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69>
꽁치 살 발라주시던 어머니 `꼭 기도해라`
어머니는 차를 향하여 몇 걸음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승차 책임자석의 장교가 보기에 딱했는지 차를 잠깐 멈추었고 나는 다시 외쳤다.
-저녁에 돌아옵니다. 저기 초소에 가서 신청을 하세요.
-그래 알고 있다. 어서 다녀오너라.
눈시울이 화끈했다.
그래, 어머니는 내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이를테면 나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고해와 같은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나를 찾아서 곳곳을 헤매고 다니셨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녀는
언제나 어느 곳에나 나를 찾아서 먼길을 오곤 했다.
나날이 늙어가는 어머니의 좁은 어깨 때문에
나는 돌아서서 스스로 구시렁거리며 자신을 욕하곤 했다.
어머니와 함께 그날 저녁에 오천 읍내의 여인숙에서
가정식 백반 상 앞에 마주 앉았는데
그녀는 언제나처럼 소금구이 꽁치의 살을 발라 주었다.
-전쟁터에 가면 꼭 하나님께 기도해라. 나두 할거다.
네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해 주실 거야.
어머니가 내게 포켓 판 성경책을 내밀어 주고 돌아갔는데
나는 어머니가 전과는 달리 내게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신앙을 권유하던 것을 그때에 처음 보았다.
말년의 어머니는 더욱 신앙에 기댔다.
드디어 훈련이 끝나고 한국에서의 군대 봉급이 일시불로 지급되었다.
다달이 푼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두 달분을 모아 놓으니 제법 용돈이 되었다.
우리를 태우러 올 배가 부산 부두에 닿을 동안
기차를 타기 전까지 사흘 동안의 대기 시간이 주어졌다.
가까운 곳이 고향인 병사들은 외출증을 끊어서 나갔고
나처럼 서울이 고향인 자들은 무단 외출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기 전에
서울을 확인하고 싶었다.
추장과 인수에게만 알리고 슬며시 특교대 막사를 벗어나 철조망을 넘어갔다.
일년 반 만에 서울을 찾아가 다시 확인했던 것은 나의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주워서 다시 뒤집어쓰고 돌아온 건 아닌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싸돌아다니던 골목에는
아직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나도 언제나 끼이고 싶어했던,
머리 좋은 치들의 비밀결사는 여전히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성공한 신사들 같았다.
모친의 식료품 가게는 문을 닫았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내 다락방의 벽에는 떠나오던 날의 낙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밤새껏 승냥이는 울부짖는다'라고.
지붕 건너편에서 솜틀집의 활차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발소 집 형제는 유행가를 합창하고,
야채 장수 부부는 또 한바탕 두들기고 울었다.
이 짧은 밤의 여행은 군인이 되기 전
나의 온갖 외로움을 모아놓은 것과 같았고,
미친년처럼 얼룩덜룩하게 화장한 육십 년대의 축축한 습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고따위 물기로는 감자 한 알 적시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열차 조역처럼 망치를 들고 그곳을 차례로 두드려 보았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0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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