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37) 뒤 돌아 보며/ 부식과 위장복 사건
당시의 정상적인 해병대 위장복
해방이 된 후 새 정부의 군대를 조직할 때 넥타이를 매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니 장교해라” 하고 추천을 했다는 우서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그만큼 그 당시로는 반듯한 사람을 식별하기가 어려웠고 또 사회가 정상적인 궤도에 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풍자해서 하는 말로 여겨진다.
하기 사 과도기라 그런지는 몰라도 6.25사변 당시 높은 양반들이 군량미를 모두 팔아먹어 굶어 죽은 젊은이들이 즐비했던 소위 방위군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즈음 군납된 간장은 마산 앞바다의 바닷물에다 염료를 타서 납품을 했었다는 군대의 부정과 부패를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1960년대 초 군대에 입대한 후 첫 휴가를 나오는 내 또래 친구들은 저마다 살이 쪄서 나왔다. 부모들은 그 해석을 시간 생활을 하는 군대라 오히려 제 때 밥을 먹고 훈련을 하니 살이 찌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나름대로의 해석들을 했었는데 얼마 후 군대에 납품된 된장에 비소를 넣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사회를 온통 발칵 뒤집어 놓은 소위 비소 사건이 터졌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러면 그렇지! 살이 쪄서 나올 정도로 편한 군대는 아닐 텐데 하고는 토를 달았다.
물론 비소를 인체에 해가 있을 정도로 넣었는지? 또 군대의 먹 거리에 정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대부분이 살이 쪘는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일반인들의 시각으로는 군대는 문제가 많은 특수 집단같이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흘러 내가 해병대에 입대를 해서는 하루의 식사를 1인당 나오는 대로 다 먹이면 못 먹을 정도로 그 양이 많다는 말을 곧잘 장사병들로부터 들었다.
그런데도 훈련병들은 물론 후보생들까지 배가 너무 고팠던 것은 말 할 것도 없었거니와 그런 가운데서도 후보생들이야 하사관으로 또는 장교로 모두 임관을 하게 된 후부터는 그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지만 그야말로 사병들은 지금과는 달리 무척 배고픈 가운데 군대 생활을 계속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먹 거리에 크게 놀랐던 일은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백령도에서 인사 장교로 근무를 할 대 새로 부임한 부대장을 모시고 모 중대를 방문 했을 때였다.
마침 주계에서 사병이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것이 그만 문이 열리는 통에 부대장의 눈에 띄어 발길을 그 곳으로 돌려 들어갔는데 부대장은
“이게 콩나물이야? 콩 나무지! 누가 이런 걸 납품했어?”하고는 호통을 쳤다. 그 후 난리가 났던 것은 물론이지만 내 생전 그렇게 큰 콩나물은 여태까지도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보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다음으로는 내가 월남전에 참전을 했을 때 내 전령과 한국에서 납품되어 온 나무 상자 속의 고추장을 놓고 나는 “된장이다.” 라고 우기고 전령은 “고추장”이라고 우기던 일이다.
물론 신참인 내가 지고 말았던 것은 당연했는데 고추장만 놓고 보면 그 색깔이 바로 영락없는 된장 같았고 된장과 함께 놓고 보면 대조적으로 약간은 발그스레한 고춧가루가 뿌려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즉 고추장이었던 것이다.
“누가 한국에서 늘 상 먹던 고추장 그대로를 주면 먹고 뒈지남?”
나처럼 죽을 목숨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통에 그 실상이 공개 되는 것이지만 비단 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 해병대에도 보급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보다는 월남에서 1968년에 지급 되었던 위장복 사건이다. 물론 사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사실은 사건이 되고도 남을 일이라 나는 누구에게나 사건이라는 말을 반드시 붙여서 쓴다.
그래 왼 놈의 얼룩덜룩한 위장복이 한 번만 빨고 나면 염색이 모두 지워져 허옇게 바래는지?
3일에 한 번씩 적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들어 가 야간 매복을 해야 하는 우리 소대장들과 대원들은 아예 그것을 허옇게 잘 드러난다고 하여 노출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아마 모르긴 해도 야밤에 그 노출복 때문에 적의 눈에 쉽게 띠어 총을 맞아 죽은 해병대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적이 있다.
우리 소대장들은 그것을 소포로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내려다 보안문제로 그만 참기로 하고 우리가 사회에 나가서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자는 눈물겨운 말들을 했다.
물론 청룡부대 본부에서 해병대 사령부에 항의를 하여 다음부터의 위장복 보급 때에는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애시 당초의 위장복 색깔은 “아니올시다.”였다.
그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부하들을 담보로 얼마나 많은 돈을 미국으로부터 뜯어 치부를 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곰곰 생각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기도 했다.
또 작업화인지 아니면 정글화인지는 몰라도 국내에서 보급되는 신발은 거의 아무도 신지를 않았다.
아래는 고무로 위에는 천으로 된 검정 신발이었는데 아무리 무식하다고 해도 그렇지 신발 끈을 매끈거리는 나이롱 끈으로 만들어 몇 발짝만 움직이면 당장 끈이 풀어져 버리는 이런 놈의 신발이 이 세상 어느 군대에 또 보급이 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개인이 먹을 식량을 잘라 먹고 엉터리 부식을 납품하고 전투 장비를 부실하게 만들었다가는 살아남기조차 힘든 군대가 되었겠지만 그 때 그 시절 전설 속에서나 있을 것 같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얘기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조국을 위해 그리고 해병대를 위해 고군분투를 하며 숨져갔던 내 선후배, 내 전우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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