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41) 뒤 돌아 보며/ 전쟁 그리고 여자
놀란 가슴을 안고 위험을 대피하는 모성애
전투지에서는 어린 아이와 여자들이 가장 불쌍해진다. 노약자들도 물론이지만 아무 방어능력도 없는 어린 아이나 갓난아이의 생명을 보호하고 부지하려는 모성애의 그 몸부림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생실습을 나온 사범학교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이북에서 피난을 나온 분으로 가끔씩 6.25사변을 만나 이북에서 피난을 나올 때의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중에서도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는 얘기는 피난민이 워낙 많은 탓에 객차는 물론 화물칸마저 탈 수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지붕 위에까지 몸을 서로 의지하며 콩나물처럼 옹기종기 붙어 앉아 밤새도록 남쪽을 향해 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떤 가족들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희망이 전연 보이지 않는 병든 아이나 숨을 거둔 아이가 있으면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를 기다려 부모 되는 사람이 눈을 질근 감고는 열차 아래로 던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것은 필경 전쟁이 불러 온 처절한 모성애의 어떤 한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김일성에 의해 저질러졌던 6.25의 동족상잔이 얼마나 우리 국민들을 가혹하게 만들었는지를 얘기해 주는 극히 일 단면 중의 하나라고 했다.
6.25사변 당시 내 집안의 어른 한 분이 HID의 요원으로 활약을 하셨다. 임무 수행을 위해 적진에 낙하를 했는데 운이 없게도 그만 적에게 잡히는 신세가 됨과 동시에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80이 넘은 지금도 그 상처가 영광의 상처처럼 남아있다.
북괴군에게 끌려가 요원 두 명이 이제 막 사살 되려는 찰라 하늘이 도우셨는지 때마침 미군의 제트기가 공중에서 기총소사를 하는 통에 그 틈을 노려 줄행랑을 쳐 살아 온 것이다.
그 후 집안의 어른께서는 통역장교가 되었고 군대생활을 하는 중 자주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기거를 하는 세월이 많았었는데 내가 월남전에 파월이 되기 전 어릴 때부터 반복 해 들었던 말씀 중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얘기는 “전쟁터에서 여자를 너무 밝히거나 강간을 하는 군인은 반드시 죽거나 불행한 일이 결국은 닥치더라.”는 말씀이었다.
흔히 전투지에서의 여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군인들의 노리개가 쉽게 될 수 있다. 월남에서도 잠시 불미스러운 대원들의 실수가 있어 억울하게도 중대장이 조기귀국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가하면 우리 해병대 지역에서 집단 강간살인사건이라는 엄청난 피해 민간인들의 진정사건이 있어 결국 주월 사령부의 범죄수사대에서 직접 진상 조사를 나온 적도 있었다.
물론 우리 해병대와는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헌병대 수사 과장이었던 내가 사건 진상 처리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되어 적지에 들어가 모든 일을 조급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차라리 소총소대장을 하는 것이 그 당시로써는 덜 위험했을 것을...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볼 정도로 주민들과의 감정이 매우 험악했던 적이 있었다.
또 내가 소총소대장을 했을 때는 흔히 여자들이 무엇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것을 다반사로 보았는데 으래 입가에는 붉은 물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 그 붉은 침을 일부러 약간씩 흘리거나 뱉는 것을 보았다.
흡사 드라큐라 같은 그 형상은 실로 끔찍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월남인들은 예로부터 전쟁이 나면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어떤 열매를 씹어 그런 추악한 혐오감을 상대 군인들에게 내 보임으로써 위험을 피했다고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작전 지역의 민간인 중에서 꽤 반듯하게 보이며 입에도 씹는 것을 넣지 않은 처녀로 보이는 서너 명의 여자를 수개월 만에 보게 되었다. 그야 말로 여자 같은 여자를 보는구나 싶은 감정에다 내 눈의 초점이 그들을 떨어지려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때 이미 내 바지 가랭이가 너무 팽팽해져 있음을 느끼고 혹시라도 사병들이 보지나 않을까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있었는데 하긴 나보다 더 한창인 대원들이야 그 반응이 오죽했겠는가?
또 한 번은 호이안의 모 여자고등학교와 우리 청룡부대와의 자매결연 식에서 고등학교 여학생 대표들이 모두 흰 아오자이를 입고 나왔는데 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불란서 계통의 혼혈들이라 어떻게나 예쁘고 스타일이 돋보이던지 과장해서 표현을 하자면 모두가 며칠간씩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이토록 젊은 혈기의 군인들이란 장사병을 막론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그 본능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며 말을 바꾸어 하자면 그 만큼 여자란 전쟁이 났을 때 더욱 여러모로 희생물이 되기가 십상이라는 말이다.
처절한 모성애로 아이들과 자신의 육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는 물론,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남자 못지않은 어려움에 직면하는 수가 있다는 뜻이다.
요즘처럼 아군과 적군이 누군지? 전쟁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위정자들이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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