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해병대

머린코341(mc341) 2015. 6. 7. 20:26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해병대 

 

차례


1. 516혁명과 해병대
2. 자업자득으로 무너지는 해병대
3. 박정희와 해병대의 불꽃티는 수싸움
4. 전두환의 해병공수 폐지
5. 기타 해병대와 여러가지


박정희 대통령과 해병대의 배신


1. 5.16혁명과 해병대 (박정희와 해병대)


1960년 2월 박정희는 육군소장으로 부산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취임한다.


1960년 2월 박정희는 해병1사단장 김동하 소장과 부산 동래온천장에서 회합을 가진다.


이때 회합주제는 혁명을 하고난 다음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였다.

 

그 이후로 박정희, 김종필, 김동하(해병1사단장)... 등은 계속적으로 만나면서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날을 1960년 5월 8일로 D-day를 정한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4.19의거가 발발하면서 계획은 차질이 왔다.


1960년 9월 12일부터 서울 명동 충무장 등에서 박정희는 육사 8기생을 주축으로 한 후배들 그리고 해병 김동하소장 등과 다시 거사의 날을 꾸민다.

 

그래서 결국 이듬해 1961년 5월 16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날 새벽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6개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이들은 미국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내각의 총사퇴, 윤보선대통령의 군사혁명 인정에 힘입어 합법성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3년 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 후 혁명과업 완수 기간 중 대한민국 최고 통치기관. 사실상 별 둘인 소장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별 넷인 육군대장 장도영이 최고의장이 되어 최고 통치권자가 된다.

 

거사에 직접 가담했던 각군의 참가자들은 한자리씩을 맡게 되고 이 과정에서 파벌이 나누어지게 된다.


소장 박정희 파와 5.16쿠데타를 뒤에서 그냥 눈감아 주고 최고의장이 된 육군대장 장도영 파로 나우어진다.


이 때 해병대는 별 둘인 박정희보다 당시 더 큰 영향력이 있었던 대장 장도영 세력에 붙는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 장도영 세력도 야심만만 박정희에게 밀려나고 최고의장의 자리는 박정희의 손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516은 철저하게 박정희와 해병대의 주도아래 발생되었으며 이것을 결과로 해병대 주도세력은 모두 한자리씩 하죠.


물론 이런 약속없이 총살을 각오하고 쿠데타에 주동세력으로 가담할리도 없었겠지만 그러다가 박정희가 기대와는 틀리게 완전히 장악을 못하자 돌변해서 보다 더 낫다싶은 쪽으로 자리를 틀어버린다.


이것이 해병대가 박정희의 미움을 사는 바로 그 역사의 시작이다.

 

2. 자업자득으로 무너지는 해병대

 

박정희 대통령은 군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장성 출신 대통령이었다.


당시로선 해병대만한 쿠데타 조력세력은 없었다. 박정희는 해병대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성공하지만 해병대의 배신으로 대통령권좌에 올라선 뒤에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또다시 해병대가 서울로 진입해 온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하고 권력을 고스란히 내주는 전대의 실수를 되풀이 해야됐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무서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남로당사건으로 특무대에 끌려가 죽음직전에 이를 정도의 고문과 그 주동세력을 고발하는 대신 겨우 목숨을 건질수 있었던 그의 처절한 젊은 장교시절이 있었기에 그를 더욱 독한 인물로 변할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쿠데타 실패란 곧 총살을 말한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시도 할수있는 모험은 아니다.


죽기아니면 살기의 처절한 각오와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함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뒤 군부를 대대적으로 정리한다.


반대세력은 철저하게 숙청과 견제가 이어진다. 감히 어느누구도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통치가 이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의 혁명의 주체였던 해병대가 가장 눈에 거슬리게 된다.


수도서울에서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해병대 사단과 여단 병력이 집중되어 있다.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박정희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미국의 월남파병 요청이 있었다. 절호의 기회다. 항상 눈에 가시였던 수도권 지역의 해병대를 멀리 보내버릴 수 있있던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한동안 평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잠시. 죽어라고 보냈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해병대.


그것도 역전의 공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태우며 돌아온 해병대.


박정희는 더이상 주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급한 박정희.

 

해병대사령부 해체. 해군 밑으로 복속시키고 모든 인사 행정 군수 ... 해병대의 실권을 해군의 그늘밑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을 눈가림 하기위해 해병대 기념관을 하나 건립해준다.


말그대로 눈가리고 아웅하기다. 오늘날 해병대는 이렇게 말한다. 박대통령님은 해병대에 기념관을 건립해주신 고마우신 분이라고.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당시로서는 우리군에 해병대만한 특수군은 의연 없었다.


당시 60년대 70년대 최고 정예부대의 상징이었던 얼룩무늬 군복은 공수단,해병대,공작단 만이 입을수 있었다.

 

월남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공을 세우고 돌아온 해병대에게 상 대신 사령부해체와 함께 해군산하로 복속시키고 정예군의 상징인 얼룩무늬 위장복을 벗겨 버린다. 대신 회색(약간 초록색과 중간)의 작업복이 주어진다.

 

그리고 철저하게 정규군편제와 임무로 완전 이전된다. 더 이상 특수한 면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조치된다.

 

물론 그 이전의 해병대도 정규군이었으나 한국군 실정에선 하나의 거대 특수군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시각이다.

 

그 뒤 해병대는 그 이전의 특수군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년 2년 10년이 지나면서 해병대는 서해안 방어군의 이미지 그 이상은 존재치않게 된다. 인사 군수 각종 지원에 있어서도 돌이킬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3. 박정희와 해병대의 불꽃티는 수싸움

 

박정희는 단지 해병대만을 견제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부국강병을 실현한 대표적인 지도자로 그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한국전이후 무일푼의 경제를 수출산업국으로 끌어올리고 무상원조로 유지하던 군을 아시아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군으로 끌어올린 대통령이다.

 

해병대라는 상륙돌격군을 방어용 군으로 사용하고도 그 세력을 견제해야 했던 박정희는 특수군의 또다른 필요가 요구됐다. 5,16쿠데타 당시 중핵을 맡았던 공수단은 불과 2, 3백명 밖에 되지 않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불만에 쌓인 해병대의 반란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대규모 증편을 계획하고 해병대의 수도권 진입을 저지키 위해 김포,인천,부평 등 해병대의 수도권 진입 길목에다가 증편한 특전사 병력을 심어 놓게 되는 것이다.


4. 전두환의 해병공수 폐지

 

당시 해병대의 반란 이것은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전체군을 장악하고 있는 육방부의 손안에서 해병대 쿠데타 시도란 꿈꾸기조차 힘들어지게 된다.


70년대 말 해병대에 공수대가 생기게 된다. 아무리 해병대의 수도권 진입을 특전사와 기계화 부대들이 막고 있다고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샘이다.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청와대로 바로 전격점령을 실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공수대가 창설된 것이 항간에는 입체상륙전이 목적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도 많은 것은 또다른 일면이다.

 

상륙작전 자체가 완전불가능한 나라에서 상륙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수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조수단인 해병공정대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해병공정이란 명목은 당시로선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명분없는 쿠테타정부로서는 최대의 불안요소가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5. 기타 해병대와 여러가지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면서 629선언 등으로 역사는 어지럽게 전개된다.


당시 후일담으로 이미 알려졌지만 당시에도 군부 일각에선 쿠데타를 모색했다고 한다.


여기에 주도적인 힘을 실을줄 군은 과연 어디였을까. 육군이 주도했지만 역시나 2만5천에 이르는 해병대, 만감이 교차하는 억눌린 해병대가 끌어들이기 영순위가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이치.


만약 누군가 쿠데타를 하게된다면 말이다.

 

해병대 큰무뉘 위장복의 등장


해병대는 정예군의 상징인 얼룩무뉘군복이 벗겨진 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다가 벽돌무뉘 위장복이란것을 자생적으로 만들어낸다. 국가에서 공인해준 정식군복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위상확대를 위해 개발해 낸 것이다.

 

군사정부는 이것을 대수롭게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다. 국군의 날 행사에도 입고나와도, 휴가때 입고나와도 무방할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단호한 조치가 치해진다. 국가비공인군복을 완전소멸시키고 부대마다 제각각인 군복에 일침이 가해진다. 그리고 3군 군복통일을 대대적으로실시하게 되는것이다.

 

해병대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해병출신만이 아니다.


전국민이 다아는 사실이다. 이젠 육군과 거의 다를바없는 그런 부대 중에 하나로 보는 시각도 낯설지만은 않다. 정규군으로 육군과 별 차이없는 훈련과 임무를 가진 해병대를 대단하게 본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을까한다.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해병대의 위상 몰락은 다른한편으론 우리 인간사와도 흡사하다 하겠다.


강하면 견제받기 쉽고 뻣뻣하면 태클로 걷어차이기 쉬운 우리 인간사.


강할 수록 세력의 흐름을 빨리 캐치해서 어디로 손을 뻗어야 될 지 현명한 처신을 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는 결과만이 기다리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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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suddenstrike2.co.k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