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22) 헌병 수사과, 자폭
헌병대 색터 외곽 벙커 순찰
헌병대는 헌병대대로 할 일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한 번은 청룡(여단)부대 본부에 나와 있는 미 해병대 중위와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병과가 무엇이냐고 물어 헌병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는 말을 했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Easy job" 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물론 임무야 생명을 앞세우고 전투에 여념이 없는 전방 소총소대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의 일이 따로 있는 법이라 마냥 한가롭거나 쉬울 수만은 없었다.
10월 어느 날 오전, 내 자리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을 때였는데 난데없이 내가 있는 수사과 문 앞에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누가 내 어깨를 뒤에서 확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뒤로 재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나는 적이 겨냥한 로켓포가 내가 있는 사무실 바로 앞에 떨어진 줄로 알고 얼른 사무실 뒷문을 계단도 밟지 않은 채 뛰어 넘어 벙커 속으로 몸을 날렸는데 얼마나 날쌨는지 벌써 백 상사의 히프가 내 얼굴보다 먼저였다.
그러나 곧 돌아서며 나를 바라보는 백 상사의 표정은 갑자기 평소와는 달리 마치 겁먹은 아이처럼 목에서 번져 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닦아 나에게 보이면서 연신 울먹이는 소리로 “과장님~ 과장님~” 하고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직접 전투를 해본 경험도 없는데다 일주일 후면 1년의 근무를 모두 무사히 마치고 귀국선을 탈 사람이라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철철 흐르는 피도 아님을 알았던 나로서는 잠시 한편의 코미디 같은 느낌이 들어 웃음을 웃으며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치우게 했다.
목을 드려다 본 나는 역시 추측했던 대로 몇 개의 파편이 피부를 할퀴면서 지나갔을 뿐 깊이 박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무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뭘 야단이야~ 안 죽어!”
하고 큰 소리를 쳤더니 그제 서야 그도 마음이 다소 놓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막상 백 상사에게 빼앗겼던 정신을 돌이키고 나니 이제는 내 목이 쓰라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손바닥으로 따가운 곳을 쓸었더니 역시 내 목에서도 피가 손바닥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럴 즈음 내 사무실의 반대 방향에 있는 보안과에서는 내가 있는 수사과 쪽의 혼란을 바라보기가 용이했던지 벌써 상황을 알고 엠불런스를 부르라는 대원들의 소리와 함께 포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방송을 하듯 우리 쪽을 보고 외치고 있어 나도 벙커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사건의 내용은 전방에 있는 어느 대대장의 요청에 의해 평소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수류탄을 쥐고 말썽을 피우던 한 대원을 헌병대로 압송을 하게 되었는데 연행 책임을 맡았던 수사관이 그만 사전에 해야 했던 몸수색을 소홀히 하여 결국 큰 문제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평소 문제의 대원은 수류탄 하나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그가 헌병대로 연행이 될 때도 자기 아랫배에다 수류탄 하나를 감추고 있었던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막상 헌병대 수사과의 출입 문턱을 눈앞에 두자 그는 수간 무슨 마음이 들었던지 수갑을 찬 채로 자기 아랫배 쪽에 감추어 두었던 수류탄의 핀을 뽑았는데 그만 자폭이 되고 말았던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만약 헌병대에서 임무 수행을 하다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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