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1)
1967년도 저물어 가는 츄라이 전선에서 우리는 또 다시 낯선 호이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츄라이 전선이 어느 정도 평정되었을 때 였기 때문에 비교적 청룡부대는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되었는데, 그 결정적인 요인이 년초에 있었던 짜빈동 대첩의 결과 였던것같다.
짜빈동에서 주력을 잃은 적은 그후 크고적은 전투에서 지리멸멸 하게되고, 청룡과 전투하기를 기피하고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포병은 직접 적과 교전을 해야 하는 보병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신변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으나, 적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괴멸 시켜야 할 최대의 적이고, 그 대상이었기 때문에 늘 적의 제 일의 공격 목표여야 했다.
전장에서 보병 전우들의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우리포병은 늘 보병전우들에게 고마움과 경의를 표하곤 하는데, 보병전우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믿을곳이 포병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신뢰" 전장에서 전우들이 서로 믿는다는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또한 대한민국 해병대 포병은, 즉 해포의 정확하고 신속한 사격술은 세계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고, 그 명성은 월남 전쟁에서 확인된바 있다.
호이안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우리 정보장교(황 모소령)는 미 해병으로부터 진지 인수를 위해 최 광익 병장(정보 병)을 대동하고 선발대로 호이안으로 출발했다.
황 소령은 영어가 유창한분인데, 추라이에서 귀국할 입장이었으나 진지 인수문제로 한발 앞서 호이안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내심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부대는 이동을 위하여 개인 화기를 제외한 장비를 완벽하게 포장을 하고 출발 대기상태였다.
출발을 몇일 앞둔 어느날 저녁 무렵 정보장교와 수행했던 최 수병이 돌아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등은 온통 진흙으로 갑옷을 입은것 같았고, 얼굴은 요즘말로 머드 팩을 한것 같다.
놀라서 묻는 우리들에게 최 수병이 말했다.
"정보장교님이 추라이에서 귀국 해야 한다고 해서 급히 돌아왔다."는 것이다.
호이안에서 기다렸다가 본대와 합류한후 귀국해도 되었는데 전장에 단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다며 돌아가자고 해서 찦차로 횡단해서 돌아왔는데, 아직 적정이 파악되지 않은 곳이므로 최고속도를 내며 달렸기 때문에 진흙이 튀어서 몰골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여단본부에 집결 했다가 LST에 장비를 탑제하고 이동해야 되었기 때문에, 여단으로 이동한후 몇일간의 여유가 있었다.
여단으로 이동한뒤 이, 삼일 지났을까? 하는 날 몇사람의 전우와 우리대대가 있던 곳으로 나가보았다.
우리대대가 있던곳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 저게 뭐지?" 누군가 놀라서 말 했다.
우리부대가 있던 곳에 그 마을 주민들이 포탄 탄피며, 포탄상자등 우리가 버리고 떠난 것들을 뜯어가기 위해 개미새끼(?)처럼 모여들은 것이다.
LST에 장비를 탑재하고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포, 포차, 찦차등 중형장비들은 굵은 쇠사슬로 단단히 옥죄어 매고, 출발을 한다. 바다로 나오니 집채만한 파도들이 몰려온다. 배가 좌우로 핏칭을 하고 앞뒤로 로링을 하는데 아직 까지 그렇게 큰 파도를 본일이 없다. 갑판위에 장비들이 금방이라도 바다로 곤두박질할것 같다.
이미 호이안 하늘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우리들은 도착도 하기전에 자연과 전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 저 호이안에선 또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어가야 할까?
다낭항에 입항을 하고 상륙을 한다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수 있었다.
그 엄청난 파도와 싸우며 우리는 드디어 다낭항에 도착 했고, 곧이어 트럭에 분승하여 호이안 진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6중대를 디엠반에 남겨두어 대대를 지원하게 했는데, 이는 추라이에서 7중대가 담당했던 임무교대인 셈이다.
호이안 포병대대는 국도에서 여단 본부방향으로 조금 들어와서 우측으로 5중대가, 그리고 부대안 도로를 가운데두고, 맹호 A포대(155m/m) 그리고 다시 그 우측으로 7중대, 다시 그 우측엔 미 해병 일개포병중대(?)가 배속되어 있었고, 그 우측으로 본부중대 외곽 초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부대위치를 정하고 나서 진지를 돌아보던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말이 진지였지 포진지외에 병사들의 벙커가 없을 뿐 아니라, 잔류하고 있는 미 해병포대는 콘셑건물에서 생활 하고 있었다.
우리가 행정을 보아야 할 사무실은 지상에서 약 70cm 정도 띄워서 함석과 합판으로 만들어 져 있었다. 사무실이야 츄라이에서도 그랬으니 새삼스러울것도 없지만, 당장 FDC를 비롯한 병사들의 내무생활을 해야 할 벙커가 필요했다.
도대체 미 해병은 어떻게 이렇게 하고 생활을 했를까?
대답은 간단했다. 적의 기습은 물론 포(60m/m나 81m/m)공격도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을 역순으로 말 한다면 미해병은 적에게 그렇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된다. 미군이 사격을 하지 않는한, 적도 공연히 미군을 건들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해병은 차원이 다른 부대이다.
여러번 강조한바 있지만 월남의 지형을 포 사격으로 바꿔 놓겠다는 이 갑석 대대장의 후임 김 해근 대대장 역시 월남 땅에 놀러온것이 아닌 해병인 바에야 아군지원을 위한 사격을 멈출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는 다음 날부터 필요한 벙커는 물론 대대수뇌부가 근무할 FDC(작전 상황실)를 만들기 시작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내가 아들이 근무하던 연평부대를 방문 했을때, 대원들에게 한말은 "세계에서 포 진지나, 벙커를 가장 완벽하게 만드는 부대는 대한민국 해병"이라고 자신있게 말했거니와 지금 여기 호이안에서 우리 청룡은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모래 땅인 그곳에 1m 정도를 파낸후에 수천 수만장의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쌓아올린다.
지붕은 아름드리 통나무나 다듬어진 목재로 대들보를 얹고, 그것을 중심으로 철조망 지주를 이용해 석가레를 놓는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샌드 백(모래주머니)을 얹어 적의 어떤 화기공격도 무력화 시킬수 있는 완벽한 요새를 구축해 갔는데, 각부서마다 자신들의 벙커는 자신들이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작업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리 포병대대가 빠르게 진지가 완성되어야 보병지원을 할수 있다고 판단 되기 때문이다.
또 적이 곧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기도 했으므로 진지 구축작업은 쉴틈이 없었다. 완성된 벙커의 출입구 앞에는 출입구 보다 더 높게 바리케이트를 두텁게 하라고 지시했다.
하나, 둘씩 벙커가 완성되고 있던 어느날 68년초 적의 대대적인 구정공세가 있기 전으로 기억 된다.(이글을 올리고 난후 부산에서, 이 날이 68년 5월5일 이라고 제보 해 왔습니다 만, 왜? 그때까지 출입구 앞에 바리켓을 못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초저녁에 적의 81m/m 몇발이 대대진지에 날아왔다.
우리 대원들은 이상하게도 박격포 정도는 포라고 여기지 않는듯 했다.
이미 구축한 벙커위에서 " 이크 인사 벙커 옆에 한발, 야~ 주계옆에도 또 떨어 졌는데...."
하면서 세는 정도로 대담해 있었다.
그 시각 나는 PX벙커에서 도깨비 대위라고 불리는 김모 군수장교(해간23기?)와 PX장인 김모중사, 그리고 방첩대에서 파견나온 임모중사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정보선임하사관, 우리 박격포 탄착점 확인해서 낼 아침 보고할수 있게 하고, 돌아와서 마시자." 고 임 중사가 제안 하는 것이다.
"그럽시다." 대답을 하고 함께 나와서 박격포의 탄착점을 확인하는데.....
"저기 인사 사무실 옆에 한발, 어! 우리 사무실은 맞았는데," 그랬다.
우리 S-2사무실은 지붕에 한방 맞았지만 구멍이 뚫린것 외엔 피해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밖에서 탄착점 확인을 하고 있는데, 돌연 "쓔~슈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켓트다. 업드려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그 자리에 업드렸다.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등뒤가 화끈했다.
"맞았구나."순간 그렇게 생각 했다. 손을 들어 등 쪽으로 돌려보니 멀쩡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PX쪽으로 뛰면서 소리쳤다. "임 중사, 임 중사"
대답이 없었다. 내가 업드릴때 뒤에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또 다시 소리쳐 임 중사를 불러보았다. "응 나 여기야 여기"
그는 가장 가까운 병기반 벙커로 뛰어 들고 있었는데, 병기반 벙커는 아직 문앞에 바리켓을 만들지 못한 상태여서 포탄 BOX로 어지럽게 샇아둔 상태였다. 그는 발에걸리는 BOX를 헤치며 기어들어 가면서, 내게 손짓 했지만 나는 그대로 PX벙커로 뛰어들어갔다. 군수장교가 왜? 그러느냐듯 쳐다본다.
"라켓이 날아 옵니다."
"내가 무슨 죄가 많다고 요기 맞겠어" 군수장교는 태연하게 천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후에도 라켓 포는 계속 날아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밖이 잠잠해 졌고 여기저기에서 우리 대원들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말라 다시 맥주를 마시려고 캔을 땄는데 본부중대 선임하사관 박 주연 상사가 들어왔다.
이 분은 한국전도 경험한 노병이었는데 군수장교에게 경례를 하고는
"의무실 다죽었습니다. 빨리 헬기를 요청 하십시요." 라는 것이다.
우린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의무실 쪽으로 뛰었다.
분명히 여긴데, 의무실 벙커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후 손에 야전삽을 들고 대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의무실 벙커가 있었던 장소를 파들어갔다. 그때까지 의무실 벙커는 출입구를 막아줘야 할 바리켓을 설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켓포탄이 그 출입구를 통해 벙커로 들어가서 폭발한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사를 확인 할 수 없는 전우들을 발굴해 내었다. 군의관을 포함해모두 아홉명이었다. 후에 알려 졌지만 4명은 전사하고 5명은 전상을 입었다. 해군소속의 군의관은 철조망 지주에 눌려 다리가 절단 되었다고 했다.
대대방석엔 수십개의 벙커가 있었고, 의무실을 제외한 모든 벙커는 해병들의 벙커였던진지에, 하고 많은 진지 중에 해군 벙커로 날아들어간 라켓포 포탄에 눈이 달리지 않았는데 상대적으로 하나 뿐인 해군벙커가 날아간 이 밤의 엇 갈린 운명은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의무실에 관한 내용은 지난번 김해에서 온 최해영 전우가 어떤 전우가 바로 이 현장에서 전상을 입었으나, 그 것을 확인 할 수 없어 행정심판이 불리한채 애태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의 내 기억을 더듬어 기술한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당시의 군의관도 찾을수 있을듯 합니다.)
출처 : 천자봉 쉼터, 初心(홍윤기)님 http://www.rokmcm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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