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將軍들의 전쟁

[將軍들의 전쟁] #16. “우리 병사 한 명이라도 죽으면 감당 못할 사태 온다”

머린코341(mc341) 2015. 9. 5. 14:01

[將軍들의 전쟁] #16. “우리 병사 한 명이라도 죽으면 감당 못할 사태 온다”


자이툰 부대 주둔지 놓고 국방부-NSC 충돌 김선일씨 피살에 ‘파병 반대’ 역풍 


운전대를 잡은 이지은 일병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에서 팔루자 방향으로 뻗어 있는 고속도로 위에는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디선가 들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올리자 차는 심연 속으로 빨려들 듯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침착해!” 뒷좌석의 최종일 준장이 말했다. 이 일병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였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권총 한 자루에 목숨을 맡기고 아무런 경호도 없이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어디서 저항군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


런 상태로 35㎞를 가야 한다. 저항군에 나포된 교포 김선일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온 때는 2004년 6월22일, 이라크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20분쯤이었다. 어슴푸레 석양이 질 무렵 미군 순찰대가 고속도로 주변에서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다며 미군 이라크 사령부에서 서희부대와 제마부대에 연락을 해온 것이다. 현지 한국군 부대를 지휘하는 책임자이자, 8월에 이라크로 추가 파병될 한국군 자이툰 사단의 작전 부사단장으로 내정된 최종일 준장은 시급히 시신을 확인하고 인도받기 위해 운전병 한 명만 달랑 데리고 무작정 현지로 출발한 것이다. 


2004년 10월8일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 중인 자이툰 부대원들이 긴급상황 대비 출동 훈련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희상 청와대 국방보좌관과 함께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 근무하던 최종일 장군은 미국의 워 칼리지 출신으로 미군과 협조를 도모하는 데 최적의 자원으로 선발돼 자이툰 사단의 선발대로 이라크에 와 있었다. 이라크 현지에서 미군과 함께 한국군의 새로운 파병 지역을 점검하고 물색하던 5월31일, 바그다드 팔루자 지역에서 가나무역의 김선일씨가 저항 세력에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나무역 측은 정부에 자기 회사 직원이 납치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해진 6월20일께야 회사 사장은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다. 이 사건이 알려진 6월21일, 국내 여론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인질 사건이 기폭제가 돼 국내에서는 연일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 한 번도 공식 문건으로 파병 요청 안 해


노무현 정권 초기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던 최 장군은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지켜봤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단 한 번도 공식 문서나 또는 공식 회의 안건으로 한국에 파병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한국 측 인사를 개별적으로 접촉해 비공식적으로, 구두로 파병을 요청했다. 그들은 절대 파병을 요청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60년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결정도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박정희 정권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인지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다.


이라크 파병 요청 역시 2003년 9월에 롤리스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가 반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만나 개별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파병 요청과 우리의 파병 결정은 어두운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속삭이는 외교’, 즉 ‘밀약’의 성격을 갖는다. 훗날 이명박 정권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요청 역시 그러했다.


이렇게 불분명하게 전달되는 파병 요청에 한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우선 구두로 전달된 파병 요청을 공식적인 요청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조선 시대 때 후금 정벌을 위해 파병하라는 명나라 황제의 요구도 광해군에게 구두로 전달되었다. 광해군은 “황제의 칙서가 아닌 구두로 전달된 요청이 황제의 진의인지 확신할 수 없다”며 시간을 끄는 구실로 활용했다. 이것이 명 황제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신하들의 반발로 광해군은 극심한 레임덕을 겪다가 제거되는 정변을 맞았다. 구두로 전달된 파병 요구는 그 내용부터가 불분명했다.


미국은 “사단급 전투병을 파병해달라”고 했지만 미군의 사단은 7000명 정도이고 한국군은 1만5000명이 넘는다. 사단급이라고 해도 그 병력 규모가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아예 “이라크 어느 한 지역을 장악하는 데 이 정도의 전투력이 필요하니 한국이 이를 담당해달라”고 분명하게 요구 사항을 적시해야 하는데 미국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구체적인 요구를 했다가는 한국으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는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초강대국으로서 전략적 위신을 중시하는 미국은 모호하게 파병 요청을 하면서 나머지는 한국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 국내에서는 극심한 파병 찬반 논쟁으로 국론이 분열된다.  


NSC 상임위에서 아르빌로 파병지 결정


파병에 따른 국내 정치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의 강경한 대북 정책을 완화시키려 했다. 2004년 4월 방콕에서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의 대북 군사행동을 견제하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부시 대통령이 “내가 몇 번이나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또 그 문제를 거론하는가”라며 화를 냈다. 이에 노 대통령이 “이라크에 파병을 빨리 해주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자 부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파병이 밀약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미국은 한국에 그 대가로 무엇을 줄 것인가. 당시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석유’라고 확신했다. 유전 지대인 키르쿠크를 한국군 파병지로 권유한 것이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쿠크는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석유 따위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미국의 대북 정책 전환을 대가로 챙기려 했다. 이후 파병지로 이라크 남부 바스라 지역을 고수하는 국방부와 이라크 북부 아르빌을 주장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이에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국방부는 남부 바스라 지역이 다소 치안이 불안하긴 하지만 병참 보급선이 짧아 부대를 전개하고 숙영지로 운용하기에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부 아르빌은 병참 보급선이 길고 인근 터키와 인접해 쿠르드족과 외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국방부 의견에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왜 북부 아르빌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느냐”고 국방부를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우리 병사가 한 명이라도 죽으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온다”고 주장했다. 결국 “치안 상태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 차장의 주장이 관철돼 남부 바스라 지역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지가 북부 아르빌로 결정된 것은 김선일씨가 피랍되었던 6월18일 NSC 상임위에서였다.


물론 당시 정부가 김씨 피랍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한국의 파병 지역 선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라크 테러 세력들이 한국의 파병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돌연 6월21일 오전 4시, 이라크 알 자지라 방송이 한국인 김씨 피랍 사실을 공개하며, 알 자르카위 소속 그룹의 납치범이 “24시간 내 한국군이 이라크 내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오전 4시40분 주카타르 한국 대사가 외교부 본부에 한국인 1명 피랍 사실을 보고하고 외교부는 주이라크 대사에게 연락해 대책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전 6시30분 최영진 외교부 차관 주재로 긴급대책반이 꾸려지면서 정부 대책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오전 8시에는 NSC 회의가 열렸고 외교부에는 국외테러대책본부가 구성됐다. 오전 9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가 열리는 등 비상체제가 가동되는 가운데 돌연 오전 10시에 최영진 차관이 “김선일씨 피랍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파병 원칙은 변함없다”고 천명했다.


2004년 6월26일 김해공항에 도착한 고 김선일씨 시신을 실은 운구차량이 경찰특공대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을 출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피랍된 김씨의 살해 직전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외교부 강경 태도에 노무현 대통령 노여움


당시 외교부가 무엇이 그리 급해 납치범들을 자극하는 말을 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외교부는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사태 해결보다는 “테러범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국제적 규범에 더 경도되는 행태를 종종 보였다. 훗날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가 발생했을 때 보여준 외교부의 이런 행태는 노 대통령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이날 오후 3시30분에는 청와대에서 NSC와 청와대 국정상황실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열렸다.


정재룡 본부대사 등 긴급 협상대표단 6명이 현지로 급파되었다. 22일 오전 현지에 도착한 협상대표단은 알 자르카위 측과 협상을 시도하는 한편, 반기문 외교부장관은 알 자지라 방송 등을 통해 이라크 파병 한국군의 역할이 전투 지원이 아닌 평화 재건 지원이라는 점을 집중 홍보했다. 노 대통령이 “김선일씨 구출 노력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한 가운데 이날 오후 6시쯤 아랍 위성TV 알 아라비야가 TV 화면 아래 자막으로 “한국인 억류 납치범 요구 시한 연장”이라고 보도해 사태 해결 가능성이 보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오후 10시20분, 미군으로부터 결국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복면을 한 납치범 다섯 명이 서 있고 그 앞에 김선일씨가 울먹이고 있는 가운데 그중 한 명이 성명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당신들은 이를 거부했다”며 납치 목적이 파병 철회였음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당신들이 스스로 초래한 일이다. 당신들의 군대는 이라크인들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저주받을 미국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성명서를 읽고 나서 그들은 울먹이는 김씨를 참수했다. 지옥의 묵시록에나 나올 법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다음 날 밤중에 시신 발견 현장으로 달려간 최종일 준장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신체 봉합 수술’을 받기 위해 인근 미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그곳은 명백히 전쟁터였다.


김선일씨의 무사 귀환을 비는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에서 연일 벌어지는 등 전 국민이 이를 기원하던 터에 날아온 이 비극적인 소식은 정부의 파병 방침에 거센 역풍으로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22일 새벽 2시 권진호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긴급 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이라크 파병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날 회의에는 권 보좌관 외에 정세현 통일부장관, 반기문 외교부장관, 조영길 국방부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한덕수 국무조정실장 등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김씨의 사망 소식을 보고받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김씨의 사망이 “나의 탓인가”라며 큰 자책과 부담에 시달렸음을 고백하고 있다.


2004년 6월21일 저녁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 및 피랍된 김선일씨 석방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자료사진


이라크 현지, 한국군 친화력 돋보여


참여정부는 ‘범정부파병지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파병 채비에 들어갔다. 파병 부대는 현재 이라크에 주둔 중인 서희부대·제마부대를 포함해 3655명 선으로 사단사령부와 민사 2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숙영 지역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사단본부와 1개 여단은 아르빌 공항에서 약 1.5㎞ 떨어진 라쉬킨 지역에 2×2㎞의 국유지를 무상 지원받는 것으로 했고, 나머지 한 개 여단은 스와라시 지역 1×1.5㎞의 사유지를 연간 1000달러에 임차하기로 했다. 한편 자이툰 부대 병력 및 물자 공수 임무, 환자 수송 등 항공 지원 업무를 맡게 될 공군 ‘항공수송단’을 C-130H 수송기 4대와 150여 명 규모로 편성해 자이툰 부대의 직할 부대로 운용하되,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러한 결정에 NSC 사무처는 부처의 다른 의견들을 제압하며 명실공히 파병 사령탑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라크 평화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한국군 자이툰 부대는 출국한 지 50일 만인 2004년 9월22일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인 아르빌에 도착했다. 자이툰 부대가 사용할 수백 대의 차량과 수천 톤의 장비·물자 및 병력이 1115㎞에 달하는 지상 구간을 종단했다. 이 엄청난 부대 이동은 한국군 창설 이래 최장거리 원정기동이었다.


자이툰 부대 황의돈 소장은 국방부 대변인으로 근무하던 김대중 정권 시절에 김동신 국방부장관이 집어던지는 재떨이를 가장 많이 얻어맞은 참모로 알려져 있다. 고약한 상관으로부터 마음을 강건하게 단련시킨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지휘관이었다. 선발대로 파견되어 와 있던 최종일 준장은 작전부사단장으로 그를 보좌하게 되었다. 군에서는 서로 파병군에 참여하려는 경쟁이 심해 육군 외에 해병대로 하여금 자이툰 부대의 외곽 경비를 담당하도록 했다. 아르빌의 벌판에 공항이 있고, 거기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 자이툰 부대 숙영지가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머나먼 이국땅이지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되었다는 자부심과 국민적인 격려와 지원을 등에 업은 부대원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이라크에서 미군은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등 문화적 갈등을 겪었지만, 한국군 부대원들은 남다른 친화력을 보여주었다. 한국군은 미군과 같은 문화적 우월감을 보이지 않고 겸손했다. 미군은 한 손으로 껌을 던져주었지만, 우리는 두 손으로 건네주면서 주민의 손을 잡았다. 그런 미군은 이라크에서 갈수록 몰락했다. 아르빌은 문명과 문화가 만나는 국제 정치의 첨예한 현장이었다.


전 지구적 범위에서 미국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네오콘의 세계관, 패권으로 전 세계를 안정시키는 유토피아적인 미국의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변두리에서 그 유토피아는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고, 한국군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확보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한국군은 이라크에 파병한 세계 3위의 국가로서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하기까지 아르빌을 수호하면서 나름 성공적으로 국가 이익을 수호했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핵문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벌인 세계 전쟁을 마주하면서 한반도의 운명은 또 한 번 요동치고 있었다.


[시사저널] 2014.05.01.