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將軍들의 전쟁

[將軍들의 전쟁] #17. 양주 두 상자 순식간에 바닥 미국 측, 돌고 도는 폭탄주에 녹다운

머린코341(mc341) 2015. 9. 7. 15:26

[將軍들의 전쟁] #17. 양주 두 상자 순식간에 바닥 미국 측, 돌고 도는 폭탄주에 녹다운


안광찬, 삼각지 고깃집에서 폭탄주 36잔으로 고압적인 롤리스 KO시켜 


청와대 국방보좌관 자리에서 김희상 육군 예비역 중장이 물러나고 해군 제독 출신의 윤광웅 전 비상기획위원장이 부임한 때는 2004년 1월말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는 한·미 동맹의 수레바퀴가 계속 삐걱거렸다.


동아일보는 신년 벽두부터 미국의 한반도 정책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직설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했다.


‘하나회’로 밀려난 안광찬, 윤광웅이 재발탁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는 두 개다. 하나는 북한 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한·미 동맹의 현주소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 번영 정책은 무책임한 평화지상주의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에 항복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했는데 한국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하다.”


“한국의 이종석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에 대해 ‘탈레반’이란 별칭이 미국 내에서 널리 사용됐을 만큼 그에 대한 인식은 악화되어 있다.”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오른쪽)과 리처드 롤리스 미국 국방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가 2004년 8월19일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제11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회의에 앞서 포토세션을 갖기 위해 대표들을 부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어 조선·중앙·국민·문화일보 등 평소 노무현 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보수 색채의 언론이 노 대통령 공격에 가세했다. 이들 언론은 “미국은 노무현을 싫어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강조했다.


이런 여론의 압력은 외교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위성락 북미국장이 주도하는 저녁 회식 자리에 20명 정도의 북미국 직원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런 말들이 나왔다.


“김정일 호감 세력이 노무현 대통령 지지층이라는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의 최근 발언은 맞는 말 아니냐?”


“영어도 못하는 청와대 자주파 애들은 싹 갈아 마셔야 한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대통령이 무슨 힘이 있겠나? 대통령은 해양수산부와 과기부만 관리하면 된다.”


이들의 막말 파동은 2004년 1월 노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됐다. 그 여파로 윤영관 외교부장관이 경질되었다.


두 달 후인 3월12일 마침내 노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이날 외교부 북미국에서는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는 직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것 역시 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이런 여론의 압력에 진보 정권이 마냥 의연할 수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권은 큰 짐을 지고 있었다.


무언가 한·미 동맹을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2004년 4월 어느 날, 안광찬 육군 예비역 소장은 갑자기 윤광웅 청와대 국방보좌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국방부 정책실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안광찬은 “지금의 차영구 실장보다 (육사) 선배인 저는 적임자가 아니니 후배들 중에서 골라보시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6월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안 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윤 보좌관의 당부였다.


안광찬 장군은 육사 25기 대표 화랑 출신으로 한미연합사에서 부참모장과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역임했다.


하나회 출신으로 숙군 대상자였던 탓에 군에서 밀려나는 뼈저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연합사 근무 시절에는 미군 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인물이었다.


한때 거침이 없었고 키가 장대같이 큰 그였지만, 한 번 좌절감을 맛보고 나서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민간인이 된 그가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눈에 띈 ‘사무자동화 정보 시스템’이라는 간판이 걸린 한 학원에 들어가 ‘파워포인트’를 6개월간 이수하고 난 다음에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 되었다.


예쁜 여자 학원 강사가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기능을 가르쳐주면 그는 집에 와서 밤늦게까지 복습하고는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보고서를 꾸몄다.


안 장군이 눈을 치켜뜨며 입술을 씰룩이면 ‘∽’ 모양이 되었는데, 이를 본 상대방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겁을 먹거나, 솔직해지거나. 평등하면서도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그는 어이가 없을 때는 눈을 치켜뜨고는 상대방을 노려보면서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개진했다.


그 적극적인 태도에 상대방은 대부분 긴장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롤리스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에게도 먹혀들었다.


용산 미군기지 항공 촬영 사진. ⓒ 청와대사진기자단


“시끄러워. 이 이상은 절대 안 돼, 알았어?”


2004년 7월 윤광웅 보좌관은 국방부장관으로 부임했다. 윤 장관은 한없이 고압적이고 냉혹한 롤리스 부차관보의 버릇을 고쳐줄 것을 안광찬 실장에게 주문했다.


1946년생 동갑내기인 안 실장과 롤리스 부차관보는 서로에게 복선을 깔지 않는 진솔한 태도로 말이 잘 통했다. 워낙 적극적인 성격인 안 실장의 접근에 이들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2004년 9월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가 열렸는데 주한미군 감축, 용산기지 이전을 포함한 주한미군 재배치, 군사 임무 전환 등 핵심 현안은 안 실장이 부임한 6월 이후에 본격적인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FOTA 회의는 크게 보면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와 그에 따른 한국 내 미군의 재배치 △재래식 임무의 한국군 이전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한·미 동맹의 현대적 변환을 도모하는 두 개의 축이었다. 새로운 미군 전략에 따라 롤리스 부차관보는 평택 기지에 미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있는 규모와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장기적’이란 중요 거점 기지의 조건으로 그 어떤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만큼 완벽한 기준이 적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용산기지 이전 협상과 관련해 그동안 걸림돌로 작용했던 대체 부지 면적과 전술지휘통제체계(C4I) 이전 방법 등에 대해 지리멸렬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4년 7월22일 워싱턴에서의 제10차 FOTA 회의. 롤리스는 지난 9차 FOTA 회의에서 전년도에 잠정 합의된 대체 부지 면적 312만평 외에 주택 부지 50만평, 유엔사 및 연합사 부지 28만평 등 총 390만평을 요구했다.


그러다 나중에 360만평의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안 실장은 330만평을 고수해 협상이 결렬됐다. 롤리스는 우리 국방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들어왔다.


“부지 규모가 줄면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이 불가피하다. 이제 더 이상의 양보는 어렵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안 실장이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롤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잠깐 나하고 옆방에서 얘기 좀 나눕시다.”


롤리스를 회의장 옆 밀실로 데리고 들어간 안 실장은 롤리스에게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말했다.


“아니 사람이 왜 그래? 부지 몇 십만 평 가지고 주한미군까지 들먹거리고 말이야. 에이 씨….”


안 실장은 메모지에 연필로 ‘349만평’이라고 쓰고는 롤리스에게 던졌다.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까지 해주는데 고마워하는 법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국민 여론이 안 좋은데 미국이 자기들 잇속만 차려서야 되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이 이상은 절대 안 돼, 알았어?”


“알았어.”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용 숙소 1200채를 무상으로 지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날 합의문에는 330여 채만 한국이 지어주고 890여 채는 민간 업체가 평택기지 영내에 건립하는 주택을 미군 측이 임차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의견 접근을 이루었다.


2005년 6월30일 국회의 해임건의안 표결이 예정된 윤광웅 국방부장관이 대전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자체 개발 장비들을 둘러보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脫美’ 노무현 정권, 역설적으로 미국 더 배려


2004년 8월19일 서울에서의 제11차 FOTA 회의. 10차 회의에서 얘기하다 말았던 주한미군 감축 문제에 대해 안 실장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 측은 지난번 회의에서 2005년 말까지 주한미군 1만2500명을 감축하고 다연장로켓(MLRS)과 아파치헬기 부대 등 핵심 전력도 조기에 빼기로 우리에게 통보한 바 있다. 이런 일방적 통보가 적절한가. 우리가 이라크에 3000명이나 파병하는데 미국도 같은 시기에 움직여버리면 우리 체면이 뭐가 되는가.”


그러자 롤리스가 반박했다.


“무슨 소리? 최근 한국도 자체 전력 증강을 통해 MLRS를 50문이나 보유하고 있다. 이제는 미군보다 한국의 포병 전력이 더 앞서는 상황에서 뭐 이런 것까지 따지고 드는가. 한국이 스스로 자주국방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미 수립된 계획을 변경하기 어렵다.”


다시 안 실장의 반박이 이어졌다.


“한국의 MLRS하고 미국의 MLRS는 서로 다르다. 우리 것은 정밀 전자통신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MLRS다. 따라서 북한의 장사정포가 포격을 개시하면 일단 얻어맞은 다음에 쓸 수 있는 무기다. 그런데 미국 것은 그런 문제가 해결돼 북한 장사정포 발사 징후만 포착되면 선제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장비 아닌가. 우리가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시간이 1년 정도 필요하니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철수하라는 것인데 뭐 그리 인색하게 나오는가. 아파치 헬기는 북한의 기갑부대 남하를 저지하고 특수부대 침투를 차단하는 전력이다. 이것을 1개 대대나 빼간다고 하면 당장 대체 전력이 없는데, 너무 하는 것 아닌가.”


“MLRS 문제야 한국이 예산을 투입해서 보완하면 되고 아파치 헬기는 구형 기종을 철수시키고 잔여 전력은 신형 장비로 교체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력이 3배 증강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공백은 해소된다”는 롤리스의 주장에 안 실장은 “어렵게 파병을 하고 기지 이전까지 도와주는데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으로 답했다. 뭐 이런 동맹이 다 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화가 오가던 8월에는 한국군 자이툰 부대가 비밀리에 이라크 아르빌로 이동 중이었다. 롤리스는 이런 문제점들을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럼스펠드는 곧바로 한국의 윤광웅 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 이라크에 파병해준 것에 감사하며, 한국 측 요구 사항을 고려해 미국의 주한미군 전력 감축을 재조정하겠다는 이야기였다.


2004년 10월,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의 감축 일정을 2005년에서 2008년으로 늦추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자주국방은 주한미군 감축 일정과 연계해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지부동이던 미국의 입장을 돌려세운 것은 이라크 파병과 미군기지 제공을 협상 카드로 시의적절하게 활용한 것이 주효했다.


또한 연합사에서 미국의 국가 전략과 정책을 연구한 안광찬 실장의 역할이 컸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지켜본 윤 장관은 “안 실장이 일을 참 잘한다”며 더욱더 그에게 의존했다. 


롤리스 부차관보는 안광찬 실장과 협의한 내용에 크게 만족했다.


일본·독일·괌과 같은 전 세계 주요 미군을 재편하는 데 한국에서와 같이 신속하게 군사 변혁의 중요 현안이 마무리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군 감축과 기지 재편을 원만하게 타결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담당하는 롤리스 부차관보의 펜타곤 내에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여기에다 덤으로 이라크 파병까지 얻어냈다.


역설적으로 ‘탈미(脫美)’를 주장한 좌파 진보 정권이라고 하지만 노무현 정권처럼 미국을 배려하고 만족시킨 정권도 드물었다.


폭탄주 36잔의 삼각지 돼지고깃집 혈투


이걸로 FOTA 회의는 종결되고, 한·미 관계는 2005년부터 미래안보정책구상(SPI) 회의로 업그레이드됐다.


2005년 2월3일의 제1차 SPI 회의에 이어 이튿날 저녁, 서울 용산 삼각지 돼지고깃집 ‘홍돈’.


제1차 SPI에 참석한 롤리스 부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측 일행 18명과 우리 측 안광찬 실장을 비롯한 국방부와 외교부 직원 17명 등 도합 35명이 모여들었다.


돼지껍질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소란한 식당에서 안 실장은 폭탄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겁을 하던 미국 측 일행도 차츰 끌려오기 시작하더니 돼지껍질을 집어먹고 폭탄주를 입에 털어넣기 시작했다.


‘너희들 오늘 다 죽었다.’


안 실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폭탄주를 돌렸다.


국방부에서 가져온 양주 두 상자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소주 35병과 맥주가 4상자 더 들어왔다. 롤리스가 손사래를 치면 안 실장은 눈을 부릅뜨고 잔을 디밀었다.


“술 처먹어, 자식아!”


이날 안 실장이 먹은 폭탄주가 약 36잔. 나올 때는 부하 직원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 다음 날, 안 실장은 부하 직원에게 어제 술값이 얼마 나왔느냐고 물었다.


돼지껍질을 비롯한 고기 값과 술값을 합쳐서 68만원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안 실장이 부하 직원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단돈 68만원에 미국 놈들 꼼짝 못하게 다루는 외교의 천재가 나 말고 또 있어?”


“우리 국방부에는 실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흐흐흐….”


안 실장은 미군이 반환하기로 되어 있는 군사기지의 환경오염에 대한 미군의 책임과 반환 후 치유 비용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을 롤리스에게 경고했다.


롤리스는 안 실장의 고민을 이해하고 미국 국방부 예산에서 1억5000만 달러를 치유 비용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합의한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안 실장이 국방부를 떠난 2006년 1월 이후 국방부는 이 문제를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협상에 능한 실무자가 이뤄낸 성과를 후임자들이 지키지 못하고 다시금 공수표가 되게 만든 것이다.


한·미 동맹에서 ‘사람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 소통의 문제가 제기되는가 하면, 정치권력과 공직자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노 정권에서 안광찬이 점하는 독특한 위치는 바로 ‘퍼실리에이터(faciliator)’, 즉 ‘촉진자’였다.


[시사저널] 2014.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