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43) 뒤 돌아 보며/ 방어 본능과 인간의 심성
뒷면에는 서울지구 헌병대 보안과장 대위 구문굉으로 써져있다.
일단은 누구나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체절명적인 환경에 처하게 되면 선과 악을 가늠할 겨를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자기를 지키려는 반사적 행동만을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대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심리를 이용해 적보다 더 빨리 즉각적인 반사의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반복 연습을 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적이 나를 죽이려 난사를 하는데도 그 적의 주위에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 내 총에 맞아 다치거나 억울한 죽음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을 먼저 앞세우는 군인은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전쟁은 인간 본연의 심성이나 양심에 역행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인들 역시 평소에는 누구 못지않은 뜨거운 사랑과 열정과 인간애가 넘치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경우 군인들이 가혹한 훈련을 통해 인간의 심성이 아예 달라졌거나 비뚤어진 것 같이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집에는 역시 부모 형제들이 있고 또 가정을 이룬 사람인 경우는 여느 사람들과 꼭 같은 처자식들도 있다.
1970년 해병대 서울 교도소에는 김포 쪽으로 잠입을 해 오다 우리 해병대에 체포되어 수감 되었던 인민군 중위가 한 명 있었다.
벌써 일 년이 넘게 수감 생활을 하던 터라 가끔씩 우리 헌병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는데 한 번은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위문 온 여자들을 보고 남반부 여성 동무들은 인물들이 왜 그렇게들 없느냐? 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헌병은 바깥에는 미인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어쩌다 인물이 빠지는 사람들이 온 것이라는 대꾸로 대답을 대신했다는데 이 말을 전해 들었던 나는 남남북녀라더니 이북에는 미인들만 들어찬 세상인가? 하고는 껄껄 웃었던 적이 있다.
결국 그는 그 해 늦은 가을 김포여단의 사격장 한 모퉁이에서 사형을 집행 당하게 되었는데 나는 내 아내가 곧 첫 아기를 출산하게 되는데 왜 하필이면 이 때 사형 집행을 해야 하는 관할 헌병대의 보안과장 직책을 맡고 있는가? 하고 매우 한탄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것을 눈치 챈 헌병대장은 보좌관과 무려 10여명 이상이 출동하는 임무 수행인데도 아예 나를 구경조차도 못하게 빼 주었다.
“구 대위, 헌병대나 잘 지켜”라는 그 정답게 들리는 말 한마디는 그야말로 고맙기 그지없었다.
결국 사형을 집행 하던 날 새벽, 묵묵히 떠났던 대원들 모두가 밤늦도록 돌아오지를 않았다.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상관인 헌병대장이나 보좌관이 돌아 와야 퇴근을 할 수가 있는데.. 하고는 더욱 초조하게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꽤나 어두워져서야 겨우 절반 정도의 대원들이 돌아왔다.
모두가 얼굴들이 말이 아니었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모두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 오늘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만 선임상사가 짤막하게 보고를 하고는 그도 너무 피곤에 지쳤는지 집에 갈 생각은 않고 바로 사병들의 내무실로 직행을 했다.
며칠이 지나 자세히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은 월남전에서 직접 전투에 참전했던 7명의 사수를 뽑아 당일 오전 미리 사격장의 사선에 오르게 한 후 충분한 사격 연습을 시켰는데도 막상 사형집행을 위한 조준 명령이 떨어지자 사수들의 총구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투에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본능적 행동과 사형수를 죽이기 위해 쏘는 사수들의 심리적 차이가 이토록 크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잘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결국 발사 명령이 떨어지고 7발의 총성이 산울림으로 메아리 쳤는데 가슴에 붙인 표적에는 오로지 한 발만 명중을 했다.
물론 뒤처리는 선임 집행자의 권총으로 관자노리를 향해 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지만 집행 책임자인 헌병대장은 자신의 솟구치는 노기를 드러내 전쟁을 했다는 녀석들이 이 모양이냐고 7명의 사수들을 매우 나무랐다.
그리고 총알을 잔뜩 주어 사격장의 사선으로 다시 올라 가게하고는 인간의 본성에 좋지 않았던 기억이 앙금으로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 사격을 다시 하도록 하는 한편 더욱 기합을 주었던 것이다.
특별 훈련을 마친 후 헌병대장은 사수들은 물론 그 일에 동원 된 모든 대원들을 예약 된 술집으로 인솔해 모두가 거의 뻗을 때까지 술을 잔뜩 먹였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에는 여러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적이란 개념을 두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경우에는 오로지 동물적 킬러의 본능이 존재 할 뿐 휴머니즘도 박애도 사랑도 아무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과 역으로 아무리 그러한 킬러의 본능에 잘 조련된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그 상황을 벗어난 경우에는 누구 못지않게 인간으로써의 양심을 고이 간직한 선량한 사람들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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