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19. “저놈들 다 끌어내라” 국정원 요원들 개처럼 끌려나가
합참, 연평도 해전 복수 위해 거짓 보고…노무현 대통령, 진상조사 지시
2004년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이 과연 도발하고 전쟁을 지속시킬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자문을 구했다. 이에 NSC 서주석 실장은 국방연구원(KIDA) 황동준 원장(예비역 육군 대령)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이 연구는 ‘과연 우리가 북한의 위협을 얼마나 객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국방연구원은 미국에서 도입한 워게임 모델(M&S: Modeling&Simulation)을 활용해 남북한 군사력을 측정했는데, 육군은 북한 대비 열세, 해군과 공군은 대등하거나 우세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연구 과정에서 자기 군의 예산이 삭감될 것을 우려한 각 군이 NSC와 국방연구원에 각기 사람을 보내 “우리가 열세인 것으로 해달라”는 로비를 집요하게 해온 결과였다.
“국방부 요구대로 데이터 바꿔라”
이 연구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된 때는 2004년 5월이었다. 아무래도 청와대의 ‘주문 생산’에 의한 연구이다 보니 국방부와 합참은 이 연구를 못마땅해했다.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 연구에 국방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황 원장은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참석한 토론회를 열었다. 합참의 영관급 장교들이 나서서 국방연구원 연구원들에게 “우리가 제시한 데이터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며 강하게 압박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서주석 실장은 토론의 방향이 국방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공격하기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대해 경악했다. 황동준 원장은 갑자기 자신이 공격받는 것에 놀라서 다소 반항적인 어조로 조 장관에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연구원이 잘못된 연구를 했단 말입니까?” 조 장관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연구를 해서 공연히 시끄럽게 만드나? 국방연구원이 그런 곳인가?”
2007년 10월1일 노무현 대통령이 건군 제59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열병 차량에 올라 각군 기수단 앞을 지나며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김종환 합참의장 역시 “전문가도 아닌 연구원들이 이런 연구를 해서 군의 사기를 꺾어놓는다”고 거들고 나섰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이 대폭 열세임을 평소 강조해왔던 국방부와 합참은 북한의 위협을 부풀리는 쪽으로 데이터를 수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방부에서 질타를 받고 국방연구원으로 돌아온 황 원장이 “우리 연구에 대해 군 수뇌부가 불쾌해한다”며 “국방부 요구대로 데이터를 바꾸라”고 연구원들에게 지시했다.
그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얼마 후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NSC와 국방연구원의 남북 군사력 평가 보고 내용이 국방부 압력에 의해 조작된 데이터에 근거했다고 믿고, 관련 연구원들을 불러들여 조사를 벌였다. 두 명의 연구원이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 한 명으로부터 데이터를 바꾸라는 황 원장의 지시가 있었음을 시인하는 자술서를 받았다. 그해 6월 민정수석실은 NSC가 조작된 수치를 바탕으로 잘못된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는 조사 결과를 노 대통령에게 올렸다. 황 원장은 대통령과 국방부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몹시 흔들리는 것 같았다.
7월에 열린 NSC 상임위원회와 그 후에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안보 위협에 대한 객관성 있는 평가와 체계적인 접근 방식이 무엇인지를 참석자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문제가 왜 중요한가’라는 참석자들의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너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으나 더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유사한 또 하나의 심각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2002년의 제2 연평해전 이후 2함대에 서해는 가히 전쟁터였다. 국방부와 해군으로선 NSC 사무처가 NLL에서 남북 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적어도 2함대는 2002년 패전을 갚아주고자 하는 복수 정서로 가득 차 있었다. 사건은 2004년 7월14일에 일어났다.
이날 오후 4시47분, 연평도 서방 15마일 해상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단속하던 북한 경비정이 NLL 남방 0.7마일까지 침범했다가 우리 해군 함정의 함포 경고사격을 받고 7분 만에 퇴각했다. 한 달여 전인 6월3일 개최된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 남북 함대 간 핫라인 개통을 합의하고 뒤이어 12일에 장성급 회담 1차 실무 접촉에서 서해에서의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국제상선공통망(공동주파수) 운영에 합의했으며, 14일에는 남북 해군 함정이 서해 NLL 부근에서 첫 무선 교신에 성공함으로써 15일부터 핫라인이 공식 개설되었다.
또한 6월29일에도 2차 실무 접촉이 이뤄져 군사분계선(MDL) 선전물을 단계적으로 철거하는 문제를 협의하는 등 남북 간에 군사 협력이 발 빠르게 진행되던 와중에 우리 함정이 북한에 포를 발사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남북 함정 간 교신이 없었느냐에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합참은 “6월에 개통된 핫라인을 통해 네 차례 경고 방송을 했는데도 북측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며 “그 때문에 경고용 함포 두 발을 발사해 내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합참과 2함대의 조직적인 반발
이에 주요 언론은 북한이 NLL 수호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해를 침범했을 가능성까지 추측하는 보도를 내보내며, 곧이어 개최될 3차 실무 접촉에서 우리 측이 북에 강력히 항의할 것이라는 합참의 입장을 내보냈다. 그런데 이튿날인 7월15일 북측이 “중국 어선이 넘어갔다는 내용으로 남측을 호출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았느냐”는 내용의 항의성 전화통지문을 보내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NSC 사무처의 정보관리실은 국가정보원을 통해 북측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군이 고의로 교신 사실을 은폐하고 허위 발표를 한 것을 확인했다. 이에 노 대통령이 허위보고를 한 경위에 대해 진상조사를 할 것을 지시했고, 국방부도 합참이 잘못 발표한 사실을 시인하며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수모를 겪는 일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함정의 발포를 승인한 합참까지 조사 선상에 올랐다. 당연히 합참과 2함대는 조사에 조직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합참은 해군의 경고사격이 있기 이전인 4시50분쯤 청와대 NSC 위기관리센터에 보고한 후 경고사격을 해군에 지시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청와대 승인을 받았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6월21일 충남 논산시 계룡대를 방문해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 장성 1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방부 복도에서 국정원-합참 물리적 충돌
합참의 발표가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을 지켜본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경악했다. 분명 보고를 받은 시각은 이미 사격이 끝나고 북한 함정이 퇴각하던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그러나 이를 규명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차례 통화 가운데 어느 것이 합참의 상황보고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논란이 지속되던 7월17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합참에서 상황을 보고받는 위기관리센터의 한 중령은 3교대로 돌아가는 상황실 근무의 휴무여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사할 것이 있다”는 기무사 요원의 연락을 받고 불려갔다. 기무사에 가보니 합참 지휘통제실 요원 장교 9명이 “4시50분에 위기관리센터에 보고한 후 경고사격을 해군에 지시했다”고 진술한 내용이 적힌 서류가 놓여 있었다. 기무사는 이 진술서를 근거로 위기관리센터의 중령을 “4시50분에 보고받고도 5시 이후에 보고받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심지어 그 중령을 ‘시간도 기억 못하는 멍청한 놈’ 또는 정신병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한 위기관리센터장 류희인 공군 준장은 기무사의 전날 사건을 보고받고 격분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기무사가 자신의 부하를 데려가 고강도로 조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분명 군부의 심상치 않은 조짐은 청와대에 대한 조직적인 항명처럼 보였다. 합참의 거짓말을 밝혀낼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류 센터장은 우연히 청와대 경호실의 통신 담당 요원과 같이 청와대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 교신 내용을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류 센터장에게 경호실 요원이 방법을 알려주었다. 위기관리센터의 교신일지와 합참 청사의 전화 단자판을 뜯어서 그 기록을 비교하는 방법 등이었다. 즉시 NSC에서는 이 문제를 국정원과 협의해 작전을 짰다.
국정원 요원 2명을 업체 기술요원으로 위장시켜 비밀 조사단을 편성한 후 합참에 투입했다. 합참과 위기관리센터를 연결하는 핫라인의 단자판을 열어 실제 교신 시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 단자판을 여는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헌병들이 국정원 요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헌병을 지휘하는 한 간부가 “저놈들 다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측과 이를 덮으려는 측 간에 막말과 고성이 오가며 승강이가 벌어졌다. 국정원 요원들이 헌병에 의해 개처럼 끌려나갔다. 보고가 15분 전이냐, 후냐를 두고 청와대와 합참 간에 필사적인 진실게임이 물리적 충돌로 번지는 사태가 초래된 것이다. 이 소동 이후 합참의 보고는 5시 넘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소동을 겪고 조사가 완료되어서야 2함대는 “제대로 보고하면 청와대가 쏘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허위보고를 했다”고 실토했다. 이에 군에 대한 문책이 논의될 시점에 이번에는 국방부 정보본부장인 박승춘 중장(현 국가보훈처장)이 한 언론사의 국방부 출입기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의 남북한 함정 간 교신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며 군의 입장을 변호했다. 이것도 청와대로서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공식 브리핑이 아니라 특정 언론을 선택해 중요한 정보가 보도되도록 한 것은 노골적인 불만의 표출이었다.
정동조 합참 전력기획2차장(해군 준장)이 2002년 7월7일 국방부에서 서해교전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보본부장의 ‘거사’…청와대의 응징
당시 국방부 정보본부는 박 중장 부임 이전에 임기를 제대로 마친 본부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혼란과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본부장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일어난 박 본부장의 ‘거사’에는 즉각 청와대의 응징이 이어졌다. 길게 갈 것도 없이 7월에 박 본부장은 불명예 전역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시기에는 군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군의 정책과 정보라는 핵심 분야에서 사사건건 청와대와 충돌했다. 군이 보기에 청와대는 현행 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등 부당한 간섭을 자행하는 권력이었고, 청와대가 보기에는 군이 입만 열면 서슴지 않고 국민과 대통령을 기망하는 거짓말쟁이였다.
결국 한반도에서 남북 관계의 발전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군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 그러나 군은 국가안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내세워 정치권력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이런 정치와 군사에서의 갈등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독특한 현상도 아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터키에 주둔하는 미군 사령관이 공격을 받을 경우 대통령의 승인 없이도 소련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긴급방위계획(EDP: Emergency Defense Plan)’이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위기가 지나가고 케네디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전략공군사령부(SAC)의 토마스 파워 장군으로부터 소련과의 핵전쟁 계획에 대해 보고받았다. 어떠한 중간 단계도 없이 첫 번째 핵 공격으로 중국과 소련의 대도시 인구 1억명 이상이 살상되는 엄청난 규모의 핵 준비 태세였다. 이에 대통령이 계획의 무모함을 지적하자 파워 장군은 이렇게 대꾸했다. “대통령 각하, 만일 핵전쟁이 일어나서 소련에서 1명 살아남고 미국에서 2명이 살아남는다면 미국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 말에 케네디는 좌절했다. 20만의 병력과 수천 개의 핵미사일을 보유한 전략공군사령부는 케네디가 보기에는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괴물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인류의 종말도 불사할 것 같은 냉전의 전사들이었다. 이듬해인 1963년 케네디는 유엔총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인류가 전쟁을 끝장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장낼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연설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핵무기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그해 10월에 케네디는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상에 착수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 직후 암살당했다. 미국 군부에 케네디는 동지라기보다 적에 가까웠다.
분명히 군이라는 조직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안보의 ‘대리인(agent)’이라기보다 정치 지도자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가공할 ‘권력(power)’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위계질서, 문화를 완강하게 고수하며 쉽게 말이 통하지 않는 곤란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진보 성향의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기 때문에 청와대와 군 간에 이런 불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도 그 못지않은 갈등은 무수히 반복된다.
오히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겪은 이명박 정부에서 군에 대한 불신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이건 미국이건 정치와 군의 관계는 정치권력이 보수냐, 진보냐를 뛰어넘는 숙명적인 그 무엇으로 얽히고 충돌하는 관계였다. 당시 노무현은 서서히 케네디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예 미국에 가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강경책을 명확히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한·미 간에도 매우 어려운 시기가 닥치고 있었다.
[시사저널] 201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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