를 걸었다. 곽 모 소령에게 "빨리 이 철희 부대장을 찾아 이상국 사단장을 대면시켜주라"고 했다. 이날 이철희, 부대장 백운상 대령, 서울관할 506대장 이희영 대령은 소공동에 있는 한국회관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곳으로 조석일 중령이 뛰어왔다.
"각하, 이상국 준장이 부대 소요 관계로 각하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 부대의 소요는 자기가 수습해야지 왜 나한테 와서 야단이야?".
한편 이날 행동에 질서가 없는 이갑영 참모장은 그 새 시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서 이백일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전참모, 혁명계획이 모두 탄로났어. 나는 지금 방첩대에 붙들려 가니 자네는 어서 피신해.".
이런 전화를 하고는 삼희정으로 돌아왔다. 이상국 사단장은 박상훈 연대장에게 "지금 즉시 부대로 돌아가서 출동대기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상국은 이갑영과 함께 지금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506 서울지구방첩대 사무실로 갔다. 이철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국, 이철희 두 사람은 육사2기 동기였다. 물론 박정희도 육사2기 출신이다.
"이 준장, 뭔데 야단이야?" "이 사람아 오늘밤 불태우고 죽고 한다네.".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어?" "아니야 이 사람아, 나도 지금 가족을 피난시키고 온다네."(이상의 대화는 '5·16혁명 실기'에서 인용).
이상국은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 사단에서 반란이 났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철희 장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장도영 총장과 연락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갔다. 이희영 대령은 대장실에서 이상국 준장에게 쿠데타군의 지휘체계도를 그린 정보도표를 보여주었다. 한 체계도의 맨 위엔 박정희, 다른 도표의 맨 꼭대기엔 박병권(당시국방대학원장)소장이 적혀 있었다. 혁명 지도자 박정희 장군 아래 30 사단을 포함한 4개사단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희영은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30사단에서 반란이 났으니 이것은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혁명입니다. 참모장, 연대장도 다 포섭되어버렸습니다. 사단장님은 빼고요.".
방첩대 곽 소령이 덧붙였다.
"이들은 지난 5월12일엔 실탄사격 후 출동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단장님의 성향으로 보아 쿠데타에 가담할 분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국은 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에게 이 급보를 알렸다.
8. 장도영의 주저
5월15일 오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이철희 방첩부대장으로부터 "군경합동으로 김덕승 건을 조사했는데 이 자는 사기꾼이고 박정희 소장 거사설은 완전한 조작이다"는 요지의 수사보고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썼다. 그의 이 증언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배치된다.
경찰을 지휘하여 이 수사를 한 검찰의 이태희 총장, 서울지구를 관할하던 506방첩부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 총장에게 '김덕승은 쿠데타 음모 그룹의 일원이며 즉시 박정희를 구속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장도영은 이날 이철희로부터 보고를 받고는 '박정희는 참 모략을 많이 받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한다. 장도영은 정보참모부장 김용배, 참모차장 장창국과 함께 교동에 있는 은성이란 한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퇴근했다. 김 용배는 그동안 미국으로 장기간 출장갔던 최경록 2군사령관의 대리로 대구에서 근무하다가 최 장군이 귀임함으로써 돌아와 처음으로 출근한 날이었다.
저녁 8시쯤 은성에서 만난 세 사람은 술잔을 돌리면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세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데 총장을 찾는다는 전갈이 있어 장도영은 마루로 나갔다. 방첩부대 조사 과장 조석일 중령이 댓돌 위에서 경례를 하면서 "급한 보고를 드릴 일이 왔습니다"라고 했다. 장도영은 "그래요? 그럼"하면서 마루 건너에 있는 빈방으로 들어갔다. 조 중령은 "30예비사단에서 일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이상국 사단장의 보고가 있습니다. 이 장군이 지금 506에 와있습니다"라고 했다. 장도영은 김용배, 장창국 장군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506부대 사무실로 갔다.
이상국 준장은 좀 흥분된 어투로 총장에게 보고했다. 장도영은 그 보고 내용이 '이백일 중령이 부대 장병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야간 훈련을 빙자하여 부대를 출동시켜 사단장과 그 가족까지 살해하려 한다'는 요지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장군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단순히 사단장에게 감정을 품은 장교가 일으킨 소요 정도란 보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국은 반혁명사건 재판에서 자신은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고 이백일 작전참모도 거기에 가담하여 사단장 몰래 병력을 출동시키려 한다'고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장도영은 이상국을 질책 한다음 조흥만 헌병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국 사단장이 거기로 가면 헌병 2개 중대를 차출하여 주고 대령을 한 사람 붙여 30사단으로 보내라.".
장도영은 이어서 육군방첩부대 부부대장 백운상 대령에게 "30사단에 가서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상국 사단장은 6관구 헌병대로 가서 1개 분대의 헌병을 호위용으로 얻어 30사단으로 향했다. 장도영은 30 사단을 관할하는 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을 찾았으나 연락이 닿질 않았다. 그는 이어서 육본의 주번사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이 없는가." "오늘 저녁 서울지구 주둔부대들이 야간훈련을 하게 되어 있는데 총 장님은 알고 계십니까.".
장도영 총장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육본 작전참모부 당직장교를 찾아 물으니 '이미 훈련계획이 하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공수단은 한강 백사장에서 야간 낙하훈련을 하게끔 되어 있다고 했다. 장도영은 박치옥 공수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박치옥 대령은 "오늘밤 훈련은 비둘기 작전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미 하달된 육본 작전참모부 훈련지시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대답하더란 것이다(회고록).
장 도영은"훈련계획을 즉각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부평의 33사단장 안동순 준장에게도 훈련 취소지시를 내렸다. 이때가 밤 10시30분쯤. 장도영은 자신도 모르는 야간훈련을 취소시키는 명령을 내려놓고도 아직 이 사태가 진행중인 박정희의 쿠데타라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는 저녁식사 도중에 급보를 듣고 506사무실로 달려왔기 때문에 이때쯤 허기가 났다고 한다. 운전병에게 바로 옆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켜오라고 했더니 이미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은성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직도 김용배, 장창국 장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은성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마쳤다. 두 사람에겐 여러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야간훈련 계획을 취소시킨 것만 언급했다. 두 사람과 헤어져서 귀가하는 길에 장도영은 다시 서울지구 506방첩대에 들어갔다. 자신이 명령한 사안의 조치결과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때 조흥만 헌병감이 전화를 걸어왔다.
육본 장교 20여명이 야간훈련을 감독한다면서 영등포에 있는 6관구 사령부로 모여들고 있다는 보고 였다. 장도영은 이 보고를 듣고는 '속히 헌병들을 급파, 훈련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을 귀가시켜라'고 명령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즉, 장도영은 아직도 일련의 사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6관구로 모여들고 있는 장교들을 단순히 귀가 시키려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란 주장이다.
장도영은 이어서 6관구 사령관(서종철 소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빨리 귀관이 사령부로 나가 부대에 비상을 걸어 상황을 장악하라. 육본 장교들을 해산시키고 불응하면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때쯤 비로소 박정희 소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 있던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 장군을 찾아 전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말들이 사실이라면 장도영은 30사단의 반란사건, 자신도 모르게 잡혀 있는 야간 기동훈련 계획을 보고받고도 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런 일련의 사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가 된다.
506부대장 이희영은 그러나 장도영으로부터 '박정희를 미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총장이 맨 처음 506사무실로 들어왔을 때였다고 주장했다. 그 명령에 따라 김응서 대위 이하 약간 명의 수사관들을 무전기가 있는 지프 두 대에 태워 신당동 자택으로 급파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집 바깥에 차를 세우고 안을 감시하고 있던 김응서 대위측에선 "지금 옥내에서 수명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이희영 대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 때 장도영 총장이 이희영 대령에게 "즉시 박정희 장군을 체포하라"고 했더라면 무난히 붙들 수 있는 기회였다. 장도영은 너무나 당연한 '쿠데타 지도자 체포 명령'을 이날 밤 내리지 않았다. 박정희가 체포되었더라면 쿠데타는 불발되었을 것이고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9. 당황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이날밤 거사 사실을 보고 받고도 아주 한가하고 미온적인 대처를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는 우선 쿠데타의 지도자 박정희 체포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쿠데타군을 저지 하고 분쇄하기위한 대규모 진압군 동원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 급박한 시간에도 마치지 못한 저녁식사를 끝내기 위해서 식당으로 돌아가 한담을 하고 나타났다.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지휘소를 육본이 아니라 지구 방첩대 사무실로 잡아 여기저기 전화만 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의구심으로 발전한다.
즉, 박정희로부터 쿠데타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설득을 여러번 받아왔던 장도영은 막상 쿠데타가 일어나자 어떤 미련 때문에 과감한 진압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그것이다. 장도영은 쿠데타군이 서울시내로 들어오기 약 여섯시간 전에 박정희의 거사를 알았으므로 마음만 먹었더라면 박정희체포, 쿠데타군의 출동저지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혁명군 작전의 기획자이던 6관구 사령부의 박원빈 중령은 이날밤 저녁식사를 바깥에서 마친 뒤 부대로 들어와서 초조한 시간을 빨리 보내려고 마작을 하고 있었다. 밤 9시30분쯤 주번사령으로부터 "서 종철 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와 박 중령을 찾았는데 모른다고 했다"는 귀띔이 있었다. 박원빈은 이 시간에 사령관이 찾는다는 게 꺼림칙했다.
몇분이 지나지않아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참모장과 연대장이 사단장에게 거사계획을 밀고하여 자신은 피신중이란 것이었다. 박원빈은 아까 온 사령관의 전화도 이와 관계가 있겠구나 하는 판단을 했다. 이때 서종철 6관구 사령관은 이상국 준장으로부터 급보를 들은 뒤 6관구 헌병대로 나와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서종철은 또 주번사령한테 전화를 걸어 박원빈 중령을 찾았다. 없다고 하니까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빨리 헌병대로 나 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원빈은 먼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말했다.
"어디서 전화가 걸려오거든 사복으로 갈아입고 친구 아들 돌 잔치에 갔다고 하시오.".
그 직후 서종철 사령관이 직접 박원빈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받아 남편이 시키는 대로 말하니까 서종철 소장은 "사복 을 입고 나갔습니까, 군복을 입고 나갔습니까"하고 캐물었다는 것이다.
"저도 외출했다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이렇게 뜸을 들인 뒤 그녀는 "사복을 입고 나갔다"고 말한다는게 "군복을 입고 나갔습니다"고 말해버렸다. 자신의 실언에 놀란 그녀는 어제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남편이 외출나갔다가 오더니 서류뭉치를 주면서 땅속에 파묻어두라고 했던 것이다. 그 서류는 5·16거사 작전계획서였다. 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겁이 났던 박원빈 중령의 처는 서류를 불태우려고 아궁이에 넣고 성냥을 그었는데 손이 덜덜 떨려서 잘 되지도 않았다. 박원빈은 본부사령 계충의 소령을 불렀다. '사령부 경계를 철저히 하고 내 허가 없이는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도록' 지시한 뒤 그는 차를 내어 부평33사단으로 달렸다.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과 전투단장 이병엽 대령을 불러냈다. 박원빈은 "30사단은 정보가 누설되어 희망이 없다. 33사단은 꼭 제대로 출동해야한다"고 못을 박고는 돌아왔다.
이날 밤의 혼란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에게도 이날(5월15일) 저녁은 지루하고 초조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필동 아스토리아 호텔에 갔다.
커피 숍에서 그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헌병 백차가 신세계 백화점쪽으로 달리고 있었다.괜히 불안해졌다. 그는 호텔을 나왔다. 퇴계로를 거쳐 남대문쪽으로 가다가 차를 세우고는 약방 앞 공중전화를 잡아들었다.6관구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박원빈 중령을 찾았다.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번사령을 바꿔." "이경화 중령입니다.".
"지금 시내에선 헌병 백차가 질주하고 있는데 사령부엔 아무일이 없나?" "지금 비상이 걸렸습니다. 전장병들이 귀대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작전 참모 어딨어?" "안 보입니다. 비상이 걸리니 우리 편이 아닌 장교들까지 소집되어 부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알았다. 내 곧 들어간다.".
원래 혁명계획은 사령관과 일반 장교들이 퇴근한 6관구 사령부에 주체 장교들끼리 모여서 쿠데타 작전의 지휘소로 이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출발에서부터 빗나가게 된 것이다. 김재춘은 다시 박정희 소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더니 바로 박정희가 나왔다.
"각하, 폭로된 것 같습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 그럼 어떡할래.".
박정희는 난감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나가야죠, 뭘 어떡합니까. 빨리 6관구로 나오세요. 제가 나가서 우선 지휘할테니까 하여간 빨리 나오세요."
"알았다.".
박정희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 발표된 5·16거사에 대한 기록에는 이 장면을 묘사할때 박정희가 태연하게 "제2안대로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제 2안이란 비밀이 누설되었을 때 지휘관의 감금 등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거사를 강행한다는 시나리오였다. 김재춘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고 '제2안'이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춘은 후암동 집으로 갔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권총을 찼다. 아내에겐 "비상이 걸려 부대로 들어간다"고만 했다. 옷을 갈아 입고 대문까지 나오면서 '두번 다시 못 만날 길이 될지 모르는데 작별인사를 해야 하나'하고 고민했다. 3남1녀를 두고 있었던 김재춘은 이들에게 눈길을 한번씩 준뒤 아무 말 없이 거리로 나왔다. 지프를 타고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 앞에는 벌써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헌병들이 통제를 하고 있었다.
김재춘이 큰 소리로 호통치듯 말했다.
"나 참모장이다. 바리케이드를 걷어라.".
이때 이상한 물체들이 차를 향해 몰려오는 것이 전조등 불빛 사이로 보였다. 주체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헌병들이 통과시켜주지 않자 어두운 담장에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김재춘이 나타나자 우∼ 하고 몰려든 것이다. 김재춘은 "육본서 온 비상훈련 감독관들이다. 다 통과시켜라"고 헌병들에게 명령했다. 김형욱, 유 승원 등 20여명의 장교들은 6관구 사령부로 몰려들어갔다.
10. 결단
1961년 5월15일(월요일) 육영수는 신당동 집에서 중대한 일을 앞 두고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근혜, 근영 두 딸을 학교로 보낸 뒤 그녀는 집일을 거들어주던 아줌마를 불렀다.
"고향에 가서 2, 3일 쉬다가 와요." "갑자기 고향은 왜요?".
아줌마는 육영수의 고향 근처 마을에서 온 사람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니 쉬어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육영수는 차비를 넉넉하게 주어 보냈다. 이날 박정희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잇따랐다. 김종필, 장태화, 이낙선은 안방에서 박정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종일 문건을 읽고 고치고 정서하고 있었다. 육영수는 이들에게 커피와 과일을 대접해올리면서 틈만 나면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헌 옷가지와 빨랫거리를 찾아냈다.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박정희와 결혼한 딸과 줄곧 같이 살아왔던 이경령은 딸의 거동이 수상스러워 물었다.
"이 바쁜데 무슨 빨래냐. 무슨 일이 있느냐." "아무 염려 마셔요. 어머닌 모르셔도 괜찮으셔요.".
밤이 되었다. 육영수는 근혜, 근영, 지만 3남매를 이경령이 데리고 안방에서 주무시도록 했다. 육영수는 빨래를 한 가지씩 다리미로 다려 차곡차곡 챙기고 있었다. 밤 10시가 지났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있던 방으로 건너갔다. 박정희는 장태화, 김종필, 이낙선과 함께 일어나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영수는 "저 보세요"라고 불렀다. 육 영수는 남편을 부를 때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항상 "저 보세요" 라고 했다.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
박정희는 서슴없이 "어, 그러지"하고 아내를 따라나갔다. 박정희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국민학교 5학년생 근혜를 굽어보고는 윗목 외할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근영, 지만에게 눈길을 주고는 나왔다. 장태화가 "무슨 숙젭니까"하고 물었다.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
장태화는 이 순간의 육영수와 박정희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남편이 지금 나가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녀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도록 한 육영수의 기지와 긴박한 순간에도 그런 여유를 보여준 박정희의 인간성 때문이었다. 지금 한나라당 소속인 박근혜 의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 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님께서는 집안을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님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군 작업복으로 갈아 입은 박정희는 아내가 작은 가방에서 꺼내주는 권총을 찼다. 군화를 신은 채 마루의 의자에 앉았다. 김종필 총리의 기억으로는 이때 전화가 왔다고 한다. 박정희가 받고 끊었는데 내용은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로 몰려와서 혁명파 장교들을 체포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전화는 30 단에서 거사 비밀이 누설된 것을 처음으로 알린 김재춘의 전화가 아니고 그뒤에 진행상황을 누군가가 보고한 전화로 추정된다). 박정희는 전화를 끊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라고 한다.
이때 한웅진 육군 정보학교장과 장경순 육본 교육처장이 나타났다. 원래 두 사람은 김포 입구에 먼저 가 있다가 박정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경순 준장은 한웅진 준장이 묵고 있던 청진동 미화호텔에 밤10시쯤 나타났었다. 한웅진은 방에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한웅진을 만났다.
"아니, 한 장군. 이런 때 늑장을 부리면 어떻게 하오." "박정희 장군이 연락을 했다는데 우리더러 집으로 오라고 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틀림없어. 육성을 내가 들었어요.".
두 사람은 지프를 타고 신당동으로 달렸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박 정희는 키 큰 두 장군이 나타나자 "군화 신고 그냥 들어와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다 탄로났어"라고 말했다. 장경순의 기억에 따르면 박 정희는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고 무표정한 편이었다고 했다. 한웅진, 장경순 두 사람은 의자에 앉으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일어서면서 "갑시다"라고 거의 동시에 말했다고 한다.박정희도 따라 일어서면서 "갑시다"했다. 모두 따라나섰다. 박정희는 현관을 나서면서 아내에게"내 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보오"라고 했다.
김종필이 골목으로 나와보니 아까부터 있던 지프 두 대가 한쪽 켠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종필은 방첩대에서 미행용으로 배치한 지프라고 짐작했다. 김종필은 거사계획이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마당에 어차피 오늘 하룻밤만 넘기면 된다는 배짱으로 이 지프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두 대의 지프엔 조장 김응서가 지휘하는 7명의 506부대(서울지구 관할) 방첩대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물론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밖에는 승용차가 두 대, 안에서는 수명이 음주중'이란 보고를 무전으로 해놓고 대문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이때 장도영이 '박정희를 체포하라'는 한 마디 명령만 내렸더라면 이들은큰 저항없이 쿠데타 지도자를 체포함으로써 거사를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대기중이던 지프에 탔다. 뒷 자리에는 한웅진, 김종필이 올랐다. 장경순은 데리고 온 권천식 소령, 한웅진이 데리고 온 신동관 소령과 함께 뒷차에 탔다. 이때 한웅진은 "아차, 내 권총"이라고 했다.권총을 미화호텔에 두고 온 것이다. 박정희가 탄 차는 청진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경순이 그 뒤를 따르는데 검은색 지프가 중간에 끼여들었다.
11.서류를 불태우고
장경순(국회 부의장 역임) 준장은 박정희 소장차와 자신이 탄 지프 사이에 끼여든 검은색 지프를 앞지르도록 운전사를 재촉했다. 추월당한 검은 지프는 금방 장경순의 차를 다시 앞질러 박정희 차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장경순은 문제의 지프가 군 수사기관에서 미행으로 붙인 것임을 직감했다. 박정희가 탄 차는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던 미화호텔 앞 길가에 멈추었다. 미행차는 보이지 않았다. 한웅진 준장이 호텔 객실에두고 온 권총을 가지러 간 사이 장경순은 박 정희에게 다가갔다.
"각하, 미행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지하고 갈 테니까 빨리 가십시오.".
한웅진은 두 자루의 소련제 권총을 들고 나왔다. 박정희는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소제로 바꾸어 찾다. 박정희가 탄 앞차가 다시 출발하여 안국동쪽으로 달리자 어느 새 미행차가 나타나 따라붙는게 아닌가. 안국동∼중앙청∼시청을 거쳐 서울역쪽으로 가느냐, 소공동 한국은행쪽으로 가느냐의 갈림에서 장경순은 미행차를 가로막고 박정희가 탄 차를 서울역쪽으로 달리게 한 뒤 한국은행쪽으로 유도하려고 소공로로 달렸다. 뒤돌아보니 미행차는 속지 않고 박정희 차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장경순이 탄 차가 다시 미행차를 추월했다. 장 경순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아무래도 처치해야겠다고 서두르는 데 미행차는 삼각지를 지나서 한강 인도교를 눈앞에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미행차에 탔던 김응서 대위는 이때 무전으로 "11시쯤 박정희 소장을 포함한 2∼3명이 신당동 자택을 출발하여 지금 삼각지를 지나 한강 인도교를 건넜습니다"라고 506부대로 보고한 뒤 철수한 것이다.
한강 인도교를 넘기 직전, 박정희와 동행했던 김종필이 내렸다.
김종필은 일이 잘못되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처삼촌을 전송하는 기분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김종필은 내리면서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김종필은 뒤따라 온 자신의 지프를 타고는 안국동의 광명인쇄소로 달렸다.
장경순은 미행차를 따돌린다고 이리저리 차를 몰게 하는 바람에 한강 인도교를 넘었을 때는 박정희 차를 놓쳐버렸다. 사육신묘를 지나 영등포와 김포 방향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갔더니 박정희가 지프를 세워놓고 내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뛰어오는 장경순에게 "왜 늦었소?"라고 한 마디 한 박정희는 다시 차에 올라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이 시간 이석제(총무처 장관,감사원장 역임) 중령은 6관구 사령부 앞에서 애타는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 중령은 집을 나올 때 45구경 권총은 허리에 차고 작은 리볼버는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불안한 만큼 권총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권총을 만지면서 하루 전날 마지막 작전 회의에서 박정희가 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 것, 문제는 순리대로 풀 것, 그리고 시민들에게는 친절할 것.".
밤 10시, 이석제는 지프를 타고 노량진의 한 다방에서 유승원 대령, 이형주 중령 등과 만났다. 이석제만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행정반장인 이석제는 자신의 지프 뒷자리에 여섯개의 서류보따리를 두고 있었다. 집권 후에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부처별로 추진할 정책안, 민주당의 주요 정책안, 장차 기용할 인물들의 명단과 이들에 대한 자료, 혁명 초기에 사용할 각종 전단, 방송문, 성명서, 대외메시지, 후진국 경제자료, 입법자료, 혁명법령 따위가 들어있는 보따리 때문에 뒷자리엔 이형주만 탈 수 있었다. 차가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했다.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육본 검열단에서 왔다"고 해도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이석제는 차를 돌려 사령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세웠다. 차에서 내린 이석제는 정문 부근에 20여 명의 장교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박 장군 오셨나?"라고 물었다.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석제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제 마지막 작전회의가 생각났다. 혁명군 출동계획을 짠 박원빈 중령을 향해서 이석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출동부대의 지휘관들에 대한 조치내용이 없습니다. 이들 지휘관들은 사전에 연금시키고 통신은 두절시켜야 합니다. 만약 반혁명 세력이 선수를 쳐서 부대를 장악하면 병력동원에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박원빈 중령은 "뭐 그럴 것까지 있나"란 태도였고, 박정희도 침묵을 지켜 이석제의 건의는 묵살되었다. 이석제는 속으로 '박원빈이 내 말을 듣지 않더니…' 하는 원망이 생기더라고 한다. 이석제는 이 순간정문의 병력이 쿠데타를 저지하려는 6관구 사령관측에서 배치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박원빈씨는 그 때 정문에 배치한 병력은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우군이었다면서 '작전참모를 만나러 왔다'고 했으면 통과시켜줄 것인데 이석제 중령이 '육본에서 왔다'고 하는 바람에 통과시켜주지 않았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사비밀이 누설되었다고 판단한 이석제는 지프에 실어둔 혁명관련 서류들이 걱정되었다. 특히 혁명이 성공할 경우 기용하려는 인사들에 관한 서류는 엉뚱한 피해를 부를 위험이 있다는 판단을 했다.
이석제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형주 중령에게 "형주야, 나를 좀 도와다오"라고 했다.
"왜 그래?" "상황이 심상찮다. 우선 인사서류를 태워야겠다. 좀 찾아줘.".
이형주가 뒷자리에 수북이 쌓인 보따리를 풀어서 서류를 끄집어내 바깥으로 던졌다. 이석제는 이를 받아 성냥불을 그어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는데 지프 한 대가 정문으로 다가왔다. 박정희가 탄 차였다. 이석제는 서류소각을 중지하고 자신의 지프에 올라탔다. 그는 박 정희의 지프 뒤에 붙었다. 초병이 "누구야?"라고 했다. 2년 전 6관구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나야"라고 위엄있게 말했다. 초병들은 안으로 전화를 걸더니 김재춘 참모장의 명령을 받아 바리케이드를 치워주었다. 이 순간 바깥 담벼락에 붙어서숨어 있던 장교들 수십명이 "우∼" 하고 박정희 장군 차의 뒤에 붙어 사령부 안으로 들어왔다. 장교들은 걸어서 가고 박정희, 이석제의 지프는 사령부 건물까지 굴러갔다.
한강도하
(1) 혁명거사 목전에서 30사단의 배신, 그로 인한 혁명계획의 탄로, 혁명의 시간은 이미 접어들었건만 지금까지 출동한 혁명군은 어디에도 없다. 어쩐지 꼬여가는 듯한 상황에 박정희 소장의 가슴에는 불현듯 외로움과 착잡함이 한순간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 그러나 한밤중의 김포가도, 저기 저곳에 수백개의 헤드라이트가 줄을 긋고 있었다. 10여 리에 걸친 길고 긴 트럭의 행렬이었다.
혁명군 해병대가 서울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박정희 장군의 지프가 멈추어 섰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 싸늘한 밤공기 속에 박정희 장군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병대는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아니라, 오로지 해병대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던 것이다. 또한 육군의 장도영 장군이 직접 해병대와의 통신연락을 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해병대가 혁명군으로 출동함은 숙명적이었던 것이다.
해병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15일 밤 11시를 기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발한다.
“명일 아침에 적 공수부대에 대한 역습훈련이 있으니 참가부대인 제2연대 1대대에 탄약을 보급하라”
이윽고 해병대는 계획대로 밤12시에 부대를 집합시켰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군목인 김광덕 대위로부터 혁명성공의 기원을 받는다. 16일 새벽 1시, 해병대는 선두에 제2중대를, 그리고 후미에는 제5중대를 세운 채 대대장 오정근 중령의 지휘 하에 구국의 일념으로 장도에 올랐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탱크부대에 지시하여 새벽4시에 출동토록 명령하고 즉시 차를 달려 부대후미에 따라붙었다.
부대선두가 공격개시선으로 약속된 염창교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시간보다 15분이 늦었다. 염창교에는 혁명지도자 박정희 소장이 감격스런 표정으로 해병대를 맞이해 주었다. 육군측의 배신으로 혁명군이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김윤근 준장은 박정희 소장과 함께 정면대결로 나아가기를 검토한다. 아울러 공수단을 선봉군으로 삼으려 했던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해병대를 제1진의 선봉군으로 삼고 공수단은 제2진으로 삼았다.
역사에 찬란히 기록될 1961년 5월 16일 새벽3시, 혁명군 전초부대 해병대가 한강 인도교에 도달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한강물소리만이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인도교 너머 저쪽 서울시내는 밤의 전등불들이 조는 듯 아늑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한강 인도교 돌파작전을 감행한다. 혁명군 전초부대인 해병여단 제2중대가 인도교를 들어서다 잠시 전진을 멈추었다. 선두차의 승차원이 모두 하차하는가 싶더니, 해병 제2중대장 이준섭 대위가 뚜벅뚜벅 인도교로 나아간다. 옆구리의 권총이 차갑게 마찰되었다. 이준섭 해병 대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헌병 제7중대장인 김석율 대위와 악수를 교환하였다. 해병 대위는 헌병 대위에게 혁명군임을 알리고 인도교에 무겁게 내리워진 바리케이드의 철거를 정중히 요청했다. 헌병 대위는 간단히 거절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으로 이곳을 경비하고 있으며 혁명군을 저지시키기 위해 출동했습니다. 불응이면 사격하겠으니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에 해병 대위는 발끈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우리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는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해병이다. 우리는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부대다. 빨리 장애물을 제거하라.”
한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는 두 대위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2) 제1선 바리케이드가 인도교 남단에 GMC 2대를 八자형으로 해서 다리를 메우고 헌병 20여명 가량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제2선 바리케이드는 GMC 3대로 역시 八자형을 이루어 인도교 중간을 막고 있었으며 마지막 보루인 제3선 바리케이드 역시 GMC 2대로 八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강도하가 저지된 것을 확인한 해병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전 해병에게 하차명령을 발했다. 헌병들이 길을 받는다면 그들과 총격전을 벌리는 한이 있어도 혁명은 기필코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라고 오정근 중령은 판단했다. 병력들이 GMC에서 하차한 것과 한강에 주둔했던 헌병들의 사격과 어느 것이 앞서 일어난 행동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헌병들의 위협사격이 시작되었고 하차한 해병들은 한강 인도교 저편에 빠른 동작으로 산개했다. 선두차에 탔던 해병 제2중대 병사들의 포복이 시작되었다. 탄우를 뚫고 포복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었다. 제1선의 바리케이드가 그들의 손으로 제거되었다. 총탄은 밤하늘에 빨간 여운을 길게 그리며 빗발처럼 옆을 스쳐갔다. 해병들은 이제 제2선 바리케이드 제거를 위해 인도교의 난간을 따라 포복을 계속했다. 제2선 바리케이드도 무너졌다. 전투는 점점 본격화되었다. 서로간의 위협사격이 어느새 무차별 사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제3선 바리케이드를 향해 용사들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제3선 바리케이드에서 낮처럼 밝은 헤드라이트가 비쳐왔다.
제3선 바리케이드에서 헌병 40여명 가량의 무차별 사격이 가해오고 있는 것이다. 해병들은 장애물에 막히면서도 좁은 난간을 따라 계속 포복을 하여간다. 혁명군 쪽의 지원사격도 가열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다시한번 6.25의 전상을 되씹고 있는 것이다. 해병들과 헌병들의 치열한 사격전은 혁명군으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인도교에서 머물게 했다. 마지막 보루인 제3선 바리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작열하는 총성속에 전진하던 해병 제2중대에 부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대장 이준섭 대위를 비롯해 7, 8명의 사병이 총상을 입었다.
완강한 헌병들의 저지사격은 해병 제2중대에 예기치 않았던 총격전과 부상자를 내게 하면서, 혁명군의 전진을 지체케 하고 있었다.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제1중대로 하여금 제2중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선두에 나가도록 명령했다. 이제 제2중대는 뒤로 서고 정비된 제1중대가 앞에 섰다. 치열한 응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3선 바리게이트 GMC헤드라이트가 해병들의 직격탄에 파열되면서, 인도교는 다시 암흑의 세계로 변하였고 그제서야 헌병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강 인도교는 혁명군의 전진을 거의 1시간 동안이나 묶어놓고 있었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고, 참으로 길고 긴 인도교였다. 헌병들이 물러가고 제3선 바리게이트가 철거되면서 이윽고 해병들과 그 뒤를 이어 공수단 병력들이 한강을 도하한다.
서울진주
(1)한강 인도교에서 해병들과 헌병들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 지역을 담당하던 용산경찰서는 새벽 3시의 총성을 단순한 오발사건으로 생각해 버렸다. 관내 파출소에 연락해 보았으나 장소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소리가 연방 계속해서 울리자 시민들의 문의전화가 용산서로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시민보다 담당자인 경찰측이 더 했었다.
3시 40분쯤 북한강파출소로부터 해병들이 육군헌병들과 충돌하여 인도교를 포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왔다. 그러나 용산서는 이것도 단순한 충돌사고로 생각했다. 3시 50분쯤 잠을 자다가 유탄을 맞고 부상당한 신계동의 한 주민이 차에 실려 왔을 때 용산서는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4시가 약간 지나서 해병대가 경찰서 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그들은 상부로부터 하등의 지시도 받지 못했다. 당황한 일부 경찰관은 줄행랑을 놓았고 적대행위를 하던 경찰관은 모두 연금되었다. 이제 해병대와 공수단은 인도교를 건넜다. 캄캄한 밤, 장도영 장군의 명령에 따르는 진압군의 공격이 언제 어디서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차피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 혁명군들은 앞에총의 자세로 긴장감 속에 한발 한발 서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한강로를 지나갔다. 삼각지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혁명군들은 무장한 정체불명의 수많은 군인들이 어두움 속에 길 양편으로 도열해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손에는 M1소총이 쥐어져 있었고 밤하늘에 희끗희끗 번쩍이는 대검들이 꽂혀 있었다. 일순간 진격하던 해병들이 주춤했다. 적인가 아군인가, 식별이 되지 않는 군대이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면 적일 뿐이다. 해병들은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그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아, 그들은 적이 아니었다.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군대는 혁명계획에 입각하여 미리 육군본부 광장에 스며들었던 제6군단의 포병단이었다. 그들은 인도교의 교전으로 인하여 늦게 진입해 들어오는 혁명군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었다. 삼각지에서 조우한 혁명군들의 표정에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선의의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은 모두 “시내는 조용하니 차를 타고 가라.”고 외쳐 주었다.
6군단 포병단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해병대와 공수단은 시가전의 위험이 없음을 알자 곧장 차에 올랐다. 한강 인도교의 격전으로 말미암아 늦어진 계획시간의 차질을 메꾸어야 했다. 박정희 장군은 손수 공수단 1개소대를 이끌고 남산 중앙방송국으로 달렸다. 해병대와 공수단 주력부대는 서울역 방향으로 달렸다. 서울역 앞에는 약간의 경찰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가볍게 그들을 격퇴시킨 혁명군은 이제 그들이 맡은 목표지점을 향해 힘차게 GMC의 페달을 밟는 것이다. 해병대는 치안국과 시경이 그 점령목표였다.
치안국 점령을 명받은 해병 제3중대와 제6중대는 4시 30분경 치안국을 완전히 포위했다. 중대장의 발포를 신호로 일제히 담을 넘어 뛰어 들어갔다. 개머리판을 옆구리에 댄 체 구부려쏴 자세로 밀려들어오는 해병들...... 이 광경을 본 내무부 차관 및 각 과장들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다. 시경은 해병 제1중대와 제5중대의 담당이었다. 별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접수되었다. 지하실에 숨어있던 경관들이 스스로 총을 버린 채 걸어 나왔다.
여세를 몰아 해병 1개 소대는 시청을 지나 중앙전신국으로 달렸다. 유선망의 운용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전원실의 퓨즈가 해병대 장교에 의해 절단되었다. 야간근무를 하던 여자 교환수들은 놀라서 토끼처럼 뛰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공산반란군의 침입으로 오인하고 무척 당황해하였다. 하지만 해병대 장교의 설명으로 비로소 혁명군임을 알고 안심을 하는 것이었다.
(2) 공수단 일개소대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방송국을 점령코자 출발했으며, 또 일개소대는 혁명공약, 선언문 등을 인쇄하고 있던 광명인쇄소에 급파되어 경비임무를 담당했다. 이곳에는 김종필 중령 등이 돌아가는 윤전기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 외 공수단 주력은 시청 앞에 그 지휘본부를 두고 반도호텔을 점령하고 장면총리 이하 정부요인 체포의 임무에 당해 있었다.
행동대는 반도호텔로 직행하고 병력의 일부는 장면 총리의 퇴로차단과 광화문과 미 대사관 주변에 잠복했다. 그러나 반도호텔 808호실은 텅 비어있었다. 혁명군 도착 15분 전에 이미 장 총리 부부는 호텔 동쪽 문을 빠져나와 미 대사관을 거쳐 혜화동 방향으로 도주한 뒤였다. 반도호텔을 포위하고 있던 공수단은 장면총리를 놓쳤으나, 혁명급보를 듣고 장면 총리를 만나러 반도호텔로 달려온 현석호 국방장관과 한통숙 체신부장관 및 김업 국방부 사무차관 등 정부요인을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한 공수단 1개 소대를 이끌고 중앙방송국을 접수한 박정희 장군은 공산반란군으로 착각하고 도망쳐버린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찾느라고 고생을 했다. 원래 중앙방송국에는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시로 헌병 60명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장군 일행이 도착하기 10분전, 그러니까 4시 20분경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취를 감춰버린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우여곡절 속에 겨우 찾아내면서 그들은 예정대로 새벽 5시에 가까스로 혁명의 방송을 내어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의 소리는 그 순간에도 혁명을 반대하고 있는 장도영 장군의 이름으로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감격어린 혁명 제 1성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졌다. 육군항공학교장 이원엽 대령이 여의도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이 대령의 지시로 몰래 상경한 교관조종사 5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 대령의 지시대로 기꺼이 하늘에 떠서 새벽의 서울거리에 10만장의 혁명전단을 살포했다.
5월 16일의 아침은 몹시 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19는 저공비행을 감행하면서 혁명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시위편대로 힘차게 하늘을 날아서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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