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41기 원명복

청룡3대대 11중대 3소대 전투이야기 - 참전수기 2편

머린코341(mc341) 2015. 6. 9. 08:13

청룡3대대 11중대 3소대 전투이야기 - 참전수기 2편

 

 

나) 11중대 당시 근무형태


11중대의 1970-1971년도 당시의 근무형태를 설명하면,


- 3개 소대 중(순번제) 1개 소대(2개 분대 + 경기관총 분대)는 매일(24시간) 전술 책임지역을 주간에는 중대장이 지시하는 지역을 수색/정찰하고, 정보에 따라 명령에 의한 주간매복을 하고 있다가, 야간에 매복지점에 소대매복을 하게 되고, 주로 일출 전에 복귀하며, 그 외 기지내 잔유 2개 소대는 1개 분대씩 일몰 직전, 야간매복에 진입시키고, 일출 전에 복귀하였다.


  그러니까, 전술 책임지역 내에는 항상 주간에 1개 소대가 나가 있고, 야간에는 1개 소대 및 2개 분대가 매복을 하였다.


- 기지내에는 1개 분대씩 없는 마이너스 2개 소대와 당일 출동중인 소대의 잔류한 분대 및 잔류 인원으로
  준비된 외곽진지에서 근무편성표에 의한 진지 당 2명씩, 2시간씩 교대하는 방법으로 기지방어를 하였다.


- 출동소대 편성은 통상 게릴라 전 소규모 전투에 대응하여 지휘와 기동이 용이한 분대 7명으로 하여 2개 분대 14명, 경기관총 분대 5명, 통신, 공병, 위생, 전령, 포함 총24명으로 하였으며, 야간 매복분대는 7명으로 하였다 (참고 : 완편 소대44명,분대13명).


- 수색/정찰 및 매복대 진입시 행군 대형은 1열 종대로, 개인 간 거리를 부비츄랩 폭발에 대비한 최소 피해 거리 7~8미터를 유지하였다.


- 화기 편성은 원래 소대장은 권총이나, M16소총을 소지하였으며, M79유탄발사기 분대당 1정과 실탄 다수,
  66미리 로켇트 분대당 2발, 크레모아 분대당 최소 3발, 수류탄 개인당 4발이상, 조명탄 개인당 2발 그리고 M16소총이였다.


다) 전투 상황


  지금부터 회고하여 기록하는 전투상황은 내가 1970.7월 중순부터 동년 11월 초순까지 약4개월여의 기간동안
  11중대 3소대장으로 복무 중, 나의 소대원들과 생사를 넘나들며 겪었던 전투 Documentary이다.


  그리고 군인이란 적과의 대적시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진리로, 본의 아니게 사람으로써 해서는 안되는 몹쓸 행동을 자행하게 한다.


  당시 나는,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고, 나의 부하를 살릴수 있다는 관념을 항상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고, 


  10여명의 Vietcong들이 나를 포함한 나의 소대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4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전쟁으로 희생된 그 Vietcong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또한 “소대장님 나는 괜찮으니 분대장에게 가 보세요”하며 절규하는 부하의 상처 투성이 몸뚱아리와 나뭇가지에 걸쳐있는 분대장의 절단된 두 다리를 찿아, 주검과 함께 판쵸에 담아, 나의 손으로, 메드백 헬기에 실어 보낸 처참했던든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사한 분대장의 묘지참배나, 같이 부상당한 부하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이 회고록으로 인하여 깊이 반성하게 됐다.
 
⑴ 첫 전투

 

 

7월 말경 어느날,3소대가 순서에 의한 출동 날이었다,


 일출과 동시에, 오늘 나갈 소대원들의 군장 검열을 실시하고, 상황실에서 막걸리(암호)와 정찰로 좌표를 수령하고, 관망대 근무자에게 소대의 출동을 알리고, 중대 후문과 사격장을 통과하여, 이번에도 무사하기 비는 마음을 간직한체, 1열종대 대형, 개인 간 거리를 유지하면서 목표지점을 향하여 나아갔다.


 우기철이라 오전에는 구름이 덮혀 시원한 날씨를 유지할것 같았다.


 이번 정찰로는 마을 공동묘지를 돌아 동쪽 강을 따라 철모대가리 아래 고목나무 앞 개활지를 정찰하는 전술 책임지역을 반 시계방향으로 도는 정찰로였다.


 좁은 전술책임지역의 정찰로는 3일에 한번씩 나가는 곳이라,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찿아 가는데는 숙달되어있지만, 적이 우리의 진입로를 간파하고 진입로 앞에 매설할 부비츄랩을 생각하여 기도비익과 주변상황을 예의 주시하여야 했다.


고목나무 앞 개활지를 통과 할 즈음,시간이 13시 반이라, 나는 식사 겸 휴식하기 위하여, 사방이 나무와 숲으로 은폐 되어 있고, 소대가 산개하여 점령할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선택한다음, 분대장들에게 분대별 휴식장소를 지정해주고, 동서남북 4곳의 경계병을 세울것을 지시하고 식사와 휴식 할 것을 명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10분이 지날무렵, 남쪽 경계병으로부터 적 발견 신호가  왔다고 1분대장이 직접 뛰어와 보고했다.
나는 확인하기 위해 분대장과 함께 남쪽 경계병 있는곳으로 갔어 전방을 살펴보니,2시방향 150미터 지점, 개활지 가장자리를 따라 소대집결지 앞으로 5명의 사람이 지나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양민인지 Vietcong인지 확인도 해야하고, 또한 공격시 소대원의 피해도 판단을 해야했다.


어떠한 경우라 하드라도,“소대원의 피해가 있을 위험 부담을 안고는 먼저 공격하지 않으리라” 하는 나의 신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옆에 있든 분대장이 갑자기 “소대장님 막대기(AK소총)가 보입니다”  라고 말하기에, 전방을 주시하니,
5명 중 한명의 어께에 메고있는 막대기가 선명하게 나의 눈에 확인이 됐다.


분대장에게“잡아보겠느냐”라고 물으니,“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1분대 대원들을 앞으로 오도록 하고,
2분대장과 경기관총 분대장을 불러 상황 설명과 동시에 경기관총 분대로 하여금 11시방향 저쪽 논두렁에서
명에 의거 지원사격하도록 하고, 2분대는 후방 경계를 하도록 지시했다,

 

 

상황조치를 하는 동안,5명의 Vietcong들은 소대 정면 150미터 지점을 통과하여 10시방향 200미터 지점을 가고 있었다.


1분대장에게 아군의 피해를 감안하여“150미터까지 접근하여 조준사격하되,도주하는 적은 절대 쫒아가지말라”라고 당부하고 돌격 명령을 하였다.


50여미터 전진하고 횡대대형으로 배치하여 사격자세를 취하더니, 고요한 적막이 굉음으로 바뀌면서 30여초 동안 콩 볶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마치 훈련소 사격장의 사격하는 소리 같았다.


이때 중대상황실의 무전기 호출 소리가 요란하고, 급기야는 중대장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린다.“가을밤, 가랑비 가을밤, 가랑비”소대장 호출 소리이였다.

 

나는 그 시간에 분대장으로부터 수신호로 상황이 종료 되었음을 감지하고, 1분대가 있는 지역으로 뛰어가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뒤따라 오는 통신병의 송수화기를 잡을수도 없었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뻔한 소리일 뿐!


분대장이 있는곳에 도착하여,중대장에게“상세상황을 조금 후 보고하겠습니다”라고 교신후 일방적으로 무전기의 스위치를 off로 돌려버렸다.


상황발생지역을 수색하기위해 분대와 같이 전방으로 전진하여, 분대로 하여금 사주경계 하도록 지시하고, 분대장과 통신병,위생병,전령을 대동하여 상황 발생지역 근처를 수색했다.


전과는, 20-25세로 보이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여자와 이미 주검이 된 20대 후반의 남자가 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여자는 위생장비(가위,핀셋,붕대,약간의 약품 등)를 허리에 차고 있었어며, 남자와 여자 공히 수류탄은 손에 들고 있었으나. 아쉽지만 막대기는 없었다.

 


 

여자가 눈을 뜨고 있기에, 갑자기 영화에서 죽은자의 눈을 손바닥으로 감겨 주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아직 온기가 감도는 뜬 눈을 나의 손바닥으로 감기려 하였으나 이미 눈꺼풀은 굳어버려 감기지 않았다.


그리고,여자의 몸에서 월맹군 장교로 보이는 20대 남자와 나란히 어깨에 팔을 걸치고 정다운 자세로 찍은 사진 한 장이 손수건에 싸여 나왔다.


순간 내 마음이 뭉클하여,그 사진을 가지고 귀국하여 내 사진첩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버렸는지 지금 찿아보니 없어져 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 여자의 숨 넘어가는 창백한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중대장에게 동안의 상황과 전과를 보고하고, 다음 임무인, 야간 매복을 위하여 마을 근방으로 출발했다,


오늘 나에게는 첫 실전이라 가슴이 벅차고, 벙벙하였다.


그래서, 소대원들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할것 같은 판단으로, 오늘은 참호를 구축하지 않고 공동묘지를 야간매복지로 선정하였다.


월남묘지는 가운데가 오목하여 흡사 구축한 진지처럼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달은 휘영청 밝은데,바로 아래에는 죽은 시체가 있고, 그 위에 내가 있었으니, 그날 그 묘한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 할 수 없었으며, 지금도 그 감정이 남아 있는듯하다.


 계속 이어집니다..

 


출처 : 해병대 185기 호이안朴 선배님 블로그
         http://blog.daum.net/parkky123/801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