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18. “장군 진급 심사 다시 하라” 민정수석실 압력에 육군 발칵 뒤집혀
청와대 인사 개입 남재준 총장 반발…해군 출신 윤광웅 장관 맹비난
2005년 6월19일 새벽 2시30분. 경계근무로 지친 병사들이 단잠을 자던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81연대 비무장지대 GP 내무반에서 이 부대 소속 김 아무개 일병이 수류탄 한 발과 K-2 소총을 난사해 8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국방부는 사망자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하지 않고 수도통합병원 등 4곳에 분산해 안치했다.
윤광웅 국방부장관의 정책보좌관 정태용은 오랫동안 국회 국방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국방부의 이런 조치가 못마땅했다.
조문 갔다가 봉변당한 윤광웅 장관
현안 업무를 조정하는 국방부 현안점검회의에서 정 보좌관은 “왜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해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에 인사복지 업무를 총괄하는 김승렬 차관보는 “군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야 말썽이 안 난다”고 답변했다.
이 말에 자극받은 정 보좌관이 “그게 말이 되느냐”며 “시신을 수도통합병원에 안치하고 합동분향소를 차려 유가족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세에 밀려 양주 병원, 포천 일동병원, 고양 벽제병원 등에 분산 안치되어 있던 시신이 20일 새벽에 성남의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
이 과정에서 시신이 안치된 장소를 잘못 알고 가는 바람에 몇 시간을 허비한 유가족과 친지들의 감정이 격앙되기도 했다.
2004년 12월15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윤광웅 국방부장관(가운데), 남재준 육군참모총창(오른쪽)이 생각에 잠겨있다. ⓒ 연합뉴스
윤광웅 장관이 조문을 간 것은 이날 오전 11시였다. “분향소의 유가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국방부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문을 간 윤 장관에게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아수라장이 됐다.
분향소 입구에서 수십 명의 군인과 유가족, 언론사 취재진이 뒤엉켰다. 이날 일부 유가족이 윤 장관을 시신이 안치된 관 쪽으로 끌고 갔다.
우여곡절 끝에 분향소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유가족이 국방부장관의 승용차를 가로막고 거세게 항의했다. 윤 장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뼈아픈 조문이었다.
이날 소동이 알려지자 국방부의 노련한 간부들은 저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조롱했다. 특히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있던 육군본부 간부들은 노골적으로 윤 장관을 비난했다.
장관이 조문을 가는 바람에 총장도 조문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을 불평하며 “육군 실정도 모르는 장관의 경솔한 행태”라고 수군거렸다.
1953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손원일 제독에 이어 해군 출신으로는 역대 두 번째로 국방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윤 장관에 대해 육군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국방부 내부에서의 견제와 조롱이 심했다.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데 육군은 노하우가 있었다. 1996년 북한 잠수함이 강릉에 침투해 거기에 탄 공작원들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우리 장병 17명이 전사한 일이 있다.
작전이 종료되고 언론에는 이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있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시신을 분산 안치해 개별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합동위령제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은커녕 군 최고위직도 조문을 하지 않았다. 전사자임에도 쥐꼬리만 한 국가 보상금 외에 국가가 이들을 위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봐도 국가는 항상 그렇게 했다. 일본군 전통을 답습해 군대에서의 사람은 사실상 소모품이었고, 인간적 유대에 기초한 인본주의 정신은 무너져 있었다.
윤 장관에게는 청와대 근무 시절부터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적어도 군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자신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직접 조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그 원칙을 지키겠다고 여러 번 말했던 그다.
2005년 6월24일 전방부대 총기 난사 사건의 피의자인 김 아무개 일병이 국회 국방위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받은 후 헌병과 수사관의 호위 속에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관은 우리 편 아닌가” 군의 반발
그러나 이날 조문에서는 그도 인간인지라 마음이 상했다. 이후 어느 날. 그는 필자를 호출했다. 저녁 때 만난 윤 장관은 평소보다 과음을 했다.
그리고 필자에게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말했다. 국방부에서 현역 군인을 내보내고 민간인으로 주요 직위를 교체하겠다는 국방 문민화를 핵심으로 한 국방 개혁안, 미국으로부터의 전시작전권 전환 계획 등 노무현 대통령이 맡긴 굵직한 현안들도 버거웠지만,
윤 장관에게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그가 장관으로 부임할 당시 첫 일성은 “국방부는 군을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라 국민을 대리해 군을 통제하는 조직”이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이 말은, 그러나 현역 군인들로부터 “그러면 장관은 우리 편이 아니란 말이냐”는 역풍으로 휘몰아쳤다.
이에 대해 윤 장관은 “과거에는 ‘국민이 군대화’되는 것을 요구받았다면, 이제는 ‘군대가 국민화’되는 것을 요구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시대의 요구에 맞게 군대가 변하라는 윤 장관의 강한 철학은 당시 현역 장교들이 듣기에는 어색하고 거북할 수 있지만,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국민과 군이 정상적인 관계를 정립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명확한 발전 단계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우리나라 장교 집단이 갖고 있는 국가안보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 외부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집단정신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특히 육군의 병력 감축을 핵심으로 한 50만명으로의 감군 계획이나, 1군과 3군을 통합하는 부대 구조 개편 등은 육군의 기득권을 뿌리째 흔드는 것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다.
2004년 8월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군 주요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정수석실 인사 개입, 국정상황실에서 제동
윤광웅 장관과 육군의 감정적 갈등과 앙금은 이미 남재준 총장 시절에 깊게 형성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2004년 10월13일, 군 정기인사 발표를 코앞에 둔 시기.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한 행정관이 윤 장관을 찾아가 “금번 육군에서 추천한 장군 진급 대상자는 적어도 3분의 1이 부적격 자원이니 진급 심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중대성을 알아차린 윤 장관은 순간적으로 집무실이 도청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
장관실 안쪽에 위치한 또 다른 밀실로 자리를 옮긴 후 윤 장관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행정관은 여전히 “대통령 지시”라며 민정수석이 서명한 대통령 지시라는 확인 문서를 제시했다.
때마침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전해철 비서관으로부터 윤 장관에게 전화가 왔다.
‘육군 추천 장군 진급자 중 영남과 호남의 비율을 비슷하게 맞추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기무사가 추천한 장군 진급자 세 명도 부적격자이니 바꾸라’는 내용이었다.
윤 장관은 워낙 사안이 중차대하다고 생각했는지 유효일 국방부 차관과 김승렬 차관보를 따로 불렀다.
유 차관은 하나회 출신이지만, 2004년 초 노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총선 때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불거지자 대한노인회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나름으로 기여한 바가 있었다.
김승렬 차관보는 인사 계통으로 잔뼈가 굵은 전문가이면서 하급자를 하대하는 일이 없어 국방부 안팎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과 함께 윤 장관이 믿고 의지하는 국방부의 핵심 참모들이었다.
윤 장관은 김 차관보에게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 내용을 육군에 가서 전달하라고 말했다.
마침 서울에 와 있던 육군 인사참모부장인 윤일영 소장은 아예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유 차관이 “이러면 사태가 커진다”며 사의를 만류했다.
다음 날 김 차관보가 육군으로 가서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장관 지침을 전달하자 육군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남재준 총장이 윤 장관과 전화로 “군 인사법상 재심은 곤란하다”며 버티기로 들어가 국방부와 육군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육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청와대 국정상황실은 사태 파악에 나섰다. 이내 민정수석실이 국방부에 진급자를 교체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당시 국정상황실에 파견돼 있던 장혁 중령이 허겁지겁 윤 장관을 찾아갔다.
장 중령은 “대통령은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며 “민정수석실은 검증 기능만 있지 진급 심사를 좌우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
이어 장 중령은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과 윤 장관을 전화로 연결해 “대통령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는 점을 윤 장관이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사태가 이상하게 꼬였다는 걸 뒤늦게 안 윤 장관은 육군에 가 있던 김승렬 차관보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기무사 장군 진급자를 교체한 것 외에는 육군이 추천한 진급자 명단 그대로 윤 장관이 제청 서명을 했다.
군 인사법에 의하면 육군이 장군 진급자를 추천하더라도 국방부장관의 제청 서명이 있어야 대통령이 최종 재가를 하게 돼 있다.
즉 대통령의 임면권, 장관의 제청권, 총장의 추천권으로 삼분되어 있기 때문에 청와대와 국방부, 육군 사이에는 과연 누가 진급자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행사하는지, 항상 갈등의 소지를 안게 되어 있는 셈이다.
2004년 10월14일의 이 인사 파동은 윤 장관과 육군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윤광웅에 대한 남재준의 원한과 오해
그러나 육군이 의도했던 장군 진급 인사안도 기어이 사달이 났다. 자기 사람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는 외곬의 남재준 총장에 대한 불만이 군 내부로부터 폭발한 것이다.
그 주역은 소장 진급에서 탈락한 육사 31기 출신 3명에서 비롯됐다. 1993년 하나회 명단을 살포해 유명해진 백승도 준장을 비롯한 진급 탈락자 3명을 남 총장은 진급자 발표 직전에 계룡대 인근 식당으로 불러냈다.
남 총장은 이들을 위로하며 양해를 구했으나 그중 한 명이 총장 면전에서 “절대 승복할 수 없다”며 불경하게 답변했다.
당시 3명 중 한 명으로 이 자리에 동석해 있던 김형수 준장은 거침없이 저항하는 한 동기생의 태도에 무척 놀랐다고 회고했다.
김 준장 등 3명은 육사 31기 중에서 준장으로 1차 진급을 한 선두 그룹에 속했다. 그만큼 이들의 진급 누락은 큰 불만을 야기했다.
이들의 거센 반발에 놀란 남 총장이 인근에 있던 윤일영 인사참모부장을 식당으로 불렀다.
일체의 청탁을 배제한다는 윤 부장이 이들을 설득하는 데 끝내 실패했는지, 이튿날 총장실에 나타난 3명 가운데 2명은 기어이 남 총장에게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이 국방부 검찰단에 소속된 법무관들에게 알려지면서 남 총장에 대한 인사 비리 의혹 수사가 착수됐다.
수사가 이어지는 동안 전방 사단장으로 진출해 있던 육사 31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현 육군의 인사 파동에 총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연판장을 돌리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육군 창설 이래 최악의 자중지란이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국정상황실, 국방부와 육군, 기무사, 국방부 검찰단이 뒤엉켜 마치 가면무도회처럼 주요 행위자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송영근 기무사령관은 인사 파동 여파로 임기를 6개월 남겨놓은 상황에서 전역했다. 남재준 총장의 원성은 주로 윤광웅 장관에게로 향했다.
심지어 남 총장은 “윤 장관이 청와대 386 공산주의자들을 배후 조종해 육군을 장악하려 한 것”이라는 뼛속 깊은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해의식은 윤 장관이 인사 파동 이후 노 대통령에게 남 총장의 경질을 극구 반대한 사실로 비춰볼 때 정당성을 갖기 어려웠다.
날로 자유주의가 확산되는 현대사회에서 국방부를 문민화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열겠다는 이상으로 가득 찬 윤광웅 장관은 지금도 국방부 일반직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역대 가장 존경하는 장관으로 꼽힌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껏 유지되어온 군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육군으로부터는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육군의 집단의식은 이후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분출되기도 했다.
2009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이어 서거하자 국방부 일원에서 고위직들 사이에 “이제는 더 이상 좌파의 괴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대화 내용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개혁에 저항하는 걸 당연시하는 등 완고한 보수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군사문화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정치 지도자와 군 지도자 간에 필요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소통과 신뢰를 오히려 군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군도 성찰해야 한다는 지적이 그것이었다.
[시사저널] 201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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