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71>
그녀가 준 오뚝이, 남지나해에 버렸지만 …
몰개월의 이를테면 '갈매기 집'이나 '포구 집' 등에 판잣집 쪽방을 얻어
전쟁터로 떠나갈 병사들을 받던 작부들은
모두들 나름대로 애인 하나씩 골라서는 베트남으로 편지를 했다.
어떤 애는 열사람 스무 사람에게 쓴다고도 했다.
애란이, 정자, 향자, 백화, 갖가지 이름의 작부들 중에
가끔 술에 만취하여 꺼이꺼이 우는 아이도 있었는데
아마도 전사 통보라도 다른 전우에게서 받았던 모양이었다.
주인 여자가 이런 식으로 푸념을 했다.
-그뿐야? 제대하구 가면서 몰개월에 다시 찾아와 들여다보는 놈은 한번두 못 봤다니까.
자 이래 놓으면 손님 못 받지,
내일 조시 나빠서 장사에 지장 있지,
심란하니까 노래도 안 나오지.
총원 집합, 총원 집합.
막사마다 뛰며 전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배낭과 총을 메고 철모도 썼다.
자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그러고도 십여 분이 지날 때까지 점호는 시작되지 않았다.
마을로 몰려나갔던 병사들이 조용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속삭이고 툭툭 치면서 얌전하게 주사를 부렸다.
우리는 막사 안에서 인원이 차는 순서대로 보고했다.
추장은 내게 농을 걸었으나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술 취한 그들은 침상에 앉아서 머리를 끄덕이며 졸았다.
부옇게 날이 밝았을 즈음에야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들은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들이 연병장을 한바퀴 빙 돌면서 대열을 짓더니
차례로 사단구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의 행렬들은 천천히 움직였다.
군가가 연달아 들려왔다.
군가소리는 후렴에서 뒤받아 연달아 뒤차로 이어졌다.
안개가 부연 몰개월 입구에서 나는 여자들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꽃이며 손수건이며를 흔들고 있었다.
수송대열은 천천히 나아갔다.
여자들은 거의가 한복 차림이었다.
병사들도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뛰어서 쫓아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추장이 내 등을 찔렀다.
나는 트럭 뒷전에 가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 질렀다.
미자가 면회 왔을 적의 모습대로 치마를 펄럭이며 쫓아왔다.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얀 것이 차 속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주워 들었을 적에는 미자는 벌써 뒤차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 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
그림=민정기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07785
'★월남전 참전수기 > 해병179기 황석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13회> (0) | 2015.07.22 |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12회> (0) | 2015.07.22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10회> (0) | 2015.07.21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9회> (0) | 2015.07.21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8회> (0) | 2015.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