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將軍들의 전쟁

[將軍들의 전쟁] #15. 자주파와 동맹파 암투 청와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어

머린코341(mc341) 2015. 9. 1. 12:48

[將軍들의 전쟁] #15. 자주파와 동맹파 암투 청와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어


주한미군 감축 문제로 격돌…노무현 대통령, 부시와 통화 직후 이라크 파병 결단 
 
전시작전권(전작권)을 한국군에 전환하면 주한미군은 한국을 떠날 것인가.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희상 대통령실 국방보좌관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는 “떠난다”였다. 그러니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전작권에 대해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2003년 6월 중순에 열린 청와대의 자주국방 토론회에서 김 보좌관이 노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표출한 강경한 주장이었다. 그 강경함에 노 대통령도 놀랐고, 당사자인 김 보좌관조차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불경함으로 인해 자책감에 시달렸다.


청와대 토론회가 있고 나서 김 보좌관은 경복고 선배인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을 찾아가 “일전에 대통령에게 너무 대들었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문 실장으로부터 김 보좌관의 사의를 전해들은 노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나는 개의치 않으니 국방보좌관도 걱정 말고 계속 근무하라”고 말했다. 갈등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2003년 5월2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 EPA 연합


그런데 이런 김 보좌관의 주장은 공교롭게도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감축 ‘통보’로 인해 허물어졌다. 우리의 전작권 논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국이 범세계적인 자체 군사 계획에 의해 주한미군 감축에 먼저 시동을 건 것이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에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의 방위 역량과 의지를 강화하자는 취지의 자주국방에는 왜 문제가 있는 것인가.


1977년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한국에서 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해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이를 받아들이면서 자주국방 추진 계획으로 나아갔다. 작전권도 가져오겠다고 했다. 동맹이란 기한이 없는 사실혼이 아니라 언제든 국가 이익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계약혼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보의 본질은 국가의 신성불가침한 주권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적어도 안보 분야에서 이것만큼 더 분명한 것은 없다. 김희상 보좌관을 견제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의 이종석 차장과 서주석 실장의 입장이 바로 그러했다.


7월 초에 다시 청와대에서 자주국방 토론회가 열렸다. 두 번째 토론회에서는 동맹파인 김 보좌관이 더는 반대하지 못하는 가운데 NSC 사무처가 주도하는 자주파가 우세를 점했다. 이 회의 결과 국방부와 NSC 합동으로 작성된 자주국방 추진 계획에는 2010년까지 전작권을 한국군에 전환하는 것으로 목표 시점이 설정되었다. 훗날 조영길 장관은 “전작권 전환에 반대했다”고 주장했지만, 목표 시점 자체는 그가 정한 것이었다.


물론 국방 예산을 대폭 증액한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그도 더는 자주국방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동맹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주권의 기반을 확립해야만 했다. 그 기반 위에서만 우리가 안보의 당사자로서 외세 의존적인 타성을 벗어나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시대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이 있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가 자주국방이 우선인가, 아니면 동맹이 우선인가라는 아주 이상한 논쟁으로 몸살을 앓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안보가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그 면적을 구하는 데 가로축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세로축이 더 중요한지를 따지는 것과 같았다. 어찌 보면 군사작전의 주도권 문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안보의 핵심적인 문제로 자주와 동맹의 딜레마에서 장기간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라는 아마도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건 자주적으로 국가를 방위하고 부족한 부분은 동맹으로 보완한다. 그렇다면 한·미 동맹의 어떤 속성, 어떤 구조가 안보라는 당연한 건축물에서 지붕이 중요한지, 서까래가 중요한지와 같은 괴상한 논쟁을 촉발시키는 것일까. 


“미군이 떠날지도 모른다” 불안감 상존


그것은 한·미 동맹 자체에 내장된 아주 독특한 구조와 속성 때문이다.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한반도 분쟁에 대한 미국의 자동 개입 조항이 없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경우 위기가 발생하면 미국이 개입하는 절차와 군사 지원의 경로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안보 지원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은 전쟁 선포가 대통령 권한이 아니라 의회 권한이다. 만약 미국 의회가 한반도 위기에 개입하기를 거부한다면 미국이 한국에 안보 지원을 한다는 것도 보장받기 어려울 수 있다.  그만큼 헌법 절차라는 게 불안하고 막연했다.


그럴 경우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미연합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존재다.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과 동시에 한·미 국방장관이 서명해 연합사령관에 하달한 ‘전략지시 1호’는 미군 4성 장군인 연합사령관에게 한반도 방위의 임무를 맡긴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연합사령관이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연합사령관과 주한미군의 존재가 바로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wire trap)’이라는 게 그동안의 통념이었다.


그런데 전략지시 1호는 국가 간의 공식 조약이나 협정도 아니고, 단지 행정규칙 정도의 위상을 갖는 지침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미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연합사가 있다고 하지만, 연합사령관은 미 합참과 태평양사령부의 군사 지침을 따르는 반면 우리 합참으로부터는 어떤 지침도 받지 않는다. 연합사령관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정책과 예산을 보고하지만, 방위비 분담금을 지원받으면서도 정작 한국의 국회에는 아무런 보고를 할 의무가 없다. 이렇게 동등하지 못한 연합사인 탓에 만일 미국과 한국의 국가 이익이 다를 경우 우리가 불리한 위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상존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군이 떠날지도 모른다” “미국이 한국을 방기(放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국 군부에 자리 잡도록 했다. 심지어 미국은 유사시 한반도에 얼마만큼의 증원군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 세부 내역이라 할 수 있는 ‘시차별 부대 전개 목록(TPFDL)’조차 한국군에 공개하지 않는다. 막연히 전시에 69만명의 증원군, 5개의 항모 전단, 3000대의 전투기라는 ‘립서비스’ 외에 실제 증원 규모를 우리가 알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이 69만명이라는 증원군 규모는 240만명의 병력을 보유했던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지, 140만명으로 감축된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다.


더구나 미국의 재정 상황이 악화된 지금은 더더욱 미국의 안보 지원 의지를 확신할 수 없다. 우리 군부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이런 불안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비록 마음속으로는 미국에 불만이 있더라도 하염없이 미국에 협조하고 끌려다니는 행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문화, 그런 정신, 그런 인맥이 광범위하게 동맹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는 게 정설이다.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나 청와대 자주파에게는 ‘굴욕적’이고 ‘종속적’인 한·미 동맹의 이미지로 다가온 것이다.


2003년 11월15일 열린 ‘이라크 파병반대 국민 총궐기대회’에서 참가자 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클린턴 보면 기분 좋은데, 부시는 기분 나빠”


적어도 동맹을 말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미국에 머리를 조아리고, 미군이 나갈까 봐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는 그런 굴욕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이 성역이나 다름없는 동맹을 거침없이 건드리는 건 골수 동맹파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기류로 인해 노무현 정권 전반기 동안 자주파와 동맹파 간의 사활을 건 싸움으로 청와대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던 2002년 1월 노 대통령과 장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는 무심코 “클린턴을 보면 기분이 좋은데, 부시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에 필자도 무척 놀랐지만, 사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당시 전 세계 국가들이 대부분 미국에 등을 돌렸다. 거침없이 전쟁을 말하고 또 행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등장은 한국에도 재앙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재앙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안보의 불안은 거의 다 그 시절에 잉태된 미국의 독선과 독주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게다가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은 도무지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미덕을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입만 열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응징하고, 그 다음 차례는 북한의 김정일이라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국내 일부 언론은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을 곧 폭격할 것처럼 보도했고, 이에 대한 한국 국민의 불안감은 아예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2004년 초에 육군사관학교에 가입교한 신입생 설문조사에서 “우리 안보를 누가 위협하느냐”는 질문에 미국이라는 응답자가 34%, 북한이라는 응답자는 33%로 나왔을까. 그런 미국의 패권주의, 혹은 일방주의에 대한 반감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권력 사이에 낀 군부는 갈수록 입장이 난처해졌다. 조영길 장관은 2003년 6월 말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향했다.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조 장관과 주한미군 감축 및 주한미군 기지 통폐합 문제를 완결 지으려고 했다. 이에 대한 럼스펠드의 협의 요청이 이미 한국에 전달되어 조 장관이 워싱턴으로 온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조 장관은 이에 대해 일절 언급을 회피했다. 기다리다 못해 럼스펠드가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꺼내며 의견을 묻자, 조 장관은 의견 제시는커녕 아예 논의 자체를 피했다. 이런 태도에 럼스펠드가 격분해 조 장관이 돌아간 즉시 롤리스 부차관보를 다시 한국에 보내 김희상 국방보좌관을 찾아가 항의하도록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무언가 말이 안 통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럼스펠드의 근심은 깊어졌다. 이러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즉 이라크에 한국의 전투병 파병을 요청해도 한국 정부가 거부할 것만 같았다. 근 한 달 이상 미국 국방부에서는 ‘한국에 파병 요청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마침내 9월5일 한국을 방문한 롤리스 부차관보가 반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만나 정식으로 전투병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아주 완곡하게, 공식적인 경로가 아니라 개인 접촉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회담의 공식 의제가 아닌 사적 대화라는 형식으로 아무런 문서도 없이 파병을 요청했다.


주한미군 감축과 이라크 파병이라는 두 개의 난제가 얽혀버리자 청와대의 고민도 깊어졌다. 노 대통령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국민에게 공개해 공론화하라고 지시했다. 굳이 미국이 한국에서 미군을 감축하겠다면 그 사실을 공개하고 우리도 자주국방 계획을 추진하자는 취지였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9월25일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 외교부의 위성락 북미국장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미국 국방부로 향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한미군 감축을 공론화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2004년으로 1년간 연기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했다. 노 대통령의 공론화 의도가 관철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한·미 정치권력 사이에서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려는 국방부의 속성이 조영길 장관에 이어 차영구 정책실장에게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아무리 대통령이 지시해도 국방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무렵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현지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정부 합동조사단의 조사 발표가 있었는데 이라크가 안전하다는 국방부 주장과 불안하다는 민간인 조사위원인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의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게다가 용산 기지 이전 협상도 한·미 간에 결렬되고 주한미군 감축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이라크 파병 문제까지 얹어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시 윤영관 외교부장관을 미국에 보내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북핵 문제와 이라크 파병 문제를 논의하고 오도록 했다.


그런데 파월 앞에서 윤 장관이 ‘이라크 파병에 대해 국민여론을 설득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북핵 문제에 의미 있고 전향적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의 영어로 번역된 본국의 훈령을 느닷없이 낭독했다. 이에 대해 파월은 “한국 정부가 파병 여부와 북핵 문제를 연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그렇게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길을 그대로 갈 것”이라고 차갑게 응답했다.


2003년 11월17일 제35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한 미국 럼스펠드 장관과 조영길 국방부장관. ⓒ 사진공동취재단


롤리스 “이럴 것이면 파병하지 말라” 협박


미국은 잘못된 이라크 침공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한국은 북핵 문제와 파병 논란에 빠져 서로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재차 청와대는 라종일 안보보좌관을 미국에 특사로 보내 부시 대통령을 직접 설득하기로 했다. 10월12일 라 보좌관이 가지고 간 노 대통령의 친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께. 지난 5월의 정상회담 때 대통령께서 저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내 친구다. 나는 내 친구가 나로 인해 정치적 곤경에 빠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감축하려 한다는 것이 저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습니다(이하 생략).”


어떻게든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바꾸고, 주한미군 감축을 유보하는 등 좋은 분위기에서 파병을 논의하자는 우리 측 입장에 대해 롤리스 부차관보는 “이럴 것이면 파병하지 말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라 보좌관이 막 귀국한 직후 국내에서는 파병 문제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했다. 그때 친서를 받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노 대통령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주한미군 감축은 한국과 충분히 협의해 신중히 검토할 것이니 너무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성숙한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구체성이 결여된 한·미 동맹은 언제나 주한미군이라는 존재로부터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허약하고 서글픈 동맹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확인되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은 결국 진보 성향의 정권에서도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도록 했다. 그리고 10월17일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려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온 나라가 파병 찬성과 반대 여론으로 양분돼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이라크는 마치 한국군을 기다리는 죽음의 깊은 심연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그 먼 사막에 무슨 병력을 얼마나 보내야 할 것인가. 잠 못 드는 밤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시사저널] 201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