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22. ‘노무현 지우기’ 나선 MB, 청와대 지하 벙커 위기관리센터 해체
국가안보와 재난 위기관리 핵심 요원들 대거 퇴출…그때부터 세월호 비극 싹터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파견되어 있던 류희인 공군 대령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만일 대통령 유고와 같은 리더십의 공백 사태가 발생하면 국가는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가”였다. 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였다. 평양에서 대통령이 억류되거나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빨간 비상등 하나가 켜졌다. 즉시 그는 정부 문서를 다 찾아보았으나, 헌법에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행동 절차도, 비상계획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거에도 그랬다. 1961년에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5·16으로 군대를 동원했을 때 잠적한 장면 총리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는 사흘 만에 나타난 장 총리에게 “빨리 쿠데타군 진압을 명령하라”고 독촉했지만 장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다시 숨어버렸다. 만일 그때 장 총리가 자신의 국군통수권을 적극 행사했더라면 미국은 주한미군까지 동원해서 쿠데타군을 진압할 용의가 있었다. 국군 통수 체계가 사라진 힘의 공백에서 5·16은 성공할 수 있었다.
2009년 3월30일 이명박 대통령이 런던 G20 정상회의 출국 전날 청와대 지하 벙커에 설치된 비상경제상황실에서 관계자들의 보고를 듣고 있다. ⓒ 청와대 제공
MB의 냉소 “돈 많이 들였으면 잘 써먹어야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면서 시작된 1979년의 12·12 사태 역시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행적을 감추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에 국정의 주도권이 넘어간 사건이다. 만일 그때 국방장관이 제자리에서 역할을 다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국가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었을 때 누가 어떤 절차로 위기를 수습해야 하는가는 국가 존립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위기를 겪고도 국정 운영에서 ‘위기관리’라는 의제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또한 안보 위기나 사회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왜 대통령과 정부는 이렇게 무능한 것일까. 위기관리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예방하고 대비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관리의 개념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국가 시스템이 제법 선진화되어 있다고 믿을지 모르나, 사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무언가가 뻥 뚫려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파견되어 있던 류 대령이 “우리나라에는 안보와 사회 재난까지 포괄하는 체계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없다”며 이 문제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에게 제기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였다.
정작 국가안보를 외치며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 노무현 정부의 색깔 지우기에 집중하다 보니, 국가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위기관리의 연속성과 국가 보위의 기본을 망각했다. 우선 사람을 너무 급격히 바꾸는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청와대에는 군에서 파견된 26명의 장교가 안보수석실, 경호실, 국정상황실, NSC 위기관리센터 등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집권한 지 한 달 만인 2008년 4월 이 중 20명을 군으로 복귀시켰다. 상당수는 자리 자체를 없애거나 정권과 줄을 댄 정치장교들로 채워졌다. 심지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서 14명의 수석들을 보좌해온 여직원까지 내보냈다. 새로 정치권에서 데리고 온 여직원은 전화 연결을 할 줄 몰랐고, 운전기사는 주요국 대사관이 어디 있는 줄 몰랐다. 각 사무실의 컴퓨터 작동에 필요한 패스워드를 아는 사람도 사라져 업무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는 와중에 청와대는 위기관리센터도 해체하겠다고 했다.
당시 센터장을 맡고 있던 류희인 소장은 어떻게든 센터 해체만은 막아야 했다. 류 소장이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에게 센터의 기능을 설명하며 해체를 막아달라고 도움을 청하자, 김 수석은 이를 경청했다. 김 수석이 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위기관리센터를 방문하도록 한 때는 4월 초였다. 당시 위기관리센터에 근무하던 김형근 행정관은 이 대통령 앞에서 정부의 총 27개 안보·재난 및 안전 관련 상황 정보가 센터 상황실과 연결되어 있어 대통령이 필요시에 언제든 국가의 상황 정보를 실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더불어 안보 위기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부 주무 부처가 어디인가를 알려주는 총 33개의 위기 유형에 대비한 국가 위기관리 기본지침과 운영 매뉴얼도 소개했다. 그런데 브리핑을 다 듣고 난 이 대통령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돈 많이 들였으면 잘 써먹어야지.”
위기관리센터 요원들 연수원으로 좌천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8월 말까지만 센터를 더 시험 운영해보고 해체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4개월여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다. 그래서 청와대를 나가려고 짐을 싸던 센터 요원들이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상황실 핵심 요원들에게 보직 해임 통보와 함께 중앙공무원연수원에 입교해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잔뼈가 굵은 김형근 행정관도 여기에 포함돼 청와대에서 쫓겨난 공직자들과 함께 연수원으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 도중에 갑자기 KBS·MBC 카메라가 교육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날 밤 9시 뉴스에 “정부가 무능한 퇴출 공무원을 재교육한다”는 소식과 함께 자신의 모습이 TV에 나오는 걸 보고 김 행정관은 경악했다. 이렇게 해서 센터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고, 위기관리센터라는 명칭도 위기관리상황실로 바뀌었다. 물론 센터장 자리도 행정관급으로 격하되었다. 이어 5월에는 청와대 지하 벙커에 위치한 위기관리상황실이 이명박 정부 초기에 엄습한 국가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비상경제상황실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국가 위기나 재난 상황에 대비하던 상황판은 가려지고 각종 물가지수나 증권지수를 표기하는 새로운 데이터로 교체되었다. 국가안보와 재난에 대한 위기관리가 국가 경제 위기관리로 대체된 것이다. 이 비상경제상황실에서의 첫 작품이 당시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경제평론을 하던 네티즌 구속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위기관리센터에는 27개 상황 정보 시스템 중 하나로 선박 관제 시스템(VMS: Vessel Monitoring System)도 구축돼 500톤급 이상의 선박에 대해 전 세계 어디서든 조난이 발생하더라도 즉각 청와대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더불어 해경의 주요 경비정에 설치된 감시카메라(CCTV) 화면을 청와대가 직접 볼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돼 해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청와대가 그 상황을 얼마든지 모니터링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런 시스템은 각 기관별로 진화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청와대 시스템만은 거의 개선되지 않거나 심지어 퇴화했다. 각종 재난 사태에서 청와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이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배경에는 안보 위기 외에 재난 상황에 대해서는 청와대 안보실이나 위기관리센터가 거의 개선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NSC 사무처도 해체되고, 외교안보 부처 장관들의 정책조정회의인 NSC 상임위원회도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전시에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고 군사 작전을 지원하는 국무총리실 비상기획위원회도 해체되었다. 청와대는 위기관리 매뉴얼은 없애지 못하니까 트럭에 실어 행정안전부로 보내버렸다. 오늘날 그 매뉴얼의 일부는 어디론가 유실되어 찾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NSC의 각종 회의록, 중요한 외교 문서, 정부의 행동 매뉴얼 등이 노무현 대통령 말기에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이미 이명박 정부 차원에서는 그러한 노무현 시대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지워나가고 있었다.
2008년 전반기 공군 지휘관 회의가 4월23일 공군본부에서 열려 김은기 참모총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공군본부 참모 및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청와대 ‘금강산 관광객 피격’ 7시간 지나 알아
이와 함께 이전 정부 시절 NSC에서 위기관리 업무에 종사하던 군 장교들에 대해서도 압박이 시작되었다. 이상희 국방부장관은 김은기 공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해서 “류희인 소장을 구속해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 총장이 “아니 뭘로 구속을 시킵니까?”라며 반문했다. 김 총장은 이 당시 류 소장을 비호했다는 게 괘씸죄의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해 그해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국방부장관실과 한나라당 국회 보좌관들이 “(김 총장과 류 장군이) 노무현 정부 당시 측근 군맥을 형성했다”며 부적절한 인사 개입 문건을 만들어 청와대에 제출했고, 그 직후 김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중령·대령의 장교들이 이후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이런 전문성의 해체는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국가의 위기를 관리하는 현장,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 공무원의 손가락 끝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6월말까지 쇠고기 수입 개방 반대로 촛불시위가 벌어지자 대통령과 청와대는 거의 공항 상태였다. 시위 현장에서는 진압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로 경찰의 요직이 교체되자 무리한 지시가 남발되었고, 그 결과 용산에서 시위를 하던 8명의 철거민이 불에 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금강산에서 우리 관광객이 피살되었지만 7시간 넘게 청와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면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북한에 대화 제의를 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사회 곳곳에서 불행한 사건이 반복되어도 청와대의 재난 관리 시스템은 거의 작동되지 않았다. 국정에서 위기관리라는 의제 자체가 실종된 것 같았다.
미국의 경우 국가 비상사태에서 국가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는 섬세한 계획으로 준비되어 있다. 심지어 대통령 연설문과 장관의 담화문까지도 다 준비되어 있다. 9·11 테러 당시를 살펴보자.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45분에 여객기가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충돌할 당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 주 초등학교에 있었다. 사건 발생 20분 후인 9시5분에 최초 보고를 받은 부시는 급히 백악관으로 귀환하면서 대국민 메시지를 준비한다. 사건의 주범을 모르는 상황에서 당일 부시의 행적에는 모두 3건의 성명 발표가 포함되어 있다.
1차는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이라며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집중되었다. 2차는 테러에 대한 보복 의지를 천명하고 국제사회의 협조를 요청한다. 3차는 테러 공격 배후자들과 이를 보호하는 국가에 보복 의사를 천명한다. 담화 이후 즉시 부시는 먼지가 자욱한 테러 현장으로 가서 소방관들과 함께 서서 또 연설을 한다. 이후로 부시는 거의 매일 직접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으로는 △‘21세기 첫 전쟁’이라 규정하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의지 천명(9월12일) △“우리의 책임은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명확한 방향 제시(9월13일) △“악을 제거하기 위한 성전 개시” 성명 발표(9월17일) 등이다. 이와 함께 국무·국방·법무·보건·농업 등 각부 장관들이 일제히 자기 분야 조치 사항과 추진 방향에 대해 거의 매일 브리핑을 하는데, 3일 동안의 브리핑만 50회가 넘는다. 전대미문의 테러를 당한 상황에서 미국 국민들은 가장 불안한 시기에 용기 있게 행동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높은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불안에 빠진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요구(demand)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함께한다는 신뢰로 화답(support)하는 관계, 이를 일컬어 ‘소통’이라고 한다.
2008년 3월26일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국회 국방위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북한 핵기지 선제 타격” 합참의장 발언 파장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26일, 창군 이래 최초로 합참의장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이 핵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빨리 확인해서 적이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타격하는 것이고, 그것이 저희 쪽에 사용되지 않게끔 하는 것, 그 다음에 또….” 당시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의 이 말 한마디에 한반도는 크게 요동쳤다. 김 내정자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우리의 대비책은 무엇이냐”는 김학송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에 이와 같이 답하며 “미사일에 대한 방어 대책 등을 통해 그 핵이 우리 지역에서 작동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날인 27일 중앙일보가 ‘북한이 핵무기 공격한다면 작동하지 않게 핵기지 타격’이란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내보내고, 기타 신문과 방송들이 일제히 인용 보도함에 따라 김태영 합참의장의 발언이 일파만파 확산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부 언론은 김 의장의 답변을 “예방적 차원의 선제공격 개념”이라고 언급하면서 “북한 핵무기에 대한 선제공격론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시 독트린’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우리 당국이 밝히기는 처음이다”라고 확대 해석해 북한은 물론 국내 진보 정당 및 시민단체들을 자극했다.
당장 이에 반발한 북한은 28일 오전 급기야 서해상에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안보 상황 자체는 변함없는데, 오직 ‘말’만으로 위기가 조성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민 안전 그 자체라는 포괄적 안보 개념은 사라지고 오직 북한의 위협만을 보는 전통적인 군사 안보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 파장은 얼마 후 역대 어느 정권도 겪어본 적 없는 전대미문의 안보 위기로 발전한다.
[시사저널] 201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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