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20. “최고 군사 지도자가 대통령에게 궁색한 편지나 써서야…”
노 대통령-이상희 합참의장, 국군의 날 행사장서 정면충돌… 이 의장 사과 편지에 윤광웅 장관 역정
국군 기무사령부나 국가정보원이 청와대에 올리는 보고서에는 ‘동향’ ‘관찰’ ‘수집’과 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바로 정보기관의 속성이 담겨 있다. 무슨 동향을 관찰하고 수집한다는 말일까. 정보기관 사람들 하면 검은색 선글라스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지만,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모른다. 선글라스는 눈동자의 방향, 즉 시선을 감춰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왠지 주눅이 든다. 그 시선으로 뭘 보고 있다면 대체로 군 장교단이 관찰의 대상이 될 터인데, 여기서 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군심(軍心)’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은 군 장교단의 여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이 말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국군통수권자가 바로 대통령 자신인데, 대통령의 국방정책에 대한 ‘군 장교단의 여론은 어떠하다’는 식의 보고서는 대통령에 대한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할 말이 있으면 군사 지도자가 대통령에게 직접 하면 그만이지, 정보기관이 끼어들어 군심이라는 용어로 뭘 전달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2006년 6월16일 노무현 대통령이 계룡대 대회의실에서 군 주요 지휘관 대상 특강을 위해 윤광웅 국방부장관(앞줄 맨 오른쪽)·이상희 합참의장(맨 왼쪽) 등과 입장하고 있다. ⓒ 청와대기자단
합참의장의 전작권 전환 시기상조론, 미 일축
이런 보고서가 2005년부터 무수히 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당시는 본격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권 전환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2006년이 되자 청와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과 예비역 장성들은 한국 안보의 기축이 붕괴되는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며 반대 의지를 확산시켜나갔다. 노 대통령은 그해 8월9일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일부 보수 언론에 대해 “안보 장사 시대에 성공한 일부 신문들이 국민의 눈과 귀를 오도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한·미 간에) 자연스러운 협상 과정을 갈등이라고 계속 부풀리고 정치적 공격 자료로, 심지어 (내가 부시 대통령과) 전화한 지 몇 달 됐느냐고 한다. 유치하게 하지 말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에 비위가 상한 예비역들은 군 서열 1위인 이상희 합참의장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전작권 전환이 불가한 이유를 대통령에게 제대로 직언했느냐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러면 이 의장은 “전작권 전환에 협조하면 국방비가 많이 확보된다”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했다.
화가 난 노 대통령에게 합참의장 사과 편지
8월15일 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질서’를 강조하면서, 자주국방에 대한 신념을 재차 밝혔다. 이날 전작권에 대한 대통령의 16번째 공식 발언이 나왔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국군통수권에 관한 헌법 정신에도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또한 달라진 우리 군의 위상에 걸맞은 일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준비하고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체계적으로 추진해온 일입니다. 확고한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고 있고, 미국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군의 역량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이었다. 미국은 2009년까지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으나, 우리의 준비 정도를 고려할 때 너무 촉박했다. 이상희 합참의장은 “2009년 전작권 환수는 한국군 준비 상황으로 볼 때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담은 편지를 작성해 미국 국방부에 발송했다.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나오던 때와 거의 동시에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답장을 피네건 한국과장이 갖고 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 자꾸 자체 준비 부족을 이유로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작권이 전환되더라도 전쟁이 나면 한국 홀로 북한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의 취약한 전력을 보완하게 되면 얼마든지 대비가 가능하다. 그런데 마치 한국은 혼자 싸우는 것처럼 인식하고 단독 방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자고 하는데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정대로 2009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완료하고자 한다.”
미국은 전작권이 한국으로 전환되더라도 이미 예정된 주한미군 감축 외에 추가 감축은 없으며 한국에 대한 방위 공약은 준수되기 때문에 조기 이양하겠다고 압박해왔다. 9월1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전작권을 한국에 전환하는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군사적 문제로 접근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정치적 논란을 피해 조속히 전작권을 이양하겠다는 미국의 의도에 노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다. 이 무렵 한국의 보수 세력이 전작권 전환에 반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가장 큰 맹점은 “한국이 자주국방을 주장하지만 않으면 미국은 전작권을 한국에 전환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언제까지나 미국은 한국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작권이 거론되기 이전에 이미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했고, 자체 필요에 따라 변화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혈맹이라는 미국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보수층이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모양새를 보이자 미국 국방부는 짜증을 냈다. 전작권 문제가 정치쟁점화하면서 이상희 합참의장은 더욱더 궁색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는 계룡대. 대통령 내외, 윤광웅 국방부장관과 이상희 합참의장, 김장수 육군 참모총장, 남해일 해군 참모총장, 이한호 공군 참모총장이 기념식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다과를 먹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다시 이상희 합참의장에게 질문했다. “군은 2012년까지 전작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습니까?” 한 달 전쯤 청와대 회의에서 노 대통령으로부터 “2009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준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세 번 받고도 대답을 안 했던 이 의장이었다. 마지막엔 노 대통령이 역정까지 냈으나 끝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이 의장은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열심히 하고는 있으나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대답에 이어 이상희 합참의장이 계속 “어렵다”고 주장하는데, 그 태도가 무엇이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무엇이 부족하고 등을 죽 늘어놓는 식이었다. 이 의장은 이미 8월부터 전군 순회강연을 하면서 ‘2012년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전파했고, 합참에는 이를 전담하는 TF(태스크포스) 팀까지 구성한 상황이었다. 합참이 2009년이 어렵다고 해서 2012년에는 가능한 것으로 노 대통령이 양보한 것인데, 또 어렵다고 하는 합참의장의 말을 듣는 순간 노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지며 실망과 분노 같은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대통령과 군 수뇌부 사이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날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들어온 윤 장관의 표정도 밝지 못했다. 안색을 살피던 정태용 정책보좌관이 장관에게 다가가 “장관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윤 장관이 한숨을 쉬면서 “합참의장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탄식을 했다. 아마도 윤 장관은 이 의장이 군 수뇌부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전작권 전환을 반대하는 걸 과시하는 정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2006년 3월21일 국방부에서 열린 한·미 미래안보정책구상회의에서 권안도 국방부 정책홍보부장 (가운데)과 롤리스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 (왼쪽 두 번째) 및 양측 대표단이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군의 날에 ‘불경’을 저지른 이상희 합참의장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합참의 한 장군을 청와대의 박선원 대외전략비서관에게 보냈다. 이 장군은 박 비서관을 만나 “합참의장이 고민하고 있다”며 “의장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조언을 구했다. 박 비서관이 “사의를 표명하든지, 대통령께 정중하게 사과 편지를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답변했다. 이 조언에 의해 작성된 사과 편지를 본 윤 장관은 적잖이 놀랐다.
최고의 군사 지도자가 이런 따위의 궁색한 편지나 써서 대통령에게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신의 편지를 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는 합참의장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윤 장관은 “합참의장은 대통령과 언제든 만나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대통령과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직접 말하라”고 일축했다.
이라크 문제에 쏠린 럼스펠드의 파격적 양보
10월20일의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SCM)를 엿새 앞둔 2006년 10월14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는 안보 관계 장관 간담회가 열렸다. SCM을 앞두고 미국과의 협상 전략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한 자리였다.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의 2012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의 요구대로 2009년에 전작권을 가져오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대책회의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이상희 의장이 노 대통령에게 “이것을 좀 읽어주십시오”라며 문제의 편지를 건넸다. 분명히 직접 말로 하라고 했는데 무슨 편지를 건네는 걸 보고 윤 장관은 크게 놀랐다.
2006년 10월19일, 백악관 바로 옆 건물 옥상에서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윤광웅 국방부장관 일행을 환영하는 럼스펠드 국방장관 주최의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럼스펠드는 약속된 시간보다 30분 늦게 나타났다. 럼스펠드는 프랑스 국방장관 미셀 알리오 마리와 얘기가 길어졌다고 해명했다. 기분이 좋아진 럼스펠드가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미니스터리 윤, 전작권 전환? 그것 한 5, 6년이면 되는 것 아니오?” 윤 장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연하죠. 그래서 2012년에 전환하자는 것 아닙니까?”
한·미 실무진 간에 환수 시기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럼스펠드는 거의 이 문제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라크 상황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서 있던 롤리스 부차관보의 표정이 못마땅한 듯이 일그러졌다. 이날 낮에 롤리스는 한국 측에 “전작권 전환은 2011년 10월15일로 하자”고 제안했다. 롤리스 입장에서는 럼스펠드 장관이 협상의 마지막 카드를 다 내보인 것 같아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롤리스가 알아서 하겠지.’ 럼스펠드는 금방 이라크 문제로 마음을 돌려버렸다.
원래 술을 한 잔도 못하는 럼스펠드는 서둘러 행사를 마무리했다. 윤 장관은 이제껏 강경하던 미국의 태도가 한국에 협력적인 분위기로 누그러진 데 대해 적잖이 놀랐다. 리셉션을 끝내고 숙소인 리츠칼튼호텔로 돌아온 윤 장관은 그의 방에서 이상희 합참의장, 정태용 정책보좌관, 권안도 국방부 정책실장, 김규현 국제협력관,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인 송영무 해군 제독, 합참 작전부장인 안기석 해군 제독 등 핵심 참모들과 함께 다음 날 SCM 본회의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른 장소에서는 한·미 전략 실무자들이 다음 날로 예정된 SCM 본회의에서 전작권 전환 시기를 합의하기 위한 조인트 커뮤니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김규현 국제협력관이 무언가 전갈을 받더니 숨 넘어가는 소리로 윤 장관에게 보고했다. “롤리스 차관보가 2011년 12월31일로 하자고 합니다.”
미국과 협상 결렬 예상하고 특별선언 준비
마침내 10월20일 제38차 SCM 본회의 당일이 되었다. 한국 일행은 펜타곤 앞에서 의장 환영 행사를 했다. 이어 30분간의 양국 장관 단독 회담. 그리고 곧바로 SCM 본회의가 열렸다. 럼스펠드 장관은 재차 전작권이 한국에 조기 이전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취약한 전력은 미국이 지원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이를 ‘연계전력(bridging capability)’이라고 표현했다. 연계전력은 전시작전권이 전환된 이후에도 한국이 당분간 미국에 의존하게 되는 전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윤 장관은 우리의 자주국방 계획과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 추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전작권 이양은 최소한 2012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날 회의에서 두 장관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의는 벌써 일곱 시간째. 럼스펠드 옆에 롤리스 부차관보가 앉아 있고 바로 그 맞은편에 권안도 정책실장이 앉아 있었다. 며칠 전부터 사전 실무 협의를 통해 미국을 계속 압박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의외로 강경하던 미국 측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두 장관이 회의를 하는 동안 롤리스와 권안도 실장의 설전이 계속되었다. 밀고 밀리는 신경전이 계속되는 동안 계속 롤리스가 쪽지에 무엇인가 적어 권 실장에게 건네주었다. “2012년 1월1일.” 그러면 권 실장이 또 이를 반박했다. “설날에 무슨? 안 돼.” 또 쪽지가 날아왔다. “2012년 3월1일.” 그러면 권 실장이 “3·1절이야. 안 돼.” 롤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1절이 뭐야? 왜 안 돼?” 그러자 권 실장, “한국이 자주독립한 날 아니야? 휴일이라 안 돼.” 쪽지는 거기서 멈추고 롤리스가 호통을 치듯이 말했다. “자주독립을 한 날이니까 전작권을 가져갈 수 있는 것 아니야?”
회담 중이던 두 장관도 흠칫 놀라 각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실무자들끼리 얘기하도록 놔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두 장관은 일어나 펜타곤을 떠났다. 결국 이날 ‘2012년 3월15일’로 전작권 전환 일자가 합의되었다. 이날 밤 9시에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한편 청와대는 SCM에서 합의가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노 대통령과 송민순 안보실장 등 관련자들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가 한국 시간으로는 10월21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전작권 전환 시기는 한국의 입장대로 2012년 3월15일로 합의를 이루었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재가했다. 훗날 윤 장관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날 윤 장관의 이러한 보고가 없었다면 노 대통령은 “2009년에 전작권을 환수하겠다”고 자신이 직접 발표할 작정이었다. 청와대의 대책회의는 바로 이 특별선언을 하기 위한 회의였던 셈이다.
이로써 1991년 10월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에서 전시와 평시 작전통제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이래 16년간의 긴 여정이 일단락되었다. 이 합의 이후 보수 정권은 대미 외교에서 어떻게든 이 합의를 수정해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자 한때 전작권 전환의 주역이었던 노무현 정부에서의 김장수 국방부장관, 이상희·김관진 합참의장 등은 일제히 전작권 전환 반대론자로 말을 바꿔 탔다. 그 천연덕스러운 입장 변화는 한때 그들의 협상 상대였던 미국 국방부마저 놀라게 했다.
[시사저널] 201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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